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 칼에 9번 찔려도, 살인마 끌어안고 놓지 않은 형사…숭고한 희생이 남긴 것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9일 방송된 '인질범의 흉터'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류승수, 뮤지컬 배우 배다해, 그룹 위너 멤버 이승훈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대낮의 침입자
때는 2004년 8월 8일, 서울의 한 빌라야. 출근한 딸을 대신해 집에서 할머니 혼자 어린 손자를 돌보고 있었어. 한 2시쯤 됐나? 안방에 손자를 재운 뒤 화장실에서 볼일을 마치고 막 나오는데, 헉! 할머니는 순간 까무러칠 뻔했어. 화장실 문 앞에 웬 남자가 우두커니 서서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어.
할머니가 "너 누구야! 사람 살려!"라고 외치는데, 남자가 할머니의 목에 쓰윽 뭔가를 들이대. 칼이었어. 그것도 아주 길고 날카로운 회칼. 할머니는 지금도 그날의 공포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해.
"내가 화장실에 있다가 문을 열고 딱 나왔는데, 화장실 문 앞에 칼을 들고 딱 서 있더라고. 신발을 신고 선글라스를 끼고. 얼마나 놀랐는지, 베란다 가서 막 사람 살리라고. 그때는 너무 나도 당황하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사람 살려'라고 외쳤는데. 사람들이… 여름이니까 지나가지도 않았고. 나를 붙잡아서 칼을 목에 대면서 '소리 지르면 죽인다'고 그러더라고. 그 서 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아주…"
-집에서 괴한을 마주한 할머니
얼마나 무서웠을지 상상이 돼? 그런데, 이어지는 남자의 말이 더 소름이야. 남자가 선글라스를 쓱 아래로 내리더니 이렇게 말해
"할머니... 나 누군지 알지?"
그 순간, 할머니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얼어붙었어. 사실 얼마 전에 할머니는 이 남자를 본 적이 있어. 바로 여기에서.
수배 전단지에서 본 바로 그 얼굴. 역대급 현상금이 걸린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할머니의 집에 침입했고, 할머니는 인질이 된 거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지금부터 이 충격적인 인질극의 전말을 들려줄게.
▲ 로맨티스트 형사
먼저 시간을 8일 전으로 돌려 2004년 8월 1일, 일요일 새벽 6시. 요란한 알람소리에 한 남자가 잠에서 깨. 남자의 이름은 심재호, 나이는 서른둘이야. 일요일이지만 재호 씨는 오늘 출근을 해야 해. 출근 준비를 다 마친 재호 씨가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아이들 방으로 향했어.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 우연이와 첫돌을 3개월 앞둔 딸 유리가 자고 있었거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재호 씨의 소중한 아이들이야. 나란히 잠든 모습이 어찌나 천사 같은지 출근도 잊은 채 아이들을 봤어. 그때, 아이들 곁에서 같이 자고 있던 아내 옥주 씨가 잠에서 깼어.
"어? 우연 아빠, 나가게?"
재호 씨는 아내에게 더 자라며, 뽀뽀를 쪽! 해줬어. 아직도 신혼 같은 사이좋은 부부야. 연애 4년, 결혼 4년, 그렇게 8년을 함께 했는데도 재호 씨는 아내가 여전히 예쁘대. 완전 사랑꾼이지. 어느 정도인지, 아내 옥주 씨에게 직접 들어볼게.
"저한테 용돈을 항상 받았거든요. 그때 당시에. 그거를 따로 자기는 모았대요. 그래서 봉투에 모아서 제 생일 때 되면 꼭 현금을 봉투에 담아 가지고 몰래 그걸 줬어요. 매일 출근할 때 항상 인사가 '나 갔다 올게' 꼭 그러고. 현관 앞에서 한 번 안아주고. 그리고 제가 그냥 편하게 얘기할 때는 말을 놔요. 그런데 바깥에서 저한테 전화를 할 때는 항상 높여요. '저 이제 들어가요' 이렇게. '내가 당신을 존중해야 주변 사람들도 당신을 존중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고요."
-황옥주, 심재호 씨 아내
이 로맨티스트 재호 씨, 직업은 경찰이었어.
얼마 전까지 청와대에서 경호를 담당하던 심 형사는 열심히 진급 공부를 한 끝에 2004년 3월, 마침내 꿈에 그리던 강력반 형사가 돼. 근무지는 서울서부경찰서 강력2팀. 동료 눈에 비친 심 형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체육대회나 족구나 배드민턴 하면 항상 그 자리에 재호 형이 끼어 있었습니다. 족구도 잘하고 배드민턴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같이 대화하고 얘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빠져들 수밖에 없게끔 말도 잘하고. 강력한 카리스마, 또 어떨 때는 부드러운 얼굴로 조언도 많이 해주고. 저희의 롤모델,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의 멘토의 역할을 했죠."
