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무슨 기준이냐는 거지’...日 고시엔 “남탕 야구는 그만!” [올어바웃스포츠]

류영욱 기자(ryu.youngwook@mk.co.kr) 2024. 8. 3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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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일본 ‘고시엔’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교토국제구 선수들 <연합뉴스>
“동해바다 건너서 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최근 일본에 소재한 한국계 교토국제고등학교 야구부가 일본 전국고교야구대회 ‘고시엔’의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 대결은 신흥 야구부가 사상 첫 우승을 연장 접전 끝에 차지했다는 드라마같은 스토리, 일본내 지역 라이벌인 교토와 도쿄(관동) 지역 대표팀의 첫 결승 격돌 등 수많은 내러티브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승리팀 특전으로 한국어 교가가 일본 야구장에서 울려퍼졌다는 점에서 한국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일본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 일명 ‘고시엔’은 일본 고교야구의 총본산으로 여겨집니다. 열도 3800여 학교의 야구선수들은 고시엔 구장의 흙이라도 밟아보기 위해 용광로같은 여름 한복판에서 청춘이 맺힌 땀을 흘려냅니다. 선수들은 프로야구 진출보다 고시엔 진출을 최종 목표로 삼을만큼 그 위상은 대단합니다.

이런 고시엔의 또다른 특징은 보수적인 대회 운영입니다. 공수전환이나 삼진아웃 등 경기가 중단될때는 모든 선수들이 뛰면서 라커룸에 들어가는게 당연시되는 등 유무형의 전통과 관습이 대회 전반에 녹아있습니다. 일본 특유의 폐쇄성과 보수성, 학생들이 주축이 대회라는 특성이 어우러진 결과지요.

그런데 최근엔 이런 고시엔이 변하고 있습니다. 대회의 주역으로 떠오른 Z세대는 더이상 낡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주최측도 이런 변화를 느리지만 꾸준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철옹성같은 일본의 푸른 다이아몬드에는 어떤 바람이 불고 있을까요. 고시엔의 역사와 위상과 함께 조금 알아봤습니다.

“프로선수보다 고시엔 진출이 우선”... 日고교야구 총본산
일본 고시엔경기가 열리는 ‘고시엔구장’ 모습. <출처=교도통신>
일본은 근대 이전까지 동아시아 내에서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했습니다. 자기네들끼리 열도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이 곧 천하를 제패하는 것과 진배없었고, 수많은 영주들이 각각의 지역을 지키며 왕처럼 군림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지역색이 강하고 출신지역에 대한 애향심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도 이때문입니다. 고시엔은 이런 점을 100% 이용합니다. 3800여개의 야구부중 오직 49개팀만이 일본의 47개 지방자치단체(도도부현·도쿄와 훗카이도는 2팀)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지역민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학생들을 응원하고, 학생들 역시 자부심을 갖고 그라운드에 들어섭니다.

고시엔의 위상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은 바로 프로야구팀이 ‘남의집 살림’을 강제당한다는 것입니다. 고시엔이란 이명은 일본 프로야구팀 한신타이거즈의 홈구장인 ‘고시엔(갑자원) 구장’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명처럼 49개팀이 맞붙는 본선경기는 모두 고시엔구장에서 벌어집니다. 그리고 한신 타이거즈는 대회가 열리는 동안 당연하듯 전 경기를 원정 구장에서 치릅니다. 일명 ‘죽음의 원정’이라 불리는 시기입니다.

주요 매체들은 지역예선 중요 경기부터 생중계를 진행하며, 본선의 경우 모든 편성표를 고시엔 경기로 채우기까지 합니다. 고시엔에서 주목받는 선수가 일약 열도의 스타로 떠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은 모습이지요. 심지어 1980년대 초반 최강의 콤비로 떠오른 오사카 PL학원의 KK콤비(기요하라 카즈히로-구와타 마스미)가 학생신분으로 엄청난 관심을 받자 프로선수가 질투섞인 하소연을 하는 웃지못할 일도 벌어지곤 했습니다.

