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영의 밥데이터] '탈출구' 실종...장기적 '울분'에 빠진 사람들
[더팩트 | 이은영 칼럼니스트] 사이가 매우 나쁜 남녀 커플과 한달간 함께 여행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그 여행은 끔찍한 여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이 이러한 ‘스트레스성’ 여행길을 걷고 있는 것과 같다는 조사 결과가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 연구팀은 지난 6월 12~14일 전국의 성인 남녀 1,024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울분과 사회·심리적 웰빙 관리 방안 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50.8%는 ‘심리적 이상이 없다’고 답했으나 39.9%는 ‘중간 정도의 울분’ 상태, 9.3%는 ‘심각한 울분’ 상태라고 언급해 강도(强度)는 다르지만 울분이 있다는 응답이 절반(49.2%)에 달했다.
이 연구는 울분 상태를 이상 없음(1.6점 미만), 중간 울분(1.6점 이상∼2.5점 미만), 심각 울분(2.5점 이상)으로 나눴고 1.6점 이상은 ‘장기적 울분 상태’로 조작적 정의했다.
특히 자신을 경제적 하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32.7%)의 60%는 ‘중간 정도’의 울분 상태라고 응답해 경제적 상황 인식과 울분 감정 사이에는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 ‘울분(Embitterment)’이란 어떤 감정 상태일까? 화나 불만과는 다른 감정인데 이번 조사를 실시한 연구팀에서는 울분을 ‘분노와 함께 좌절과 무력감이 동반되는 복합적 감정 상태’이며 모욕감, 부당함, 신념에 반하는 것에 대한 강요 등의 스트레스 경험이 중첩될 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15개의 부정적 사건을 제시하고 최근 1년간 부정적 경험을 했는지를 물었는데, 전체의 77.5%는 ‘그런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누구나 살면서 이런저런 시련을 겪게 되기에 조사 결과가 충격적이지는 않지만 만일 부정적 경험이 해소되지 않고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쌓이게 된다면 어떨까?
‘심각한 울분을 겪는다’는 9.3%의 응답자들 중 60%는 "자살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답해 울분의 심리상태가 우울증이나 자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심각한 울분’ 경험은 60대(3.1%)보다 30대(13.9%)에서 약 4배 가량 더 높아 우리나라 30대의 사회적 스트레스 정도가 심각함을 드러냈다.
일례로 최근 사회문제가 된 전세 사기의 경우, 국토교통부 전세사기피해지원위가 지난해 6월부터 올해 4월까지 접수된 사례를 심의한 결과, 피해 건수는 총 4,485건이었는데 연령별로 보면 30대가 2,373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20대로 1,062명이었다. 아무래도 사회초년병이어서 경험이 부족한 점과 함께 가장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하는 연령대이기에 범죄 대상이 된 것 같다.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 붕괴를 확정했다’로 표현되는 ‘의정(醫政) 갈등’은 또 어떤가?
명의를 꿈꾸던 1만 8000여 명의 의대 재학생들과 전공의들이 정부의 출구없는 ‘밀어붙이기 정책’으로 혼란에 빠졌다. 보다 못한 학부모들이 ‘전국의대생학부모연합(전의학연)’이란 단체를 만들어 의대생들의 학습권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섰다.
이 단체에 속한 한 학부모는 "2025학년도 의대 신입생을 뽑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 마치 ‘선분양 사기꾼’과도 같다"며 교육부의 졸속 정책을 질타했다. 더구나 혼돈에 놓인 2030세대들의 ‘장기적 울분’이 얼마나 클지는 상상조차 힘들다.
마침 이 모든 사태들을 관리해야 하는 윤대통령의 국정 브리핑이 지난 29일 있었다.
한 기자가 '의료 공백이 장기화되므로 정부의 2000명 증원 규모를 조정하고 타협점을 찾는 것은 어떤지‘에 대해 묻자 윤 대통령은 ‘의사 단체들이 합의된 안을 갖고 온 적이 없다’며 ’남 탓‘을 했다. ‘응급실 뺑뺑이’ 사고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도 ‘지방 응급실엔 원래 의사가 없었다’며 의료 개혁 때문에 발생한 상황이 아니라는 인식을 드러냈다. 불안에 떠는 민심과 너무 다른 현실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유독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사건 사고들이 많았다. 세월호, 이태원 참사, 채해병 사건, 그리고 최근 중고등학교에 퍼진 딥페이크 사건 등이 그런 경우인데 문제는 왜 이런 사건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진상 규명이 힘들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나에게는 나쁜 운이 오지 않길 기도하며 ‘각자 도생’이란 주문을 외칠 뿐이다.
그리고 장기적 울분에 빠져 괴로워할 뿐이다.
leyug2020@naver.com
※ 본 칼럼 내용은 필자의 주관적 시각으로 더팩트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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