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오페라 '나비부인'과 한류
푸치니도 이 흐름에 올라탔다. 베르디 등 막강한 이태리 오페라 작곡가 라인의 막내 푸치니는 런던에서 같은 이름의 연극을 보고 ‘나비부인’을 작곡했다. 오페라의 배경은 19세기 일본의 개항장 나가사키다. 몰락한 가문의 15세 게이샤(芸者) 소녀 초초와 미 해군 장교 핀커튼의 사랑 이야기다. 미국으로 떠난 핀커튼을 그리워하며 초초가 부르는 ‘어느 갠 날’은 오페라 아리아 중 손꼽히는 명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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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절에 공연 방송했다가 논란
독립 기리는 날 ‘일본 문화’ 공분
지금은 한류가 세계 문화의 중심
우리부터 여유갖고 포용력 키워야
」
데뷔 120년이 된 이 고전 오페라가 한국에서는 고전(苦戰)을 면하지 못한다. 왜일까. 이야기의 줄거리도 그런 데다 그 속에 담긴 ‘일본색’이 우리에게 불편한 탓이다. 게이샤, 기모노, 민머리 사내, 종종걸음, 게다가 잠깐 등장하는 일본국가 기미가요까지. 최근 공영방송 KBS가 이 문제로 이슈에 중심에 섰다. KBS는 광복절 당일, 그것도 0시에 오페라 ‘나비부인’ 공연 실황 영상을 내보내 분란을 자초했다. 일제로부터 독립을 기리는 날에 이게 말이 되는가, 많은 이의 공분을 산 이유다.
오래전 국립발레단도 이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적이 있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발레 버전을 시즌 레퍼토리에 넣었다가 부랴부랴 빼는 일이 있었다. 국립발레단은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우려를 이유로 들었으나, 역시 일본색이 강한 작품이라는 일각의 지적을 간과할 수 없었다. 이후로 발레든 오페라든 국립예술단체에서 ‘나비부인’ 공연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래서 앞으로 오페라 ‘나비부인’의 운명이 궁금하다. 국공립이든 민간이든 당분간 ‘나비부인’을 공연하기가 어려워진 게 아닐까. 엄격한 자기검열은 아니더라도 작품에서 일본색을 걷어내는 일에 몰두해야 하니까. 만약 공연을 만든다면 두 가지 방식이 있겠다. 하나는 작품에서 짙은 일본색을 최대한 걷어내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플롯은 유지하되 과감하게 각색이나 번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의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고전 명작의 반열에 오른 원작에 견줄 수는 없다.
세계적으로 검증된 고전이라 해도 특정 국가의 색채가 강한 작품이 국경을 넘는 데는 고통이 따른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뮤지컬 버전 ‘미스 사이공’은 베트남에서 환대받지 못한다. 영화와 뮤지컬 고전인 ‘왕과 나’도 이야기 배경인 태국에서는 같은 처지다. 두 작품은 해당 국가의 위신과 직결되는 문제다. 오페라 ‘나비부인’은 이야기 당사자가 일본이지만, 과거에 당한 상처 탓에 우리가 그 고통을 떠안는다. 공연에서도 반복되는 우리의 ‘웃픈’ 현실이 안타깝다.
한 세기 전의 일본풍 유행에 편승한 오페라 ‘나비부인’을 보면서 한류를 떠올렸다. 한류는 우리나라가 문화예술 변방에서 세계 중심국으로 자리 잡은 일대 사건이다. 서민들이 즐기던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繪)가 촉발한 자포니즘을 부럽게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그 보다 훨씬 전에 유럽에 불었던 중국 문화 열풍 ‘시누아즈리’(chinoiserie)는 언감생심이었다. 한참 후발주자인 우리가 그걸 극복하고 이루어낸 게 한류다. 1990년대 후반 한류 형성기에 일본 대중문화 개방 같은 두둑한 배짱과 자신감이 있었기에 지금의 열풍이 가능했다.
한류는 국경을 넘는 일이다. 우리 콘텐트가 높고 견고한 ‘문화국경’을 넘어 세계인의 마을 속에 자리 잡으려면 우리부터 포용력을 키워야 한다. 이제 앞선 자의 관대함과 여유도 가질 때가 됐다. 그래야 한류가 일시적 유행이 아닌 ‘코리아이즘’(koreaism)으로 진화할 수 있다. 까짓것, 이미 자신있게 받아들여 대수롭지 않게 넘겨도 그만인 일본색이 뭐라고!
정재왈 서울사이버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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