-황운영 경위, 심재호 형사 후배
그런데, 그런 말 있지? 불행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찾아온다고. 8월 1일 일요일, 평소처럼 남편이 서에 출근한 바로 그날이야. 옥주 씨가 부엌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데, 아들 우연이가 아빠 언제 오냐며,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아빠를 찾아. 그러고 보니 벌써 밤 8시야. 늦으면 늦는다 전화라도 할 텐데 오늘따라 연락도 없는 게 좀 이상해. 결국 옥주 씨가 먼저 전화를 걸었어. 전화를 받은 남편은 무슨 일인지 전화를 그냥 다급하게 끊었어.
"'다시 할게'도 아니고, 그냥 일방적으로 '나 지금 바쁘니까 끊어' 그러고 전화가 끊긴 거예요. 그러고는 영 전화가 안 오더라고요."
-황옥주, 심재호 형사 아내
갑자기 출동 나갔을 수도 있으니, 옥주 씨는 일단 기다려 보기로 해. 얼마나 지났을까? 친정아버지한테 전화가 왔어. '이 밤에 무슨 일이지?' 궁금해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아버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빨리 TV를 켜봐!"라고 말씀하셔.
"'너 지금 TV 좀 틀어보라'고.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TV를 틀었죠. 그랬더니 막 속보가 뜨는 거예요. 밑에 자막이 깔리면서 '서부경찰서 심 모 경사'가 이렇게 막 뜨더라고요."
-황옥주, 심재호 형사 아내
옥주 씨는 속보의 자막을 채 끝까지 읽기도 전에 실신하고 말았어. 대체 그날 밤 남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 마지막 출동
사건 당일 오후 7시, 경찰서로 한 통의 제보전화가 걸려와. 퇴근 준비를 마친 심 형사가 막 서를 나서려는데, 갑자기 팀장이 이런 말을 해.
"그 얼마 전에 남자친구한테 감금 폭행 당했다는 피해자 있었지? 방금 연락이 왔는데, 오늘 밤에 그놈을 만나기로 했다네?"
이틀 전에 한 여성이 112로 신고를 해온 일이 있었어. 남자친구한테 이별을 통보했더니 자신을 모텔에 가둬두고 폭행까지 했다는 거야. 겨우 도망을 나온 피해 여성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고, 사건은 서부경찰서 강력1팀에 배정됐어. 용의자의 정체는 서른다섯의 '이 씨'야.
사실 이 씨는 6년 전에 이미 혼인신고를 마친 유부남이야. 하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어.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가야 했거든. 죄명은 강간치상죄. 결국 이 씨의 아내는 떠났고, 출소 이후 새 여자친구를 만났어. 근데 이번엔 애인을 감금 폭행한 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었던 거야.
이 씨는 자신의 연락을 피하는 여자친구에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만나줄 것을 요구했어. 그럼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피해 여성은 고민 끝에 이 씨를 만나기로 했고, 곧바로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어. 이 씨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면 그를 꼭 체포해 달라고.
그런데, 하필이면 사건을 담당하고 있던 강력1팀이 다른 사건으로 전부 잠복에 나가 있는 거야. 현장에 투입할 인력이 없어 팀장이 고민하고 있던 그때, 강력2팀 소속의 심 형사가 자신이 가서 잡아오겠다고 나섰어. 담당 사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 발로 오겠다는 범인을 놓칠 순 없잖아. 그리고 심 형사 외에 강력2팀에서 또 한 명의 형사가 출동을 자처하고 나섰어. 바로 이분이야.
이름은 이재현. 키 187cm에 다부진 체격의 이 순경은 서부서 강력반에 온 지 세 달밖에 안 된 신입 순경이야. 이 순경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들어볼게.
"우리 재현이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좋아했고 엄마도 너무너무 챙기고. 동네 사람 보면 '인사 잘한다고 소문났다' 우리 재현이가. 인사 잘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하고. 자기 누나는 여자라도 그런 자상한 게 좀 별로인데, 얘는 덩치도 크고 남자다우면서도 좀 자상해. 자기 아빠하고 나하고 싸워서 딴 방에 거처하잖아. 그러면 엄마 아빠가 따로 자면 안된다고 하면서 와서 날 번뜩 안아서 자기 아빠 자는데 갖다 눕힌다니까. 그 정도로 자상했다니까."
-유진숙, 이재현 순경 어머니
효자 이 순경과 사랑꾼 심 형사. 그렇게 두 사람은 잠복 중인 동료 형사들을 대신해 용의자 이 씨 검거 작전에 긴급 투입돼.
