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핏줄로 칭칭 감긴 K-가족의 비밀과 거짓말, ‘장손’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85번째 레터는 9월11일 개봉하는 영화 ‘장손(長孫)’입니다. 오늘(29일) 언론 시사회를 했는데요, 오,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이것은 관찰예능인가, 다큐인가, 브이로그인가! 3대 대가족, 등장인물 10명이 나오는데 허투로 던지는 대사가 한마디도 없어요. 이처럼 생생하게 할퀴고 껴안고 원망하면서 갈구하는 관계라니.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칭칭 감겨 끈적끈적, 외면할 수 없는 갈망의 웅덩이, 그것이 K-가족 아닐까요. 대구 출신 오정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데요, 5년간 공들였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더군요. 하다못해 등장인물이 지나가다 뀌는 방귀도 배경과 타이밍을 치밀하게 고민해 배치한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우선, 이 영화 시사를 꼭 챙겨봐야겠다고 저를 결심하게 만든 포스터부터 아래에서 보시겠습니다.
아니, 저것은 무엇? 혹시 백설기? 첨에 ‘장손’ 포스터를 보고 떡인줄 알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두부. 우하하하 엄청 웃었네요. 저 위풍당당함이라니. 아래 기왓집은 장손이라는 지엄하신 두 글자와 또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장손, 장녀, 장남. ‘장’(長)자가 단어에 들어가는 순간 얹혀지는 압박감은 장손, 장녀, 장남이라면 잘 아실 거에요. 굳이 원한 것도 아닌데 세상에 나와보니 이고 질 짊이 저 앞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고 있죠. 영화 ‘장손’은 그 짐이 두부로 보여집니다. 우리의 주인공 장손은 두부공장을 물려받아야할 김씨네 귀동이 외아들이거든요.
영화가 시작하면 뿌연 김이 서서히 걷히면서 일꾼들이 분주합니다. 층층이 쌓인 노란 상자. 네, 두부공장입니다. “내려주이소~” “퍼뜩 마무리하고 온나~” 이런 경상도 네이티브들의 대화가 오가는 중에 위생모를 쓰고 공장을 나선 어느 여성이 두부 한 판을 들고 인근 기왓집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서 문패 주목해주세요. 김자 승자 필자. 두부공장 소유주이신 김씨 가문의 제일 가는 어르신 김승필 할배댁 되시겠습니다. 이어 들리는 할머니의 지청구. “세상에 기름이 이게 뭐꼬! 냅둬라, 가시나야!” 오말녀 할머니(손숙)가 제사에 올릴 부침개를 뒤집던 손녀를 탓합니다. 계절은 여름. 삼복 더위에(이 영화는 여름에서 시작해서 겨울에서 끝나는데요, 여름, 가을, 겨울, 세 계절을 지나며 시간과 세월과 가족사를 엮어 보여주는 데에 많은 공력을 들였습니다) 손녀는 너무 더워 에어컨 좀 켜자고 투정입니다. “이 집에 에어컨은 인테리어가!” 분홍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는 꿈쩍도 않습니다. 선풍기를 좀 더 세게 틀어주고 말죠.
얼마 지나, 전기료가 아까워 에어컨은 세워만 두는 할머니의 맘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등장합니다. “오말녀씨~~” 할머니 이름 석자를 방자하게도 명랑하게 부르며 등장하는 사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어화둥둥 금이야 옥이야 키운, 김씨 집안의 장손 김성진(강승호)입니다. “아이구, 성진이 왔나~ 어여 드가자~” 할머니 얼굴에 형광등이 켜집니다. 좋아죽습니다. 서울에서 배우하는 장손이 이날 제사 지낸다고 내려온 거죠. 할머니 선물이라고 분홍 마이크를 내밉니다. 마이크를 집어든 할머니 신나서 바로 하는 말. “어여 에어컨 틀어라~” 그렇습니다. 손녀가 아무리 덥다해도 안 틀어주던 그놈의 에어컨, 장손이 오니 바로 틉니다. 장손은 더우면 안 되거든요. 너무 소중하거든요.
영화 도입부를 간략히 소개해드렸는데요, 어떠세요. 분위기 짐작가시죠. 시사회 때 할머니의 “에어컨 틀어라” 대사에 객석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너무 와닿지 않습니까. 절대 과장이 아니죠. 어디선가 몇 번이나 본 듯하네요. ‘장손’은 이처럼 유머가 살아있다는 점이 참 반가워요. 자칫하면 무거워질 공기가 유머 덕분에 호흡 편하게 전달되는데, 이게 사실 쉽지 않거든요. 최근 한국영화에서 이 정도 완급 조절이 되는 작품을 본 게 언제였던가, 매우 드물지 않나 싶습니다.
