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인력으로 공연장 채우는 일본, 클래식 선진국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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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의 예술과 정치
9월 27일 일본 자민당 총재 선출은 사실상 일본 총리를 뽑는 선거다. 그럼에도 당내 선거인지라 각 후보의 예술 취향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캠페인 동안 차기 내각의 문화 정책을 살피기 어렵다. 여론조사 수위를 달리는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은 프라모델 조립,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은 인형극 분라쿠(文楽) 감상이 취미라는 정도가 알려져 있다.
전후 쇼와시대(1947~89), 헤이세이 시대(1989~2019), 레이와 시대(2019~)를 거치는 동안, 음악통 일본 총리가 몇 있었다. 대표적 인물이 고이즈미 준이치로다. 고이즈미는 중고생 시절 학교 악단에서 1바이올린을 맡았고 지노 프란체스카티,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같은 바이올린 명인을 좋아했다. 총리 재임 중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방문해 슈뢰더 독일 총리와 바그너 악극을 봤고, 폴란드, 체코를 방문해 작곡가 쇼팽과 스메타나의 묘역을 찾았다.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30년대 SP시절부터 지휘자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바리톤 게르하르트 휘슈 레코드를 수집한 클래식광였다. 1983년 레이건 미 대통령 부부를 일본식 가옥으로 초청해 직접 나각을 불기도 했다. 후쿠다 야스오는 콘서트 방문 대신 자택의 탄노이 스피커로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을 들으며 정쟁 피로를 녹인 오디오필이다.
1950년대 눈부신 경제 성장을 거듭한 일본이 클래식 시장에서도 국제적 거물이 된 건 1950년대 초반 민간 항공사의 제트기 도입으로 일본과 유럽이 연결되면서다. 1953년 영국항공(BA) 전신 BOAC가 런던-도쿄 노선을 취항하면서 유럽 악단과 오페라단의 일본 투어 시대가 열렸다. 1954년 카라얀이 SAS 제트기를 타고 NHK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고, 빈 필하모닉(1956년), 베를린 필하모닉(1957)이 도쿄를 노크했다. 1956년부터 이탈리아 가극단 이름으로 방일 오페라가 성행했고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가 이 경로로 일본에 데뷔했다.
클래식에서 높아진 일본의 국격을 대외적으로 상징한 인물은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1935~2024), 피아니스트 우치다 미츠코(1948~),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1971~)였다. 일본인이 해외 일류 악단을 지휘하고 메이저 레이블에 기록을 남긴 자부심은 오자와가 감독 자격으로 오는 보스턴 심포니 산토리홀 공연에서 극치를 이뤘다. 20세기 후반 소니 왕국을 이끌었던 오가 노리오 회장이 보스턴 심포니에 거액을 기부했고 오케스트라는 탱글우드 축제 공연장 이름을 ‘세이지 오자와 홀’로 지었다.
우치다는 외교관 부친을 따라 빈과 런던에서 활동했고 1970년 쇼팽 콩쿠르와 1975년 리즈 콩쿠르에서 준우승했다. 훗날 영국에 귀화했지만 일본에선 우리가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을 보듯 한핏줄로 여긴다. 미도리는 줄리어드음대 도로시 딜레이 문하에 있었고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뉴욕 필 협연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보스턴 심포니 공연에서 바이올린 줄이 끊어지면서도 연주를 멈추지 않은 에피소드는 신화처럼 회자됐다. 이제는 신동 프레임을 벗어나 중견으로 자리잡아 올 가을 빈 필하모닉 협연으로 서울 관객과 만난다.
