소주 반병
[박준의 마음 쓰기] (10)
추석은 늘 고요했다. 우리 집 추석은 한복 입고 성묘 가는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고, 연휴 동안 해외여행을 떠나는 유행과도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새벽같이 일어나 전을 부쳤다. 네 식구가 한 끼 배불리 먹고 조금 남을 정도로만. 엄마는 녹두전과 동그랑땡을 부쳤고 나는 비교적 쉬운 호박전과 동태전을 맡았다. 애호박과 동태포에 밀가루를 묻히고 다시 계란 물을 입히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손에 묻은 밀가루가 점점 굳어가는데, 때때로 손가락을 비벼 그것을 동글동글 말아내는 일을 내 나름대로 좋아했다.
추석 날 아침에는 한 김 식힌 전과 함께 토란국을 먹었다. 토란 특유의 식감이 그리 달갑지 않아 앞니로 조금씩 베어 먹던 기억. 그렇게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고 나면 아빠와 함께 집을 나섰다. 친구들은 열 몇 시간씩 도로 정체를 뚫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만나고 온다지만 나는 추석에 만날 수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없었고 아빠에게는 추석에 만날 수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는커녕 찾아갈 선산이나 묘소도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아빠는 어려서 살던 동네로 향했다. 서울 종로의 청운동과 창성동, 효자동 일대 촘촘한 골목. 요즘은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과거 명절의 서울 도심은 놀라울 정도로 한산했다. 나는 자유로우면서도 호젓한 느낌마저 드는 그 풍경을 좋아했다. 다만 추석 당일 문을 열지 않는 식당이 많은 탓에 주로 점심을 거르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어 맞이하는 이른 저녁상, 으레 아침에 먹고 남은 전에 된장과 씻은 김치를 넣고 끓인 찌개가 올랐다. 찬 소주 한 병도 오래된 약속처럼 함께했다.
한평생 건설 노동자로 일한 아빠는 자주 소주를 마셨다. 저녁밥을 먹으면서 반주를 즐긴 것. 한 번에 반병씩 마셨는데 이보다 적게 마시는 날은 있어도 더 마시는 날은 없었다. 그러니 우리 집 냉장고에 있던 건 따지 않은 소주, 반병 정도 남은 소주 둘 중 하나였다.
소주 반 병을 남겨 다시 냉장고에 넣어두는 일에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기술이 필요하다. 아시다시피 과거 소주병 뚜껑은 지금처럼 돌려 따는 방식의 알루미늄 소재가 아닌, 작은 톱니를 왕관 모양처럼 두른 철 소재였다. 처음 열 때 뚜껑이 휘어지지 않아야 다시 냉장고에 넣을 때도 꼭 닫을 수 있는데, 이러려면 병과 병따개를 최대한 밀착해 천천히 힘을 주어 열어야 한다. 소주 맛을 알기도 전에 터득한 기술이다.
다만 추석 날에는 이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날만큼은 아빠가 한 병이든 한 병 반이든 말끔히 비웠으니까. 별다른 말도 없이 혼자서 묵묵하게 마시는 소주. 물론 내가 성인이 돼서는 함께 마셨다. 역시 별다른 말 없이 묵묵하게. 고요 속에서 가끔 잔을 부딪치며. 이번 추석을 앞두고 평소 잘 마시지 않는 소주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올해부터는 나 혼자서 마셔야 한다. 반병 정도만 마시고 오래전 내가 살던 동네에 한번 가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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