‘장손’에서 가업으로 두부공장을 운영하는 김승필 오말녀 부부에겐 큰딸과 사위, 아들과 며느리(둘 사이 아들이 장손 성진이), 막내딸과 사위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영화에 다 나와요. 여기에 장손과 손녀, 손녀사위,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손녀가 낳는 갓난쟁이 증손자까지. 엄밀히 말하면 4대가 다 나옵니다. 10명 넘게 등장하는데 인물 하나하나가 바로 옆에서 숨쉬며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해요. 신기하게도. 그래서 이야기의 고개를 쉽게 따라가게 됩니다. 시나리오가 아주 탄탄해야 가능한 밀도죠.
일제 시대를 겪었던 김승필 할아버지는 쪽바리가 싫습니다. 또 싫어하는 게 있는데 빨갱이입니다. 왜냐. 귀한 아들, 공부 잘해 법대 들어간 아들이 데모하다 다리를 절어 낙향하게 된 게 다 빨갱이 탓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아들(오만석)은 아버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술도 마시고 노름도 하고, 주사도 좀 있습니다. 승필 할배의 큰딸, 그러니까 장손 입장에서 보면 큰고모는 예수쟁인데요, 알고보면 기도에 매달리는 사연이 있고요. 막내딸은 벤츠 모는 남편하고 잘 사는 거 같은데, 곧 남편 따라 베트남으로 간다고 하고요. 이 많은 가족 열댓명이 제삿날 한자리에 모이는데 장손이 폭탄선언을 합니다. “저 두부공장 안 할 거에요. 하고 싶은 사람이 하면 되죠.” 아, 승필 할배, 뒷목 잡고 넘어가시나요. 이 가족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영화 ‘장손’은 세대와 성별의 차이, 모든 관계의 각도가 빚어내는 미세한 표정과 균열, 벌어진 틈을 비집고 나온 감정의 찌꺼기를 돋보기로 확대해 비춰보이듯 철저하고 세밀하게 보여줍니다. “보증금 어쨌냐”며 아들을 효자손으로 때리는 엄마, 그 엄마를 막아서는 아들, 무릎베개를 하고 누운 남편의 귀지를 파주는 아내, 아내의 어깨 파스를 붙여주는 남편, 술 마시고 대자로 뻗은 아들이 미우면서도 무심한 척 슬그머니 선풍기 바람을 돌려세워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방금 전 대구 달성군의 한 집안에서 촬영해온 브이로그 같이 보일 정도에요. 배우들의 연기 구멍이 전혀 없는 덕이기도 합니다. 다들 어쩜 그렇게 대구 달성군 현지 주민들처럼 보이시는지.
가족 사이 갈등을 드러내는 요인이 불거지는데, 인간사 어디에나 있는 돈입니다. 등장 인물 중 누군가가 죽거든요. 죽음은 돈 문제를 부르고, 돈은 바닥을 보여주죠. 인성의 바닥, 관계의 바닥. 가족간 돈 문제는 갈등의 불을 붙이는 법. 그런데 영화에서 실제로 누군가 불을 지릅니다. 가족의 역사를 품고 있는 집이 불에 타게 되는데요. 누가 지른 불일까요. 해답은 바로 제시됩니다. 아마도 감독님이 관계의 단절과 재생을 방화라는 행위로 보여주려 한 것 같습니다.
영화에선 검정 비닐봉다리(이럴 땐 봉지라고 하면 느낌이 안 살고 꼭 봉다리라고 해야합니다. 대야 아니고 다라이라고 해야 느낌이 살 때처럼)가 중요한 소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검정 봉다리는 갈등의 해답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비밀을 품고 있습니다. 핏줄을 타고 내려온 끈끈한 비밀. 장손의 손에 쥐어진 그 봉다리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 꼭 영화를 보시고 확인하세요.
‘장손’은 여름에서 시작해 겨울에서 끝납니다. 제사 지내고 상 치르며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이 담담해서 더 아름답게 화면에 담겼어요. 촬영지가 경남 합천인데요, 이 정도면 여행 영화 배경으로 써도 되겠다 싶었어요. 엔딩 장면은 롱테이크로 7분 정도나 되는데, 제가 화면 안으로 들어가 지켜보듯 숨죽이며 바라봤습니다. 감독님이 처음부터 구상한 장면이라고 하는데, 전 참 좋았습니다. 왜 그래야했는지 알 거 같았거든요. 왜 그 인물이 거기서 그렇게 발길을 돌려야했는지.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인 거 같기도 했고요. 가족을 보는, 시간과 역사를 보는 감독님의 시각에 공감하는 관객이 많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영화는 겨울에서 끝나지만, 사실은 봄으로 이어진다고 저는 생각해요. 왜냐. 막 세상에 태어난 증손자 이름이 ‘늘봄’이거든요. 봄. 언제나 봄. 가족은, 시간은, 그렇게 이어지는 거, 그런 거 아닐까요.
‘장손’ 개봉이 추석 즈음이라, 가족들끼리 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강추하고 싶은 작품이라 시사회 보고 바로 레터 보내드려봅니다. 그럼 다음 레터에서 뵐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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