범인과의 약속 시간은 밤 9시. 장소는 서울 마포의 지하 커피숍이야. 두 형사의 계획은, 커피숍 밖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범인 이 씨가 나타나는 순간, 뒤따라가 조용히 수갑을 채우는 거야. 일단 피해 여성이 경찰에 신고했다는 사실을 눈치채면 안 되잖아. 게다가 체포 장소가 커피숍이야. 괜히 소란을 피웠다가는 피해자는 물론 손님들도 다칠 수 있어. 그래서 최대한 조용히 검거를 하기로 한거야.
두 형사는 용의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커피숍 입구를 예의주시 했어. 드디어 약속한 9시야. 그때, 두 형사가 몸을 숙여. 드디어 용의자 이 씨가 나타났어. 이 씨는 한참을 두리번대더니 곧이어 지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해. 심 형사와 이 순경도 그를 따라 조용히 커피숍으로 들어갔어.
일요일 밤 커피숍은 예상대로 만석이야. 심 형사가 빠르게 안을 훑어본 뒤에, 용의자 이 씨에게 다가갔어. 그리고는 신분증을 내밀며 미란다 원칙을 고지해.
"서부경찰서 강력 2팀 심재호 형사입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바로 그때였어. 이 씨가 갑자기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더니 심 형사의 왼쪽 가슴에 그대로 내리꽂아. 이 씨의 손에 들린 건 칼이야. 손쓸 틈도 없이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어.
곧바로 뒤에 있던 이 순경이 이 씨를 덮쳤어. 우당탕탕. 둘은 격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해. 커피숍 여기저기 비명이 난무하고 아수라장이 됐어. 이 순경은 이 씨의 손에서 칼을 뺏으려 안간힘을 쓰는데, 갑자기 이 순경의 몸이 순식간에 피로 뒤덮여. 하지만 이 순경은 칼을 맞으면서도 용의자의 허리춤을 놓지 않았어. 그리곤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리쳐. "누가 제발 이 사람 좀 같이 좀 잡아 주세요!"라고.
"형사 한 사람이 좀 잡아달라고 그랬어요. 순간적으로 그 상황에서도 이걸 잡아야 되나 안 잡아야 되나 이런 생각을 잠시나마 하면서, 한 2미터 안에 그냥 멍하니 서 있었어요. 아마 넋이 빠졌나봐."
-커피숍 목격자
다들 겁에 질려 지켜만 볼 뿐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어. 결국 필사적으로 범인을 붙들고 있던 이 순경의 손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어. 얼마 뒤, 심 형사와 가까웠던 후배 황운영 형사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아.
"외근 나와 있는데 전화가 오더라고요. 재호 형 동기한테. '재호가 다쳐서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있다' 그래서 병원에 가보니까. 응급실 침상이 있는 곳이 아닌 복도 쪽으로 데리고 가더라고요. 첫 번째 있는 흰 천을 걷으면서 '이분이에요?' 물어보더라고요. 그때는 제가 누군지 몰랐어요. 그래서 '아닌데요' 그랬더니, 지나서 바로 그 옆에 있는 침대 흰 천을 이렇게 딱 걷으니까, 재호 형이더라고요. 아무 표정 없이 창백하게 그냥 얼굴이 있고 그냥 누워 있는 거죠. 잠자는 것처럼."
-황운영 경위, 심재호 형사 후배
급소인 왼쪽 가슴을 두 차례 찔린 심 형사, 등을 무려 아홉 차례나 찔린 이 순경은 결국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구급차 안에서 숨을 거뒀어. 아침에 출근한 남편, 그리고 아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어. 가족들 심정이 어땠을까?
이 비보를 전해 들은 동료 형사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동료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형사들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떠난 동료들의 마지막 가는 길만큼은 외롭지 않게 지켜주고 싶었지만, 장례식장조차 갈 수가 없었어. 왜? 범인 이 씨가 아직 잡히지 않았으니까.
단순 폭력 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던 이 씨는 이제 두 형사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도주한 살인 용의자가 됐어. 이제 그 이 씨의 얼굴을 보여줄게.
누군지 알아보겠어? 할머니 집에 침입했던 그 남자. 수배전단지에서 봤던 그 살인용의자. 그가 바로 두 형사를 살해한 이 씨였던 거야.
자, 지금부터 살인용의자 이 씨가 어떻게 공포의 인질극을 벌이게 된 건지, 범행 직후의 행적부터 따라가 볼게.
▲ 미치도록 잡고 싶다
먼저 사건이 일어난 곳은 마포의 한 커피숍. 그 때 시각이 밤 9시. 이 씨는 3분 뒤에 커피숍에서 도망쳤어. 그 난투극과 경관 살인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불과 3분이었어. 그리곤 정신없이 어딘가로 뛰기 시작해.
