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줄이고 이승만 부각한 새 역사교과서... 뉴라이트 논란에 또 불씨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자유민주주의'로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통일
한국학력평가원 집필진 뉴라이트 논란
내년부터 고등학교에서 사용할 역사교과서 검정 결과가 공개됐다. 보수학계가 주장해 온 '자유민주주의' 표현이 전 교과서에 기술됐고, 한 교과서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은 부각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은 축소해 또다시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로 통일·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교육부는 2022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초중고 검정교과서 심사 결과를 30일 관보에 게재했다.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는 내년에 초등학교 3, 4학년과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부터 사용한다.
검정을 통과한 96종 교과서 중 역사교과서는 중학교 7종(지학사·미래엔·리베르스쿨·비상교육·해냄에듀·천재교과서·동아출판), 고등학교 한국사 Ⅰ·Ⅱ 9종(지학사·미래엔·리베르스쿨·비상교육·해냄에듀·천재교과서·동아출판·씨마스·한국학력평가원)이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9종에는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내용이 포함됐다. 개정 교육과정 역사과 성취 기준에 이 같은 내용이 명시됐기 때문이다. 보수학계는 '민주주의'로 기술할 경우 북한의 '인민 민주주의'까지 포괄한다며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해 왔다.
1948년 8월 15일은 모든 교과서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기술됐다. 보수학계는 이날을 건국일로 보고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주장해 건국절 관련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이승만 '독재' 아닌 '장기 집권' ·일본군 위안부 축소
처음 검정을 통과한 한국학력평가원의 한국사 교과서는 뉴라이트 논란에 휩싸였다. 이날 공개된 교과서 내용을 보면 이승만 정부를 다른 교과서들이 '독재 정권'이라고 표현한 것과 달리 '장기 집권'이란 용어를 썼다. 이 교과서는 학생들이 논의하는 주제탐구 활동으로 이 전 대통령이 1946년 통일 정부가 아닌 남한 단독 정부를 주장한 '정읍 발언'도 수록했다. 한 역사학자는 "정읍 발언 주제탐구 활동으로 이승만 정부의 단독정부론이 불가피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장기 집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납득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하다"며 "이 전 대통령의 독립운동 자금 유용이나 대미 위임 통치 건의 등은 빠져 균형적으로 다뤘다고 보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해당 교과서는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도 상세히 다뤘다. 수출주도 경제개발과 중화학공업 육성 등 주요 경제정책의 성과를 5페이지에 걸쳐 소개했다. 유신체제를 "현행 헌법으로는 평화 통일을 뒷받침할 수 없다며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여 헌법을 개정하였다"고 표현해 정당화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축소됐다. 본문에는 '젊은 여성들을 끌고 가 끔찍한 삶을 살게 하였다' 단 한 줄뿐이고, 주로 참고자료와 연습문제에 언급됐다. 서정주 등 친일 지식인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를 권력에 영합하는 친일파 시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의 친일 행위를 덮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쓴 아름다운 작품들은 우리 문학의 주요한 유산으로 인정해야'라고 주장한다"고 적었다.
김준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서 역사학자와 전현직 역사교사 등으로 구성한 검증단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부각하는 내용이 많고, 역사적 사건의 이유나 배경을 일부러 생략한 부분이 많다"며 "친일 뉴라이트 기조가 반영돼 있다"고 지적했다.
집필진 "식민지 근대화론 긍정" "일제 만행인지 몰라"
한국학력평가원 교과서 필진의 이력도 도마에 올랐다. 필진으로 참여한 김두진 전 고려대 연구교수는 2019년 논문(한국 '식민지 근대화' 논쟁과 '근대성' 인식의 재검토)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이 제기하는 주장들은 우리의 편향적인 민족주의적 인식을 돌이켜 보게 하는 계기를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남긴 공식적 제도 혹은 비공식적 제도가 식민지 근대화 내지 탈식민지 이후 한국 근대화의 한 요인으로 기능한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교과서를 집필한 배민 부산외대 교수는 2021년 한 유튜브 채널에서 기존 한국사 교과서에 대해 "일본강점기와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보면 굉장히 노골적이고 저질스러운 왜곡이 이뤄지고 있다는 게 제 시각"이라며 "일제 시대는 간악한 일제에 의한 수탈과 착취, 억압과 각종 비윤리적인 만행의 역사라고 쓰는데 정말 그런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60년에서 80년대 걸친 정권은 소위 독재정권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잔인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서 민주화를 갈망하는 한국인들을 억압하고 노동자를 수탈했다고 하는데 정말 맞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배 교수는 이날 과거 발언이 논란이 되자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내 개인적인 생각이나 의견을 내가 맡은 교과서 내용 부분 그 어디에도 드러내지 않았다"며 "교과서 집필은 검정 기준에 맞춰 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그에 충실히 따라서 집필했다"고 반박했다. 당초 집필진에 포함됐던 김건호 전 진명여고 교사는 지난해 11월 7일 교육부 장관 청년보좌역으로 임용됐다. 임용 이후인 같은 해 12월 교과서 검정이 진행되자 집필진에서 빠졌다.
"검정교과서 왜곡 막아야"... 내년 3월 도입
해당 교과서를 만든 한국학력평가원은 1999년 설립된 연 매출 4억 원 규모의 영세 출판사다. 교과서 검정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교과서 검정을 신청하려면 최근 3년간 검정을 신청하는 교과와 관련된 도서를 1권 이상 출판한 실적이 있어야 한다. 한국학력평가원은 지난해 한국사 수능 기출 문제집 달랑 1권을 발행한 뒤 자격 요건을 충족했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검정교과서는 청소년 역사교육에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역사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되 특정 사건을 부각하거나 축소하는 왜곡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번에 검정에 합격한 교과서는 현장 검토를 위해 다음 달 2일부터 전시본 형태로 각 학교에 공개된다. 학교별로 교과협의회 심의를 거쳐 10월 말 확정한 교과서는 내년 3월부터 사용된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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