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369] 에세이의 맛
올여름 “보통 사람들은 각자의 ‘호불호’라는 게 있잖아? 근데 너는 ‘호호호’가 있는 것 같아!”라는 귀여운 문장에 꽂혀 영화감독 윤가은의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요즘 ‘아네스 바르다’랑 ‘켄 로치’ 영화를 다시 보고 있는데”라고 말하려다가 ‘뻥’이라며 “드라마 ‘펜트하우스’와 ‘결혼 작사 이혼 작곡’을 보는 재미로 에너지를 충전”한다는 말에선 빵 터졌다. 문득 ‘니체’와 ‘프루스트’를 다시 읽고 있다고 말하려다가, 주말이면 ‘반드시 끝내는 힘’ 같은 자기 계발서와 ‘나는 솔로’를 보며 바닥난 에너지를 긁어 담는다고 말하는 내가 상상됐기 때문이다. “아무도 못 봤겠지?” 하는 마음으로 빅맥에 콜라를 원샷하는 비만 클리닉 의사 같은 기분이랄까.
전문가들의 사적인 에세이를 읽는 건 솔직함과 취향 때문이다. “별다른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재능. 그것은 바로 성실함이다”라는 문장에 꽂혀 읽은 김교석의 ‘아무튼 계속’에서 삶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그의 생활 습관을 읽는 것도 흥미로웠다. 집안 살림 개념이 모든 게 정확한 위치에 반듯하게 정리된 막 ‘체크인 한 호텔방’이라니. 잘 닫히지 않는 창문은 열지 않고, 깜빡대는 전구는 꺼서 결국 어둠에 익숙해지는 나 같은 게으른 적응론자에게는 놀라운 일이다.
김영민 교수의 ‘가벼운 고백’을 읽다가 “상반기가 속절없이 가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음력이 존재하는 것”이란 문장을 보고 8월 달력을 넘기려다 혼자 흠칫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산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산 그리고 산 넘어 산!”이란 말 앞에선, 대학만 가면, 취업만 하면 술술 풀릴 줄 알았던 청춘을 지나, 칠팔십이 돼도 살아보지 않은 나이는 영 모르겠다는 예감에 겸손을 떠올렸다. “적성을 찾는다는 건 자기가 좋아하는 종류의 괴로움을 찾는 것”이란 말에 밑줄을 그으며 생각했다. 치킨에는 맥주, 햄버거에는 감자튀김처럼 여름은 에세이를 읽기 좋은 계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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