"그 사람도 피투성이 돼서 택시 타는 것까지… 멀리서 봐서 그건 자세히 못 봤어요."
-목격자
이 씨가 택시에 타는 게 목격됐어. 사실, 당시 이씨 의 직업은 택시운전기사였어. 이 씨는 범행 현장에 몰고 온 택시를 커피숍 맞은편에 세워뒀어. 이후 자신의 택시에 올라탄 이 씨는 빠르게 현장을 빠져나갔어.
곧바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따라붙었어. 순찰차의 등장에 마음이 급해진 걸까? 이 씨가 한껏 속도를 올려서 이 도심 속에서 시속 100킬로미터로 도망치다가, 끼이이익- 갑자기 차를 멈춰 세워. 차가 멈춘 곳은 서울에서 가장 복잡한 도로 중 하나인 신촌 로터리야.
그런데 로터리 한복판에서 이 씨가 갑자기 역주행을 하더니 반대편 좁은 골목길로 사정없이 내달리는 거야. 택시기사인 이 씨는 서울 지리에 빠삭했어. 결국 이 씨는 경찰을 따돌리고 유유히 현장을 벗어났어.
하지만 아직 이 씨를 잡을 단서는 있어. 택시 안에 이 씨의 발목을 잡을 뭔가가 있었거든. 바로, 택시 GPS.
지금은 택시 카드단말기에 위치 추적 기능이 포함되어 있지만, 2004년 당시만 해도 운전석 쪽에 이런 위치추적기가 달려 있었대. 경찰은 곧바로 택시의 위치를 추적했어. 그리고, 신호가 잡혔어. 동대문구 용답동의 주택가 골목에서.
그런데 현장으로 향하던 형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갑자기 신호가 끊겼어. 이 씨가 위치추적기를 빼버린 거야. 택시는 결국 다음 날 아침, 영등포구에서 발견이 돼. 물론 이 씨는 없었어. 택시를 버리고 도주를 한 거야. 빈 택시에는 피 묻은 바지만 남겨져 있었어.
어느덧 도주 3일째. 경찰은 '공개수사' 카드를 꺼내 들어.
"경찰은 조금 전 용의자 이**을 전국에 공개 수배했습니다. 용의자 이**은 키 170cm, 몸무게 60kg의 왜소한 몸집에 왼쪽 목 부분에 화상 흉터가 있다고 경찰은 밝혔습니다. 경찰은 이 씨의 사진을 확보해 공개 수배 전단지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곧바로 이씨의 얼굴이 담긴 3만 여장의 수배전단지가 전국에 뿌려졌어. 효과는 바로 나타났어. 서울은 물론이고 부산 목포 충주 강릉 할 것 없이 전국에서 제보 전화가 빗발쳐. 하루에 무려 70여 통씩 제보가 쏟아졌어. 그런데 그 제보 중에 결정적인 건 없었어.
계속되는 허탕에도 형사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어. 오히려 독이 더 바짝 오르더래. 서부서는 물론 전 지역 경찰들이 퇴근도 반납하고 밤샘 수사에 매달렸어.
"빨리 잡아야 결론이 나고 이제 재호 형한테도 '아 그래도 잡혔구나'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데. 도주가 길어지니까 참 착잡했죠. '빨리 잡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황운영 경위, 故 심재호 형사 후배
사건 발생 3일째인 8월 3일 오후 5시.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 하나가 들려와.
"경찰관 피살 사건의 용의자 이**의 위치가 경찰에 포착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찰은 오늘 오후 이**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인터넷에 접속한 사실을 포착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드디어 범인의 꼬리가 잡혔어. 이 씨가 자신의 아이디로 인터넷에 접속을 한 거야. IP추적 결과 장소는 성북구의 한 아파트. 곧바로 대규모 경찰 병력이 아파트 주변을 에워쌌어. 한 쪽엔 에어매트가, 그 옆엔 구급차도 준비됐어. 궁지에 몰린 이 씨가 투신할 가능성에 대비한 거야.
그 사이 형사들은 아파트 단지 내 집들에 일일이 초인종을 누르고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 집 안을 살펴. 그렇게 수색한 집만 무려 700여 곳이야. 그런데 이 씨는 없었어. 분명 여기서 접속한 게 맞는데, 형사들은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야. 그리고 다음 날, 형사들 앞으로 기절초풍할 소식이 전해져.