음반 소비, 방문 공연 개런티, 자국 오케스트라 관객수에서 일본은 세계 최고의 시장이 됐지만 진정한 ‘클래식 선진국 클럽’에 가입했는가의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아직도 러시아 차이콥스키,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폴란드 쇼팽 콩쿠르를 ‘세계 3대 콩쿠르’로 분류하면서 자국에서 우승자가 나오면 스타로 부양하는 마케팅은 일본, 한국, 중국이 같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선 스와나이 아키코·가미오 마유코(바이올린), 우에하라 아키코(피아노)가 우승을 거뒀고 일본 방문 해외 악단에 단골 협연자가 됐지만 이제는 예전만큼 티켓 파워가 없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호리고미 요즈코, 도다 야요이(바이올린)가 우승했지만 이들은 일본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무대가 잘 없다. 쇼팽 콩쿠르에선 한국(조성진), 중국(윤디 리) 우승자가 나왔지만 일본은 아직 없고, 내년에 가메이 마사야의 선전을 기대하는 정도다.
언제나 우상향으로 성장할 것 같던 일본 클래식 시장은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와 맞물려 이제는 버블 시대의 활력을 완전히 잃었다. 서구에서 돌아보는 일본 클래식 시장의 정점은 히로히토 천황이 사망한 1989년이다. 그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시부야 분카무라에서 투어를 했고, 천안문 사태, 카라얀 사망, 베를린 장벽 붕괴를 겪으며 일본은 관련 페스티벌 제작과 오케스트라, 아티스트 수입을 통해 세계 음악계의 중심을 자처했다.
하지만 헤이세이 시대 리먼 브라더스 사태(2008), 동일본 대지진(2011), 레이와 시대 코로나 팬데믹(2020~21)을 겪으며 일본의 기존 클래식 성공 문법은 해체됐다. 호황기에 해외 오케스트라 투어를 소화하던 지방 정부 산하 공연장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긴축 재정으로 각종 예산을 줄였고 해외 오케스트라 지역 초청도 격감했다.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드레스덴 필하모니처럼 도시 2·3등 악단의 원정 투어도 곧잘 받아주던 호시절은 지났다. 비와코홀, 효고현립문화센터는 오케스트라 수입보다 유럽 오페라단 공동 제작에 재정의 비중을 두고 있다. 공연 후 일본에 남는 게 무엇인가에 방점을 두는 것이다.
코로나 휴지기는 일본이 얼마나 내실 없는 클래식 사업을 해왔는지 돌아보는 시기였다. 노련한 매니저들이 직종을 떠났고 양질의 젊은 인재가 충원되지 않아 일본은 현재 노년 관객 타깃의 마티네 공연에 특화된 상태다. 개발도상국 관점에서 외국의 클래식 상품 수입에만 능했지 국제 경쟁력을 갖춘 일본 오케스트라, 오페라 상품 개발에 소홀히 한 결과가 지금의 무기력으로 드러난 셈이다.
신국립극장·도쿄문화회관 협업 기대
일본이 체질 변화 필요를 절감한 계기는 2020 도쿄 올림픽 실패다. 과거 일본 올림픽 시절 유럽 악단이 분위기를 띄우던 모델이 2020 도쿄에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바리톤 어윈 슈로트가 출연하는 오페라 ‘찬란한 주인’ 제작이 무산됐고, 이례적으로 한 시즌에 두 차례 일본을 방문하기로 했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요요기 공연도 결국 취소됐다. 외국 인력을 빌려 올림픽 문화 축전을 채우려는 자세 자체가 문화 선진국 답지 않았다.
지난 2월 타계한 오자와 세이지 시대를 마감하면서 일본은 다음 국면으로 나가려는 자세가 보인다. 신국립극장과 도쿄문화회관이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협력한 경험이 향후 대형 오페라, 발레 협업으로 진전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 기획사들이 자국 신인 발굴에 나서고, 고음악 대가 마사아키 스즈키의 바흐 콜레기움 재팬도 아들 마사토 스즈키로 무게추가 옮겨지며 활로를 찾고 있다. 정치 지형이 바뀌지 않을 때 클래식 시장을 바꾸는 건 결국 정부가 아니라 민간의 힘이다. 일본 경제가 살아나야 일본 클래식 시장도 내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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