이만큼 중요한 대회다 보니 선수들은 고시엔을 본인 야구인생의 마지막 무대인양 몸을 불사릅니다. 한국 고교야구에서도 심심찮게 들렸왔던 혹사 문제이지요. 메이저리그(MLB)에 제값을 받고 간 첫 일본 선수인 마쓰자카 다이스케는 1998년 2주 동안 6경기에 등판해 767개의 공을 뿌렸습니다. 다이스케가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20년 후인 2018년에도 한 투수가 6경기에서 881개의 공을 던지기도 했죠. 선수생명을 갈아가면서 뛴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여학생이 어디서 감히 그라운드에” 악습 살아숨쉬는 100년 역사의 전통, 고시엔
작년 3월 일본 선발고등학교야구대회(봄 고시엔)에서 첫 여성선수로서 연습에 참여한 나가노 유나 <출처=요미우리 신문>
12만명의 학생야구선수들이 바라는 ‘꿈의 무대’는 올해 106주년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이 역사에 걸맞은 전통과 관습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선수들이 1~18번을 제외한 등번호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경기의 시작과 끝은 항상 사이렌을 울림으로써 알려지는데 이는 1936년부터 이어져온 전통입니다. 경기에 패배한 선수들은 약속이나 한 듯 고시엔 구장의 흙을 준비한 주머니나 용기에 담아 가져갑니다. 고시엔의 경험을 잊지 않겠다는 관습이지요.

문제는 오래된 전통이 항상 합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시엔은 2022년 여름 전까지는 ‘금녀의 구역’이었습니다. 대회 개막식에서 야구부 플래카드를 들고 나오는 역할을 제외하곤 대회 내내 어떤 여학생도 그라운드를 밟지 못하게 한 것이지요.

2016년 고시엔에 진출한 오이타 고등학교의 야구부 조수인 모모나 슈토는 유니폼을 입고 팀의 타격 연습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분 후 대회 관계자가 나서 슈토에게 경기장 퇴장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학생 출입 금지’라는 규칙을 어겼다는 것이지요. 대회를 관장하는 일본고교야구연맹은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남학생들만 경기에 출전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며 “여학생들이 남학생들 사이에서 뛰다가 다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는 변명을 했습니다.

당연히 일본 내에서도 격한 반응을 불렀습니다. 시대착오적이고 성차별적인 구시대적 관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연맹에 대한 성토도 끊이질 않았지요. 결국 연맹은 이후 이 규칙을 다소 완화했습니다. 팀 연습에 참가하거나, 경기중 파울볼을 회수하는 역할은 여학생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작년 3월 열린 전국대회에서 조토 고등학교의 나가노 유나가 펑고(연습타구를 날리기 위해 공을 타격하는 사람)를 도우러 경기장에 나서자 관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하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머리길이와 타율의 상관관계는?’ 반삭규정 日고교 5년만에 3025→1000개교로
지난해 고시엔을 제패한 게이오시니어고 선수들의 자유분방한 헤어스타일 <출처=요미우리신문>
이처럼 고시엔은 이해하기 힘든 관습과 전통을 지키는 것을 중요시해왔습니다. 그러나 고시엔도, 나아가 일본의 학교현장에서도 불합리한 악습과 맹목적인 전통은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인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헤어스타일입니다. 지난해 일본고교야구연맹은 5년마다 실시하는 조사결과를 내놨습니다. 일본 야구계에서 화제가 된 결과중 하나가 소위 ‘반삭’을 규정으로 삼은 학교들이 급격히 줄었다는 것입니다. 3788개 학교중 ‘반삭’을 하도록 규칙을 정한 학교는 1000개였는데, 이는 5년전 조사보다 2000개 이상 감소한 수치입니다. 532개 학교는 크루컷(스포츠머리)는 허용했고, 두발 규정이 없는 학교가 59.3%(2246개)나 됐습니다.

단정함을 넘어 군인과 같은 머리스타일을 함으로써 야구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구시대적 ‘미신’이 일본에서도 더이상 자리잡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실제로 지난해 여름 고시엔을 제패한 게이오시니어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자유로운 헤어스타일을 지니고 있었지요. 같은 대회 준결승팀, 8강 진출팀 등도 ‘반삭’ 헤어스타일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나고야대학의 우치다 료 교수는 이에 대해 “너무 늦었지만 드디어 문명이 시작된 것 같다”고 마이니치신문에 말하기도 했습니다.

