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때 의열단, 38세때 의용대…그의 삶이 곧 항일투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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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⑧ 석정 윤세주
“우리의 제1차 계획은 불행히도 파괴되고 무수한 동지들이 피포, 판죄되었지만 피포되지 않은 동지들이 도처에 있으니 반드시 강도 왜적을 섬멸하고 우리의 최후 목적을 달도할 날이 있을 것이다.”(1921년 밀양폭탄사건의 윤세주 선생 법정 진술)
석정(石正) 윤세주(尹世 )는 1900년 경남 밀양에서 윤희규와 김경이의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무과 병과에 급제해 통정대부에 올랐다하나 석정 출생 당시는 관아 서리였다. 임시정부 만주독립군통합기관의 참의장을 지낸 윤세용,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과는 6촌 형제간이다.
3·1운동을 계기로 석정의 항일독립투쟁이 본격 전개된다. 석정은 고종 인산일(장례일, 3월 3일) 참례를 위해 인척 독립운동가 윤치형과 함께 상경해 3·1운동에 참여한 후 밀양에 돌아와 10여 명의 동지들을 규합하고 영남지역 최초로 ‘밀양 3·13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석정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수천 명에 달하는 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이는 밀양 일대로 파급됐다. 일제는 주동인사들을 체포했으나 석정과 윤치형은 몸을 피했고 궐석재판에서 징역 1년6월형을 선고받았다. 경남 일대에서 항일선전활동을 계속 하던 석정은 그 해 7월 윤치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길림에서 다시 김원봉과 만난다.
당시 길림에서는 망명지사들이 ‘조선독립군정사’를 조직해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다. 김원봉을 단장으로 석정을 비롯해 신흥무관학교졸업생 등 13인은 육탄혈전의 기치를 내걸고 ‘의열단’을 조직했다. 19세 최연소 창단대원 석정은 자원해 1919년 말 제1차 국내특공거사 선발대로 국내에 잠입했고 필요한 무기는 상해~대련을 거쳐 밀양으로 은밀히 반입됐다. 그러나 거사 직전 은닉한 폭탄이 발각되면서 석정과 동지들은 체포되고 만다. ‘밀양폭탄사건’으로 20명이 체포되었고,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은 석정은 법정과 감옥에서도 항일의 기백을 떨쳤다.
1927년 6년 7개월 만에 경성형무소에서 석방된 석정은 밀양으로 돌아가 ‘밀양청년회’ ‘신간회 밀양지회’ 등에서 중심역할을 했고 중외일보 등에서 언론을 통한 민족문화사업과 항일운동에 나섰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32년 봄 그는 또다시 중국망명을 결행했다. 일제는 매일 가택수색을 하고 가족을 협박했지만 이미 탈출한 뒤였다. 의열단에 복귀한 석정은 봉천(현재 심양)에서 이육사를 만나 육사 처남 안병철과 함께 남경으로 가서 13년 만에 김원봉과 재회한다. 김원봉과 석정은 남경에서 중국 국민당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조선혁명군간부학교’를 창설한다. 석정은 이육사, 안병철과 함께 입교해 1기로 졸업했다. 이후 2~3기의 교관이 되었고 의열단 활동방향과 특파공작관리 등에 깊이 관여하면서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한편 1937년 중일전쟁으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면서 중국 국민당이 한·중연합전선을 제의해와 중국군관학교에 항일청년 83명을 입교시키고 석정도 교관요원으로 합류한다. 이듬해 이들이 졸업한 후 교직원과 졸업생 등 100여 명은 무한(지금의 우한)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정규부대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한다. 김원봉이 대장, 석정이 정치조를 맡아 대적 선전공작과 정보전 등 항일전을 전개하면서 국제적 관심을 끌게 되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조선의용대 주력부대는 화북지대로 옮겨가게 된다. 창설 후 2년간 화중·화남전선에서 활동하다 120여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는 만주와 인접하고 20만명 이상 동포들이 거주하는 화북지역으로 이동해 항일전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400여명에 이르는 대원은 갈라지게 되며 김원봉 등 본대는 중국 공산당과 갈등 끝에 중경에 잔류했고 후에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다.
1942년 일본군은 화북지역의 공산당 팔로군을 소탕하기 위해 40만 병력을 동원했고 5월에는 3만여 병력이 항공기와 전차까지 동원해 항일근거지를 공격해왔다. 팔로군은 후퇴하게 되었고 인근에 주둔하던 의용대원들도 급히 퇴각하게 된다. 팔로군 간부 등과 비전투요원, 의용대 측 비전투요원 등 방대한 인원이 퇴각하던 중 수천 명의 일본군이 공격해왔다. 팔로군 경위부대와 조선의용대는 합해서 200여 명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동·서쪽고지를 점령해 일본군을 견제하고 고지 사이로 비전투인원들이 철수하도록 엄호하기로 한다. 의용대는 동쪽고지 점령에, 팔로군은 서쪽고지 점령에 나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고 이틈에 비전투원들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팔로군 지휘관 팽덕회 등도 이때 목숨을 구했다.
유해 하북성 안장, 1982년 건국훈장 추서
일본군의 추격으로 비전투대원 40여 명은 계속 쫓기게 되었고 석정 등 세 용사는 다른 사람들이 발각되지 않도록 분산·도피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석정은 전투 중 다리에 총탄을 맞고 산속에서 운명을 달리했으니 그의 나이 마흔둘이었다. 시대를 꿰뚫는 안목, 치밀한 논리, 뛰어난 언변, 솔선수범하는 지도력으로 항일운동 선봉에 섰던 선생은 전투적 항일투쟁에 젊음을 불살랐고 최후 또한 항일전장에서 장렬하게 맞이했다. 조선의용대는 기관총 1정과 몇 자루의 소총으로 몇 배나 되는 병력에 맞서 싸웠고 훗날 팔로군은 “조선동지들이 보여준 두려움 모르는 영웅적 기개를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석정의 장례는 화북지방의 당·정·군 각 기관과 민간단체가 주관하여 치르고 묘비문을 세웠다. “석정열사는…조선의열단,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립하고 영도하였으며 남경의 조선혁명간부학교도 그와 같았다…1941년 7월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화북 태항산의 항일근거지로 와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영도함과 아울러 중국과 어깨를 겯고 일본제국주의를 향한 싸움을 벌였다.” 석정 등 일곱 열사의 유해는 하북성 섭현 연화산에 안장되었다가 1950년 하북성 한단시 ‘진기로예열사능원’에 재안장되었다. 1965년 밀양 영남루에 숭모비가 세워졌고, 1982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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