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일본을 꺾은 게 아니다…스포츠는 그냥 스포츠로 봐달라” 

일본 교토= 유재순 재일 작가 2024. 8. 3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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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일본 고시엔 우승 교토국제고 르포
김태학 교감 “교육이념은 재일동포의 역사와 정체성 중시”…결승전 때 뛰었던 선수들은 모두 일본인
학생회장 “부모님은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즐겨 시청…한국 문화 좋고 한국어 교가에 거부감 없어”

(시사저널=일본 교토= 유재순 재일 작가)

8월26일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 무작정 도쿄역 출발 교토행 신칸센을 탔다. 사흘 전 23일, 100년 역사를 지닌 일명 고시엔(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약칭)에서 대망의 우승컵을 거머쥔 교토국제고등학교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교토국제고는 1947년 중학교로 시작해 1965년 교토한국중고등학교를 거쳐 2004년 일본 정부로부터 교토국제고등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이때부터 재정난과 학생 수 감소로 한국계 일본인뿐 아니라 일본인 학생을 많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국계이니만큼 본국(한국) 정부로터도 지원을 받고 있다. 한국어와 한국식 교육이 메인이지만 수업은 일본어로 하며 싱가포르 연수가 교과 과정에 있는 등 영어 교육도 중시한다.

8월26일 낮 교토국제고 운동장에서 41명의 야구부 선수가 훈련을 마치고 잠시 쉬러 들어가는 모습. 고시엔에 참가했던 주전 선수 20여 명은 휴가 중이었다. ⓒ유재순 제공

1999년 야구부를 창설, 중학생 중에 야구에 대한 열정이 있거나 재능이 보이면 타교에서 과감하게 스카우트해 데려왔다. 이런 전략이 먹혀 올해 고시엔 우승은 물론 야구부 특화로 일본 제일 야구 명문고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한편 고시엔은 47개 도도부현(都道府県)의 약 4000개 학교팀이 예선전을 치러 이긴 팀이 전국구 본선에 진출, 토너먼트로 우승을 겨룬다. 각 프로야구단 담당자들이 고시엔 본선 시합에서 눈여겨본 선수들을 스카우트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고교 야구 선수들은 고시엔 본선 진출을 프로야구 진출의 등용문으로 생각한다. 프로선수들조차 고시엔에 출전한 사실만으로 굉장한 자부심을 느낄 만큼 권위가 있다.

이 고시엔에서 소수 학생의 교토국제고 야구팀이 우승해 일본 열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문제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감동적인 승리를 이루어낸 국제고 야구팀이 결승전에서 우승한 뒤, 공영방송 NHK에서 여과 없이 한국어로 교가를 부른 것이 방송돼 한국민에게는 감동을, 일본에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외교적 대립을 하고 있는 '동해'(일본에서는 일본해라고 주장)가 교가 첫 마디부터 나왔다. 특히 국제고에 협박전화까지 걸려와 논란이 커졌다. 급기야 니시와키 다카토시 교토부 지사가 기자회견에서 "68년 만에 교토의 영광을 되찾아준 국제고에 대해 협박전화나 혐오발언을 하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므로 당장 멈추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교토 지사 "협박전화·혐오발언 용서 못해"

필자가 교토역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택시를 타기 전에 거리 인터뷰를 시도했다. 교토국제고의 뿌리가 한국계인 것과 한일 양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국제고 교가 가사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교토국제고가 간토다이이치(관동제일고교)와의 경기에서 최종 우승한 후 교가를 부를 땐 솔직히 너무 기뻐 그 가사 내용이 귀에 안 들어와 잘 몰랐어요. 근데 나중에 신문에서 교가 내용을 보고 순간적으로 이게 뭐지? 하는 생각에 솔직히 불쾌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게 전부예요. 그리고 고등학생들이잖아요. 또 우승해 관례대로 교가를 불렀던 것이고. 저는 교가 내용보다 교토국제고가 고시엔에서 우승했다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68년 만에 교토 출신 팀의 우승을 기대하며 8월23일 결승전 경기를 보기 위해 아들과 함께 한신 구장에 갔었다는 나카이 데쓰야(54)는, 교가는 교가일 뿐 스포츠에 대입시켜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어선 안 된다고 했다. 국제고로 향하는 78세의 택시운전사도, 교토를 빛내준 훌륭한 선수들이므로 교가 문제에 관계없이 축하하고 격려해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여 분 만에 도착한 교토국제고등학교는 산 언덕에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데 그 유명한 고시엔 우승 학교치고는 너무나 조용했다. 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신문이 우승 호외를 뿌릴 만큼 역사적인 쾌거를 이룬 우승이었는데도 학교 내에 그 흔한 축하 플래카드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다만 이른 시간임에도 운동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하고 있는 40여 명의 야구 선수만이 우승교의 존재를 각인시켜줄 뿐이었다. 교토국제고 야구부 선수들은 총 61명. 국제고 남학생 대부분이 야구부에 속해 있다. 오로지 야구만을 위해 국제고로 진학한 학생들이다. 그중 한국인 선수는 6~7명. 이번 고시엔에서 주전으로 뛰진 못했지만 가네모토 유지라는 한국인 선수가 한 명 있었다. 고시엔 결승전엔 일본인 학생만 출전한 셈이다.