"특공대까지 투입하며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벌였던 경찰. 은신처 포착의 결정적 단서가 됐던 인터넷 아이디는 알고 보니, 한 초등학생의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이 모 군은 어제 낮 4시 반쯤 수배 전단지에 있는 이 씨의 주민등록번호를 보고 새 아이디를 만들어, 게임을 내려받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그때 당시 수배 전단지에는 용의자의 주민번호를 기재하도록 되어 있었대. 그걸 본 한 초등학생이 엄마 몰래 이 씨의 주민번호로 아이디를 개설한 거야. 게임 하려고... 결국 경찰병력 2백여 명이 투입된 대규모 검거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어.
▲ 유족의 트라우마
어느덧 사건 발생 5일째. 여전히 범인의 행방은 묘연한 가운데, 유가족과 경찰 20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어. 두 형사의 합동 영결식이 열렸거든.
"(사건이) 지하에서 일어났잖아요. 그 1층 중간까지 올라오다가 쓰러졌나 봐요. 거기까지 올라갔나 봐요, 도와달라고… 근데 그 숨 넘어가는 순간에 얼마나… 머리에 뭐가 스쳐 지나갔을까? 가족들? 나 지금 숨이 넘어가는데… 이제는 끝인데 싶었을 텐데..."
-황옥주, 故 심재호 형사 아내
심 형사는 당시 목표가 하나 있었어. 우연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경위로 진급하는 것. 무궁화 견장을 어깨에 달고 아들 앞에 누구보다 멋지게 서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그 목표는, 너무 슬프게 이뤄졌어. 순직 경관에게 주어지는 1계급 특진을 받았거든.
"임명장. 경사 심재호. 경위에 추서함. 2004년 7월 31일."
이걸 받아 든 아내 옥주 씨의 마음은 어땠을까?
"훈장? 그거 뭐 필요한데요. 목숨 내놓고 그거 한 개.. 꽃 한 개 더 단 거잖아요. 전 안 올라가도 돼요. 살아있기만 하면 그게 훨씬… 어차피 그 사람은 없는데.. 그게 다 뭐가 소용 있어요."
-황옥주, 故 심재호 형사 아내
이재현 형사도 1계급 특진을 받아 순경에서 경장으로 진급했어. 하지만 어머니에겐 역시나 아무 소용 없는 명예였지. 아들을 위해 요리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던 어머니는, 그날 이후 더 이상 부엌에 들어가지 않았어. 아니, 갈 수가 없었어. 20년이 지났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칼을 잡지 못하신대.
"그때부터는 내 정신이 아니지 뭐. 안 그렇겠나. 그리고 젊은 사람들만 봐도 내가 못 견디고, 또 경찰 보면 더 하고, 주방에서 음식 하잖아. 칼만 보면 내가 소름이 끼쳐. 그 칼만 보면 지금도 내가 온몸이 오싹해지거든. 자기는 좀 억울할 거야.. 그렇죠? 억울할 거다… 내가 뭐 한다고 공부 시켰는가.. 공부 안 시켰으면, 공부 못했으면 나하고 농사 지을 거 아니야? 농사나 지으면서 여태까지 나하고 살 텐데.... 우리 아들 만나면 안아주고 싶지…"
-유진숙, 故 이재현 형사 어머니
혹시 '트라우마'라는 말의 어원이 뭔지 알아? 그리스어로 '뚫리다' 라는 뜻 이래. 평생 채워질 수 없는 구멍을 가슴에 안고 사는 기분. 하루아침에 남편과 아들, 그리고 아빠를 잃은 가족들의 시간은 그날에 멈춰져 있어.
▲ 공포의 인질극
가족들이 슬픔에 젖어있는 사이, 형사들은 여전히 이 씨의 행방을 쫓고 있어. 어느덧 도주 8일째, 경찰은 이 씨의 포상금 액수를 더 올려. 탈주범 신창원과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과 같은 액수인 5천만 원으로.
그리고 이날,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돼. 그토록 애타게 찾던 범인 이 씨가 인질범으로 나타난 거야. 다시, 처음 할머니가 인질범 이 씨를 마주친 그 상황으로 돌아가 볼게.
이건 당시 할머니의 집 내부를 그린 거야. 할머니의 집은 빌라 1층에 있어. 오후 2시경, 용의자 이 씨는 작은방 창문을 통해 할머니의 집에 침입해. 맨 처음에 화장실 앞에 서 있던 이 씨가 할머니에게 칼을 들이대며 했던 말 기억나? "할머니, 나 알지?" 했던 거. 사실 할머니는 이 씨를 한눈에 알아봤어. 당시 뉴스에서 종일 이 씨에 대한 얘기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목에 칼이 들어온 그 순간, 할머니의 눈에 뭔가가 들어와. 바로 안방에 곤히 잠들어 있는 어린 손자. 할머니는 정신이 번쩍 들었어. 잘못하면, 어린 손자가 다칠 수 있어.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할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범인을 자극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자신을 아느냐고 묻는 이 씨의 질문에 할머니는 "저는 애기 보느라 뉴스고 뭐고 아예 TV를 못 켜요. 그래서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답했어. 어린 손자를 핑계 대며 모른다고 딱 잡아뗐어. 범인은 이런 할머니의 거짓말을 믿었을까? 이 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순간 할머니는 보았어. 이 씨의 안심하는 눈빛을. 이제 할머니는 이 씨를 다독이기로 마음을 먹어.
