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페이크 지웠으니 감형"…디지털 장의사에 몰리는 가해자들
관련 판례엔 '삭제'가 감형 판단 사유
“딥페이크 성범죄물 소지 시 처벌 조항 강화돼야”
[이데일리 황병서 김세연 기자] ‘딥페이크(불법 합성물) 성범죄’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뒤 ‘디지털 장의사’가 때 아닌 관심을 받고 있다. 디지털 장의사는 인터넷상에서 각종 기록을 지워주는 업체를 뜻하는데, 가해자들이 디지털 장의사를 앞다퉈 찾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딥페이크 범죄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시사하자 증거를 없애거나 재판에 가더라도 감형을 받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실제 판례를 보면 자진 삭제를 감형의 사유로 판단한 경우가 상당수였다.
30일 이데일리의 취재를 종합하면, 딥페이크를 활용한 성범죄 영상물을 삭제해주는 업체들에는 최근 가해자들의 삭제 요청이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1호 디지털 장의사를 자처하는 산타크루즈컴퍼니는 유료로 영상 삭제를 하고 있는데, 딥페이크 성범죄가 주목받은 지난 일주일 동안만 삭제 요청 30건이 접수됐고, 이 중 20건(66%)이 가해자 요청이었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관련 업체도 이번 주 삭제 요청 의뢰가 15건 들어왔는데, 모두 가해자들이 요청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딥페이크 사건과 관련해서 무료로 영상 삭제를 돕겠다고 밝힌 디지털장의사 업체 사라짐컴퍼니는 이달 30일 기준 삭제 요청으로 의뢰가 들어온 경우는 총 248건으로 가해자 의뢰가 36건이라고 밝혔다. 무료로 영상물 삭제를 돕겠다고 발표하기 전까지는 전부 가해자가 의뢰한 것 뿐이었다는 게 업체의 설명이다.
가해자가 오히려 디지털 장의사를 찾는 기현상에 대해 업체 측에선 증거 인멸이라는 상식적인 이유 외에도 재판에 가더라도 유리한 형을 참작받기 위한 ‘꼼수 전략’으로 보인다고 했다. 최태운 사라짐컴퍼니 대표는 “가해자 입장에서 디지털장의사를 통해서 피해자의 영상을 지웠다고 하면, 법원에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고 해서 감형의 요소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클 것”이라면서 “이 점을 노려 감형 요인을 찾고 피해자를 우롱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딥페이크 판례보니…삭제요청이 법망 피하는 ‘꼼수’로
실제 이데일리가 딥페이크 성범죄와 관련한 판결문을 최근 분석해본 결과, 관련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 중에 영상물을 자진 삭제하거나 피해자에게 삭제하도록 금전을 지원했을 경우 감형을 받은 사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6월 의정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재판부는 텔레그램방을 통해 18세 여성의 얼굴 등을 딥페이크 성범죄로 활용한 피의자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범행 발각 이전에 텔레그램 채널방을 자진해서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며 유리한 양형 요소로 설명했다. 지난 5월에도 의정부지방법원에서 피고인이 전 여자친구의 사진을 활용해 딥페이크 성범죄로 활용해 배포해 징역 3년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이때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사진과 영상이 삭제될 수 있도록 온라인 모니터링 및 삭제지원금으로 3000만원을 지급했는데 이러한 부분을 유리한 정상 참작으로 봤다.
이 외에도 딥페이크 성범죄를 저질러 기소된 피의자들은 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부분이 유리한 정상 참작으로 인정받았다. 대전지법은 지난 1월 피의자가 자신의 사촌의 사진을 활용해 딥페이크 성범죄를 저지른 것과 관련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자신의 행동에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
법조계에선 앞으로 자신의 처벌을 피할 목적이 다분한 가해자들의 행동 양식이라고 분석했다. 법무법인 숭인의 김영미 변호사는 “영상을 완전 삭제하게 되면 어디에 어떻게 유포됐는지에 대해서 (죄를) 입증하기가 어려워지는 부분이 있다”면서도 “다만 완전히 삭제되지 않았을 때도 스스로 자정 노력을 했다는 부분에서 양형 참작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범죄의 무분별한 확산을 막기 위해 관련 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법무법인 새록의 채우리 변호사는 “딥페이크 성범죄물에 관해서는 반포 목적 없어도 제작, 의뢰, 구입, 소지에 대해 처벌할 수 있는 법 조항이 필요하다”며 “불법영상물이 유통되는 장소를 제공해준 플랫폼 사업자에 대해서도 적어도 수사 협조를 요청했을 때 협조에 응하지 않으면 사업적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는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 불법 영상물 확산을 막기 위해 최대한 빨리 유포물을 삭제해야 하며, 불법 유포된 딥페이크물 삭제 과정에서 유포됐다는 증거를 남겨야 한다고 조언한다. 법무법인 숭인 김영미 변호사는 “유포된 영상물이 삭제되면 (수사 단계에서 죄를) 입증하기 어려워지는 부분이 있다”며 “방치할수록 더 많이 퍼지니까 가능한 빨리 삭제하는 게 중요하다. 다만, 일반 업체에 삭제를 요청할 때도 그냥 삭제하지 않고 증거를 캡처해 놓고 삭제를 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병서 (bshwang@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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