학교 현관에 고시엔 대회 우승을 축하하는 화환들이 진열돼 있다. 맨 오른쪽이 대만 출신 야구 스타 왕정치(王貞治)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 보낸 꽃이다. ⓒ유재순 제공

야구 스타 왕정치 전 감독도 축하 화환 보내

학교에 도착해 사무국에 교장 선생님과 야구부 감독에 대한 인터뷰를 요청하자 "한국 언론은 너무 자극적으로 보도한다"는 등의 이유로 난색을 표시했다(우여곡절 끝에 감독 인터뷰는 성공했다). 역시 한국어 교가가 문제였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시엔에서 한국어 교가는 일본 문화를 무시하는 것이다" "교가를 바꿔라" "일본 문화에 대한 모욕이다" "일본에서 한국어로 교가를 부르려면 한국에 돌아가 불러라" "교토국제고를 폐교시켜라" 등 우승 이후 학교에 이 같은 항의전화가 쇄도하고 있다고 학교 측은 우려했다.

마침 협박전화를 조사하기 위해 경찰 두 명이 학교를 방문했다. 그러고 보니 왠지 모를 긴장감이 학교를 감싸고 있었다.

이를 위로라도 하듯 왕년의 대만 출신 야구 스타 왕정치(王貞治) 전 요미우리 자이언트 감독 등 프로야구단 감독들로부터 수많은 축하 화분이 답지해 현관을 밝게 해주고 있었다. 필자는 학교 당국의 허락을 받아 화분을 촬영하며 수시입학 준비로 교정을 바쁘게 오가는 고3 여학생들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학생회장인 여학생 가논(16·고3)은 "저는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교가의 한국어 가사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고 말했다. "부모님도 《태양의 후예》 등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기 때문에 한국어 교가나 내용에 대해 특별히 의식하는 것이 없다"고 했다. 다른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학교 급식으로 나오는 비빔밥, 삼겹살, 김밥, 양념치킨 등이 맛있다면서 휴대폰에 저장돼 있는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또 다른 여학생 그룹 20여 명은 댄스 부카쓰(동아리 활동)를 하기 위해 입구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이 세워져 있는 체육관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역시 고3인 사에는 한국 대학에 유학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낮 땡볕 더위에 잠시 체육관 앞 그늘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마에다 소우 선수(16·고1)에게 의견을 들었다.

"야구한 지 9년이 됐는데 제가 국제고로 진학한 것도 오직 야구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선배들의 이번 고시엔 우승에 대해 부모님도 많이 기뻐하셨어요. 지금까지는 브라운관을 통해 응원했지만 다음엔 제가 고시엔에 출전해 그라운드에서 직접 응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어요." 마에다 선수는 "프로야구 진출의 꿈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 것 같다"며 웃었다.

교토국제고 무용실에서 연습 중인 댄스반 여학생들. 이들 뒤에 태극문양이 있는 한국 전통 북틀이 있다. ⓒ유재순 제공

한국 정치인들의 과도한 반응에 '불편'

교토국제고에서 하루 종일 학생들을 만나 취재하다 보니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남학생들은 전원 프로야구 선수에 대한 꿈을, 여학생들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 즉 한국 문화가 좋아 국제고에 진학했다는 것이다.

오후가 되어 한국에 간 백승환 교장 대신 재일동포 3세인 김태학 교감을 인터뷰하는 데 성공했다. 재일동포 3세인 김 교감은 먼저 한국에서의 많은 응원과 성원, 한국 정부의 지원에 대해 감사 인사부터 전했다. 그는 8월 내내 땡볕 운동장에서 응원해서인지 얼굴이 까맣게 타 있었다. 2800여 명의 응원단을 모집해 관리하며 한 경기, 한 경기 엄청 고생했다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날이 무더워 열사병 등 안전관리에 애를 많이 먹었다는 것.

"그렇지만 우리 학교 야구부가 우승하는 그 순간, 모든 고생이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어요. 한마디로 놀람과 기쁨의 환희였지요. 솔직히 우리 학교 야구부가 결승까지 올라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오로지 한 시합, 한 시합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뿐이었지요."

한국계 국제고로서 교육이념이 무엇인지 물었다.

"우리 학교의 교육이념은 재일동포의 역사와 정체성을 중요시하는 겁니다."

우승 후 교가에 대한 항의전화나 혐오발언에 대한 학교 측의 대처 방법을 물었다. "그들의 주장대로 교가를 바꾸거나 학교 간판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제 주변에서는 좋은 말만 해줍니다. 현재 학교로 격려전화, 기부전화, 항의전화, 입학 문의 전화 등이 섞여서 쇄도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본국(한국) 언론에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번 고시엔 우승을 한국이 일본을 꺾었다는 구도로 보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온 한국계 학교 야구부가 우승해 일본 제일의 팀이 됐고 또 덩달아 우리 학교까지 유명해진 것이 팩트입니다. 또 재학생 반수 이상이 한국이 좋아 일부러 우리 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입니다. 이들이 안전하게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재일동포와 일본인 학생 비율이 70:30인데 앞으로는 재일동포 학생 증원에도 심혈을 기울일 것입니다."

교토국제고 교가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한국에서 대통령을 비롯한 각 정당 정치인들이 앞다퉈 축하성명을 발표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적지 않은 일본인이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을 이겼다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긴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이번 영광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야구 선수들이 뒷전으로 밀려나 있고 대신 한국어 교가 얘기가 큰 이슈로 부상, 한일 양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제일동포인 김태학 교감은 논란에 대해 "교가를 겨루는 전국대회가 아니다. 순전히 야구 게임을 하는 스포츠다. 스포츠는 그냥 스포츠로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다행히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도 '교가는 교가일 뿐, 제대로 된 훈련을 하기에는 너무도 열악한 운동장에서 위대한 우승을 일궈낸 국제고 선수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특히 우익 성향으로 널리 알려진 니시와키 교토 지사조차도 일본 내 극우 혐한론자들에게 순수한 스포츠에 어른들의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일부 보수언론들이 국제고 맹장 고마키 감독과 이와부치 유타 스카우트 부장 등에게 교가를 바꿔야 하는 게 아니냐며 학교 당국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어 또 다른 논란을 낳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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