"이제 그 사람이, 일주일 동안 산에 숨어서 밥도 못 먹고 물만 마셨다더라고. 그래서 그 사람을 도닥거리기 시작했죠. 그러면 배고프지 않냐고. '배고프다' 그러더라고. 그래 가지고 내가 여름에 먹으려고 육수 내놓은 게 있어서 '국수 삶아줄까' 그랬더니 '국수는 삶아 달라' 하더라고. 국수 몇 숟갈을 먹더니, 앉아서 이제 자기 얘기를 다 하더라고요."
-인질이 된 할머니
이 씨는 할머니를 붙잡고 자신이 여자친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또 경찰에게 흉기를 왜 휘두를 수밖에 없었는지, 한참 동안 자기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해. 그러더니 갑자기 이런 요구를 해.
"근데 할머니, 컴퓨터 있어요? 내 기사를 좀 보고 싶은데?"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야. 이 집에 컴퓨터가 있는 장소는, 이씨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바로 그 방이야. 할머니는 컴퓨터가 있는 작은 방으로 이 씨를 안내해. 그런데 이때, 할머니의 눈에 또 뭔가가 들어와. 바로, 청소기. 이 청소기 소음을 이용해 아들에게 몰래 전화를 하려는 거야.
이 씨가 할머니네 집에 온 지가 거의 4시간이 다 되어가. 그 사이 국수도 삶아줘, 이야기도 들어줘, 그래서 이 씨는 할머니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거 같아. 할머니의 이 기막힌 청소기 아이디어는 성공했을까?
"물었어요 내가. '청소기계를 좀 밀겠다' 그랬더니, '밀어라'고 하더라고. 그 순간에 '어떻게든 내가 신고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질이 된 할머니
이 씨의 허락을 구한 할머니는 곧바로 청소기 전원을 켜. 그리고 거실을 청소하는 척 액션을 취한 뒤, 청소기를 바닥에 슬쩍 내려놔. 물론 전원을 켜 놓은 채로. 그리고 재빨리 안방으로 가서 핸드폰으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어. 잠시 후, 오후 6시 40분. 112로 다급한 신고 전화가 걸려 와.
할머니 아들 : 방화동 **이거든요. 저희 엄마한테 전화가 왔는데 경찰관 죽인 놈 있죠. 그놈이 저희 집에 들어와 있다고 엄마가 몰래 휴대폰으로 전화하셨어요. 자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애기랑 같이 있는데..
112 센터 : 감금되어 있대요?
할머니 아들 : 아니 그건 엄마가 달래는 놨다고 하더라고요.
112 센터 : 일단 조용히 경찰관 보내서 주위 에워싸고 시작하겠습니다. 소리 크게 안 나게.
-112 신고센터 신고 내용 中
사실 아들은 처음에 엄마의 얘길 믿지 않았대. 아니 살인범한테 붙잡힌 상황에서 몰래 전화를 한다? 말이 안 되잖아. 그렇게 반신반의하며 경찰에 일단 신고 전화를 한 거야.
아들과의 통화에 성공한 할머니는 이번엔 이 씨에게 이런 부탁을 해. "손자가 깨서 목욕을 시키려고 하는데, 해도 될까?"라고. 갑자기 웬 손자 목욕? 아들에게 신고를 부탁했잖아. 곧 경찰이 올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집에서 안전한 곳으로, 범인을 피해 대피할 수 있는 명분을 떠올린 거야.
할머니는 용의자의 허락을 받은 뒤, 손자를 안고 후다닥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어. 그런 뒤 조심스럽게 손잡이의 잠금 버튼을 눌렀어.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어.
"경찰이다! 칼 버려!"
드디어 경찰이 출동했어. 이 씨는 거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경찰을 보고는 극도의 흥분 상태로 자신의 배에 칼로 상처를 내기 시작했어. 이 씨는 어떻게 됐을까?
이 씨는 검거 직후 병원으로 이송됐어.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였대. 그렇게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경관 살해 용의자 이 씨의 8일간의 도주극은 마침내 끝이 났어. 물론 할머니와 손자도 안전하게 구출이 됐지.
▲ 인질범의 흉터
이 씨의 검거 소식에 가장 안도한 이들, 누구였을까? 맞아. 동료 형사들. 당시 서부서 강력반 소속인 이대우 형사는 검거 소식을 듣자마자 이 씨가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어. 그리고 그곳에서 또 한 번 울분을 삼켜야 했대. 범인의 어깨에서 이걸 봤거든.
