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기자의 책에 대한 책] "헌책 펼쳤더니 '저주'를 퍼붓는 낙서가 적혀 있었다"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8. 30.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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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 187쪽엔 '살벌한'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책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저자는 잘 다니던 정보기술(IT) 회사를 그만두고 단골손님으로 들렀던 헌책방에 취직해 2007년부터 '이상한나라의헌책방'을 운영 중인 18년 차 책방지기다.

헌책의 메모엔 얼굴 없는 철학자들의 흔적도 그득했다고 책은 전한다.

진솔한 메모가 담긴 헌책을 구매하는 건, 단지 원저자의 글만이 아니라 그 책을 거친 독자들의 시간을 구매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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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스러운 낙서, 기이한 흔적이 꽉 찬 헌책 여행기

그 책 187쪽엔 '살벌한'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김○○ 부장, 너는 내가 반드시 죽인다."

섬뜩했다. 기묘했다. 더구나 이 헌책의 제목은 '타인최면술'(이종택 지음, 1978년 판본)이지 않던가. 이 책 구매자는 왜 저런 저주를 남겼던 걸까. '김 부장'이란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그를 해하려 했던 걸까.

윤성근 작가의 '헌책 낙서 수집광'은 헌책에 남겨진 천태만상 낙서를 수집한 뒤 쓴 글 모음이다. 책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저자는 잘 다니던 정보기술(IT) 회사를 그만두고 단골손님으로 들렀던 헌책방에 취직해 2007년부터 '이상한나라의헌책방'을 운영 중인 18년 차 책방지기다.

'헌책의 낙서'를 금화처럼 발견하는 마음이 책에 가득하다.

'입 속의 검은 잎'(기형도 지음, 1994년 판본)엔 한 독자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첫 부분에 적힌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갑자기 시가 읽고 싶었어. 엄마가 읽는 책에 표시해놓은 것을 그대로 놔두고 읽을 만한 곳 찾아서 시 보렴. 1999년 12월 30일."

한 엄마가 자녀에게 건넨 시집이 헌책방까지 유입된 것이었다. 펼쳐보니 기형도 시인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의 3행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또 여기서 화살표로 이어진 여백에 '엄마의 메모'가 가득했다. 이 책의 과거 구매자는 자신의 기억을 시집에 깨알같이 적어 딸 혹은 아들에게 전한 것이다.

윤 작가는 "그러니까 기형도의 유고시집은 엄마의 기억을 담은 작은 선물상자였다"고 표현한다.

헌책의 메모엔 얼굴 없는 철학자들의 흔적도 그득했다고 책은 전한다. '지상의 양식'(앙드레 지드 지음, 1991년 판본) 귀퉁이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도달하기 위해서 타자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결코 혼자서는 우리 자신일 수가 없다. 타자와의 교통 속에서만 우리는 실존이다"란 메모가, '지식인을 위한 변명'(장 폴 사르트르 지음, 1992년 판본) 구석엔 "고통이 사람을 고귀하게도 만들지만 가끔은 비열하게도 만듭니다. 여하튼 힘든 젊은 날, 생활이 삶을 세워냅니다"란 글이 적혀 있었다.

그렇다. 헌책의 낙서는 책의 불순물만은 아니다.

헌책의 낙서는 책이 세상에 출간된 후 지나온 시간을 말해주기도 한다. 낙서의 주인을 알기 어렵고 메모의 맥락도 부정확하니 낙서는 저자 표현대로 '수상'하지만, 기어코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버려지고 상처받은' 헌책에 깃든 드라마를 상상한다. 말끔한 정장을 입은 새 책의 서점에선 체감하기 어려운 '제2의 감각'이 헌책방 공기에 가득하다.

'헌책 낙서 수집광'의 두 번째 책으로 소개된 '행복한 책읽기'(김현 지음, 1992년 초판)는 지금 필자의 책장에 꽂혀 있다. 진솔한 메모가 담긴 헌책을 구매하는 건, 단지 원저자의 글만이 아니라 그 책을 거친 독자들의 시간을 구매하는 일이다. 그런 독서는 혼자가 아니어서 아름답다. 헌책방에 가보자. 시간이 거꾸로 흐를 테니.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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