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손님 명의’로 휴대전화 개통·대출 사기… 피해자에게 빚 갚으라는 법원
지적장애가 있는 30대 남성 ㄱ씨는 2021년 1월 한 휴대전화 매장 직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ㄱ씨가 과거 해당 매장에서 휴대전화를 개통한 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해 신분증·면허증·은행 계좌번호·비밀번호가 필요하단 용건이었다. ㄱ씨는 그 말을 믿고 신분증 등을 넘겼고, 직원은 본인이 ㄱ씨인 것처럼 개통신청서에 서명한 뒤 또 다른 휴대전화를 개통했다. 직원은 이 휴대전화를 이용해 공동인증서를 발급받고 저축은행 앱을 깐 뒤, ㄱ씨 명의로 500만원도 대출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ㄱ씨 동생은 해당 직원을 고소했지만 빚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매장 직원은 사기죄 등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지만, 대출금은 여전히 ㄱ씨 몫이었다. 억울했던 ㄱ씨 동생은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금융사 손을 들어줬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단독 신유리 판사는 “대출 약정은 명의를 도용하여 개통한 휴대전화 및 이를 이용해 발급받은 공동인증서를 이용해, 원고 명의를 도용하여 체결한 것이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권한 없는 자에 의한 계약으로 원고에게 효력이 없다”면서도 전자문서법에 따라 대출 계약이 유효하다고 봤다. 판결문의 ‘구체적 판단’을 보면 “전자문서법 제7조 제2항 제2호는 수신된 전자문서가 작성자 또는 그 대리인과의 관계에 의하여 작성자 또는 그 대리인의 의사에 기한 것이라고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 자에 의해 송신된 경우엔, 의사표시를 작성자의 것으로 보아 행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썼다. 즉, 휴대전화번호 실명인증 절차, 신분증 사진 제출, 원고 명의 계좌 1원 송금 등 여러 본인확인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대출 채무는 원고에게 귀속된다”는 것이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이 판결을 2024년 올해의 ‘주목할 판결’ 중 하나로 선정했다. 스마트폰을 활용한 손쉬운 비대면 금융거래 활성화로 비장애인의 사회적 편익은 커졌지만, 장애인 등 취약계층은 의도적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디딤돌 걸림돌 선정위원’으로 참여한 윤여형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비대면 실명확인 방안에 따라 진행한 외견상 촘촘해 보이는 여러 확인 수단은, 지적장애를 이용해 신분증·계좌번호·비밀번호를 탈취하면 모두 무력화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지적했다. 소송대리인이었던 석윤수 법무법인 나은 변호사도 “비대면 등 금융제도의 발전을 도외시할 순 없지만, 금융기관이 이 방식으로 국민을 통해 돈을 벌었다면 또 그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도 정밀히 따져 방지 노력을 충분히 기울인다거나 사회환원 차원에서 책임을 고민해야 한다”며 특히 “이 사안과 관련한 (국회의) 입법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당 사례처럼 사기죄로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휴대전화 개통 단계에서 장애인에게 채무를 씌우는 문제도 심각하다. 한겨레21이 ‘장애인소비자 피해구제 상담센터’에서 받은 ‘휴대폰 피해접수 현황’(2024년 보건복지부 제출 자료)을 보면, 통신사 대리점이 중증장애인에게 인터넷 상품, TV 결합상품, 고가의 폰 구매를 종용해 총 612만원을 청구한 사례, 대리점이 중증장애인이 사용하는 전화기 외에 휴대전화 2대를 신규 개통하는 등 약 730만원을 청구한 사례 등 다양한 피해 내역이 나와 있다. 최근 3년6개월 동안(2024년 6월 기준) 접수된 총 피해액은 6억8063만여원에 이르는데 이는 상담센터에 접수된 피해 현황에 그치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규모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2021년 10월 강선우 의원실이 통신 3사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만 봐도, 휴대전화가 3대 이상 개통된 장애인이 6159명에 달했다.
언뜻 소액으로 보이는 천만원 이하의 채무도 장애인의 삶엔 덫이 된다. 2023년 장애인 실태조사 결과(보건복지부 2024년 4월 발표)를 보면, 장애인 중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비율은 20.8%로 5명 중 1명꼴이다. 특히 19살 이상 장애인 중 만성질환이 있는 비율이 84.8%일 만큼 건강이 취약한 상태라 보건의료비 등의 지출 비율이 크다. 현장에서 기초생활보장 수급 가구들을 조사했던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장애인은 소득수준이 낮은 가운데 다른 사람보다 의료비, 병원 오가는 교통비 등 지출 비율이 높은데, 이 상황에서 금융 피해로 인한 부채를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라며 “통신비 연체 규모가 커지면 정작 본인이 정말 써야 할 휴대전화 1대도 못 쓰게 끊겨서 일상생활을 위해 다른 사람 명의로 개통하는 분들도 계신데, 이럴 경우 요즘은 휴대전화로 인증하는 게 많아 일상의 많은 부분에 제약이 생기고 심리적 압박감도 커진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장애인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년 ‘장애인 인권의 디딤돌이 되는 판결’과 ‘걸림돌이 되는 판결’, ‘주목할 판결’을 선정하고 있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2024년 9월2일 오후 2시 대한변협회관에서 보고회를 연다. 2023년 1월부터 2023년 12월까지 선고된 건 가운데 ‘장애’를 언급한 판결, 장애와 관련된 사안이 주요하게 다뤄진 판결을 검토했다. 41명의 법조인이 4천여 건을 1차 수집·선별했고, 변호사 위원 4명(강송욱 법무법인 디엘지 변호사·윤여형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임한결 법무법인 원곡 변호사·조인영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과 학계 및 시민단체 위원 4명(김성태 서울장애인권익옹호기관 인권증진팀 팀장·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변재원 소수자정책 연구자·조한진희 다른몸들 대표)이 최종 디딤돌·걸림돌·주목할 판결을 선정했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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