"그때 상의를 탈의하고 자기 자해한 걸 치료하고 있었는데. 이 씨의 오른쪽 어깨에 선명하게 이빨자국이 멍들어 있더라고요. 그게 아마 이재현 순경이 칼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걔를 잡기 위해 물어뜯었던 그런 흔적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홉 번인가 찔렸다고 하는데, 그런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잡고 부둥켜안고 이빨로 물어서라도 검거하려고 했던 그런 근성이 이제 오버랩되니까… 조금 울컥울컥 합니다. 그때 그거 보고 정말, 걔는 아프다고 응급실 침대에 누워서 그러고 있는데… 참 패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솟아올랐는데. 경찰관이고 또 감정적으로 대하면 안되기 때문에 참았던 기억이 납니다."
- 이대우 형사, 당시 서부경찰서 강력 4팀
범인의 어깨에 선명하게 남겨진 흉터. 그건 이 순경의 이빨 자국이었어. 그 흉터를 본 형사들은 지난 8일 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토해내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고 해.
그토록 잡고 싶던 범인이 잡혔어. 이제 남은 건 죗값을 치르는 일이겠지? 법원은 경관 두 명을 살해한 이씨에게 사형을 구형했어. 이씨는 형량이 너무 무겁다며 항소를 했어. 그리고 최종 판결은 이렇게 났어.
"피고인은 이미 여러 차례 절도나 폭력 범죄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고 정당한 공무를 수행하던 경찰관을 칼로 찔러 잔인하게 살해하였는 바, 중형에 처하여야 할 사정이 있음은 충분히 인정된다. 그러나, 출소 이후 택시 기사로 근무하며 나름대로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해 온 점, 자신을 체포하려는 경찰관들을 보고 저지른 우발적 범행이라는 점, 깊이 참회하고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비추어 볼 때 사형을 선고한 것은 부당하다. 따라서 피고인을 무기징역에 처한다."
유가족과 동료 형사들이 이 판결문에서 가장 납득하기 힘든 구절은 이거였어. '우발적 범행'. 이 씨가 범행 직후 뭘 타고 도주했는지 기억나? 자신이 몰고 온 택시. 그날 이씨는 커피숍으로 피해 여성을 만나러 가기 전, 자신의 택시를 맞은편 도로에 세워놨어. 아마도 이 씨는 도주할 계획을 미리 세웠던 것 같아.
게다가 범행을 계획한 증거는 또 있어. 사건 당일 오후 3시경, 택시회사 CCTV에 찍힌 이 씨의 모습이 있어. 화면에서 이 씨의 손을 주목해서 잘 봐.
이 씨가 든 저 가방엔 형사들에게 휘두른 칼이 있었어. 길이가 무려 24센티나 되는 회칼이야.
"흉기를 소지했다는 것 자체가, '항상 누군가는 찔릴 수 있다'는 미필적 고의도 간직하고 있는 거거든요. 납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이대우 형사, 당시 서부경찰서 강력 4팀
이 씨의 검거에 도움을 준 할머니는 이 씨의 감형 소식에 해외로 이민을 가야 했어. 얼굴도 알고 어디 사는지도 아니까. 현행법상 아무리 무기수라도 20년의 형을 채우면, 가석방 심사 대상이 될 수 있어. 만에 하나 이 씨가 출소할 가능성 때문에, 도저히 한국에서 살 수가 없었다고 해.
▲ 두 형사의 희생, 남겨진 사람들
그런데 말야. 여기까지 들으면서 한 가지 이상한 점 없었어? 왜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검거 현장에서 범인이 위협을 가할 때 형사들이 총을 꺼내잖아. 하지만 두 형사가 범행 현장에 가져간 건, 삼단봉과 수갑이 전부였어. 그럼 왜 총은 안 가져간 걸까?
2004년 당시, 경찰학교 총기 사용 교육을 어떻게 했나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어. 경찰학교 교수는 총기 사용에 대해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3회 이상을 꼭 경고를 해야 합니다. 칼 버려! 칼 버려! 칼 버려! 그 다음에 안될 때 그런 상태에서도 사격을 하면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경찰관한테 칼을 찌를 때 있죠? 찌를 때. 그때 어디를 사격해야 됩니까? 허벅지, 넓적다리, 대퇴부라고 하죠. 거기를 사격해야 됩니다. 만약에 상반신을 맞췄다? 어떻게 됩니까? 비난이 온통 경찰에게 쏟아집니다."
