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한미약품
임직원들, 경영권분쟁 휘말릴 가능성↑
30일 오전 9시 서울 송파구 한미약품 본사.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와 날 선 공방을 폈던 박재현 대표가 출근 중 기자들과 만났다. 그는 자신을 불러세우는 기자들의 물음에 죄송하다는 듯 목례를 하고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1시간여 뒤 박 대표는 로비에 모인 기자들을 임성기기념관이 있는 본사 20층으로 불렀다. 전날부터 쌓인 기자들의 문의에 답하고자 약식 기자간담회를 마련했다고 했다.
간담회가 열린 임성기기념관은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가 한 달 전 기자들과 만나 모녀(송영숙·임주현)와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 등 이른바 '3자연합'에 반대의사를 처음 밝혔던 장소다. 박 대표가 앉은 테이블 건너편 공간에는 임성기 회장의 흉상과 유품이 전시돼 있다.
평소 언론과 접촉을 꺼리던 박 대표는 이날 기자들 앞에서 자신이 인사발령을 내게 된 배경과 임 대표의 조치로 직위가 강등된 데 대한 입장을 차분히 설명했다.
간담회 도중 한미사이언스 법무팀 임원이 갑작스레 찾아와 순간 분위기가 싸늘지기도 했다. 이 임원은 굳는 표정으로 박 대표의 얘기를 듣기 위해 왔다고 했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박 대표는 사내 전산망에서 본인이 낸 인사명령이 계속해서 삭제되고 있고 이에 대한 법적검토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한미사이언스 IT부서 등에 속한 직원 개인에 대한 법적대응에 나설 의사도 있다고 했다. "직원들이 걱정된다"던 그에게서 나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발언이었다.
박 대표는 "한미사이언스 소속 일부 임직원이 부당한 지시를 거절하지 못하고 수용한 것으로 보여 안타깝다"면서도 "그러나 부당한 지시를 수행한 임직원들도 추후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3자 연합의 법률자문업무를 맡고 있는 법무법인 세종에 법적처벌이 가능한지 여부를 문의했고 이미 답변까지 받은 상태였다. 세종 측은 사내 전산망 접근을 고의로 차단하는 것은 형법상 업무방해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이러한 박 대표의 대응은 이번 경영권 분쟁과정에서 모녀나 형제(임종윤·임종훈)가 보여준 것과 다소 결이 다르다. 한미그룹은 지난 1월 OCI그룹과 통합을 두고 장기간 분쟁을 이어왔지만 임직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데는 모녀와 형제 모두 한목소리를 내왔다.
직원들은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이날 만난 한 직원은 "월급쟁이가 시켜서 한 것이지 무슨 힘이 있느냐"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내 편, 네 편' 식으로 직원들을 줄 세우기 시작했다는 시그널로도 읽힐 수 있다. 박 대표는 지난 28일 자신의 관장업무를 경영관리본부(인사팀과 법무팀을 포함)와 커뮤니케이션팀 등으로 확대하는 내용의 인사발표를 했다. 그동안 지주회사가 담당했던 업무다.
한미사이언스와 한미약품을 가리지 않고 한미그룹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그룹을 위해 일하던 직원들은 앞으로 어디 소속인지를 따져가며 자신의 처신을 정해야하는 상황에 빠졌다.
이날 간담회에 앞서 한미약품 관계자는 "한미사이언스는 상법상 한미약품의 모회사가 아니다"라고 했다. 한미약품의 독자경영 근거를 설명하기 위한 의중이었으나 멀쩡했던 한 가족이 어느 순간 터진 경영권 분쟁으로 이산가족이 됐구나 하는 씁쓸함을 느꼈다.
한미약품 측은 지주사의 임종훈 대표가 계열사 소속의 박 대표를 해임할 수 있는지 법률검토도 받았다. 임 대표는 박 대표의 직위를 사장에서 전무로 강등했을 뿐 대표이사직을 박탈한 것은 아닌데 한미약품 측이 앞서간 측면이 있다.
한편, 이날 임 대표는 박 대표의 인사명령을 두고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명했던 기존과 달리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전날 임직원을 대상으로 보낸 메시지에서 "회사와 임직원을 지키기 위해 첫번째 인사를 단행했으며 필요에 따라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했다. 고래싸움에 더 많은 새우들이 곤란한 처지에 빠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 앞선다.
김윤화 (kyh94@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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