2020년 고시엔부터는 선수들에게 흰색 스파이크화를 신을 수 있도록 허용됐습니다. 맞습니다. 직전까지는 대회에 나오는 모든 선수들이 검정색 스파이크화만 신도록 하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규칙이 있었는지 주최측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고 합니다. 야구가 미국에서 전해질 때 스파이크화가 검은색이었다거나, 당시 염색 기술로는 검은색 스파이크화만 만들 수 있었다는 등 이해하기 힘든 기원만 규칙을 지지하고 있었지요. 이가운데 몇년간 일본의 찌는듯한 무더위가 계속되며 선수들이 탈수증과 다리 경련을 겪는 등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고시엔에 참가한 한 코치는 “지역 예선에선 검은색 스파이크화로 열사병에 걸린 학생도 있었다”고 말할 지경이었습니다.

이에 주최 측이 ‘결단’을 한 것이지요. 스포츠장비 업체 미즈노에 따르면 흰색 스파이크화는 검은색에 비해 신발 내외부 모두 바깥쪽보다 유의미하게 온도가 낮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밖에 고질적인 ‘혹사 문제’를 다루려는 노력도 점차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 고교야구연맹은 공식 경기를 7이닝으로 줄이는 단축 경기 도입을 검토하기 위해 실무 그룹을 설립했습니다. 야구 동호인의 감소, 여름철 고온현상의 심화, 투수의 어깨와 팔꿈치 부상 예방 등을 위해 일본 역시 ‘글로벌 표준’ 도입을 검토하는게 맞다는 판단이지요. 실제로 18세 이하 해외 대회에서는 7이닝제가 주된 양상이라고 합니다. 아사히 신문은 “고교 스포츠 활동의 목적은 신체적, 정신적 훈련을 통해 성인이 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라며 “스포츠를 둘러싼 환경이 변화하면서 시스템을 개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변화중인 日vs‘구습’ 여전 韓...“안세영이 쏘아올린 공이 변화 부르길”:
2024 파리 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딴 안세영 선수 귀국 장면. <한주형 기자>
아집 가득한 불통단체로 묘사했지만 일본 고교야구연맹도 느리지만 천천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선수 혹사를 방지하기 위해 경기중 경기를 잠시 멈추는 ‘쿨링 타임’, 투수의 주당 투구수 500개 제한, 대회중 휴식일 설정 등 전통을 포기하고 합리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선수들이 혹사에 지쳐 그라운드에서 쓰러지는 것은 더이상 낭만이 아닌 야만이니까요.

최근 여자 배드민턴 국가대표 안세영 선수가 화제입니다. 2024 파리올림픽에서 태극기를 스타디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렸던 순간 이후에도 안 선수가 밝히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국민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협회의 요구에 부상을 안고도 뛰었다는 것도 안타깝지만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든 것중 하나는 대표팀 내부의 악습이었습니다. 선배들의 끊어진 라켓줄을 갈고 선배 방청소와 빨래를 도맡는 등 한 나라의 국가대표에게 지우기에는 너무 부당한 ‘전통’이었습니다. “외출 한번 하려면 19명에게 일일이 보고하는게 귀찮아 방콕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안 선수의 폭로는 한국의 엘리트 체육이 아직도 갈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었습니다.

안 선수의 문제제기에 대해선 문화체육관광부가 전면에 나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라 불합리한 제도와 규칙은 없어지고 선수와 단체가 대등하고 건강한 관계로 거듭나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제도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스포츠계에 투신한 이들의 사고방식이 시대에 걸맞게 바뀌어야할 것입니다. 안 선수는 부당한 규칙과 구태보다 “오래된 관습이라 당장 해결은 어렵다”는 코치진의 답변이 더욱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참고문헌과 외신> ◎https://japannews.yomiuri.co.jp/sports/baseball/20230323-99121/ ◎https://soranews24.com/2016/08/04/female-high-school-students-continue-to-be-banned-on-baseball-field-at-koshien-stadium-in-japan/ ◎https://mainichi.jp/english/articles/20230620/p2a/00m/0na/020000c ◎https://mainichi.jp/english/articles/20230824/p2a/00m/0op/014000c ◎https://mainichi.jp/english/articles/20200813/p2a/00m/0na/015000c ◎https://www.asahi.com/ajw/articles/15376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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