-경찰학교 교수
"총기 사용에 대해서는 뭐 예전이나 지금이나 신중하고 굉장히 사용하는 걸 꺼려하는 건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총기를 사용하고 난 다음에, 거기에 따른 잘했나? 못했나? 수많은 조사를 거쳐야 되는 그런 시달림? 그래서 오죽하면 총을 쏘라고 있는 게 아니라 던져서 맞히라고 영화의 대사처럼 사용될 정도였으니까. 총기 사용을 꺼려하는 거죠."
- 이대우 형사, 당시 서부경찰서 강력 4팀
실제로 이 사건이 있기 몇 달 전, 한 형사가 과잉 진압으로 곤욕을 치른 일이 있었대. 흉기를 휘두르던 범인에게 총을 쐈는데 공교롭게도 대퇴부가 아닌 상체에 맞았거든. 치료를 받고 깨어난 용의자는 인권위에 제소를 했고 형사는 결국 제복을 벗어야 했어.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경찰들이 총을 들고 출동할 수 있었을까?
두 형사가 떠난 지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어. 그동안 유가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산에 가다가 내가 내려오면 막 새가 따라오면서 우는 거야 깍깍 하면서 우는 거라. 우리 재현이가 새로 좋은데 태어났는가.. 안 그러면 새가 돼서 다니는가.. 뭐라도 짐승이 내 옆에 오면 우리 재현이가 오는가 싶어서요. 내가 되게 못 살아도 아들만 있었으면 행복할 것 같아.. 죽을 먹고 살아도 아들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아..."
-유진숙, 故 이재현 형사 어머니
심 형사의 아내 옥주 씨는 한동안 남편의 사망신고를 하지 못했어. '고인'의 칸에 남편의 이름을 쓰는 순간 정말 남편을 떠나보내야 할 것 같아서 차마 펜을 들 수가 없었다고 해. 하지만 무엇보다 옥주 씨가 힘들었던 건 이거야.
"제가 애들 아빠 생각하지 않게 주말마다 데리고 나갔어요. 어디가 됐든. 온 가족이 있는 팀이 있으면 자리를 피해서 없는 데 가서 애들이랑 놀고.. 거기서 놀고 있으면 우연이가, 저기 아빠랑 아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잖아요. 그럼 여기서 걔를 이렇게 쳐다보고 있는데.... 그런 부재를 안 느끼게 하려고 저도 엄청 애를 썼는데, 왜 우린 둘이서 놀아야 되냐고.. 우리도 가족끼리 같이 하면 안되냐고... 그 한 사람 빈자리가 온 가족이 다 파괴가 된 거예요."
-황옥주, 故 심재호 형사 아내
4살 우연이, 생후 9개월이 된 유리. 한창 아빠의 품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아빠의 부재를 이해시키는 게 가장 아프고 힘든 일이었대. 그럴 때마다 옥주 씨는 순직 경관들이 모인 추모 공간에 혼자 글을 쓰며 마음을 달랬어. 그렇게 20년 동안 마음을 꼭꼭 눌러 담아 쓴 페이지가 어느새 책 한 권이야.
<2004년 11월 28일>
우연 아빠! 오늘 유리 돌잔치를 했어. 우리 유리는 착하게 울지도 않고 사진도 잘 찍더라. 아빠가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2008년 1월 4일>
또 새해가 밝았어. 자기가 떠날 때 우연이가 4살이었는데, 초등학교 간다고 벌써 의젓해진 것 같아. 유리는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한글을 읽어. 자기 닮았나 봐. 모든 게 똑소리가 나.
<2012년 6월 26일>
오늘 우연이가 학교에서 놀림을 받았대. 아빠 없다고. 하지만 자기는 슬프지 않았대. 훌륭한 일 하시다가 하늘나라 가셨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더라.
이제 함께한 시간보다 헤어져 지낸 시간이 더 많아졌지만, 가족들의 그리움은 세월이 흐를수록 짙어만 갔어. 그럼, 범인 이 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 씨는 몇 년 전, 자신의 사건을 다룬 한 기자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어. 이건 이 씨가 교도소에서 보낸 편지의 일부를 발췌한 거야.
"기자님, 자기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괴로운 순간을 되새기게 하는 건 매우 잔인한 일입니다. 물론 제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고, 죗값이지만 순간의 기억을 되살려 저와 가족이 받는 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죠. 이런 제 마음을 조금만 이해해 주시고 앞으로 기사 쓰실 때 기사로 인해 상처받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세요. 저는 속죄하고 회개하며 정말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 씨가 기자에게 보낸 편지 中
유가족들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씨는 지금까지도 유가족들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어.
'꼬꼬무'가 이번에 이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다 안타깝게 순직한 두 형사를 보며 경찰의 꿈을 키우게 된 한 아이를 만날 수 있었어. 우리가 아는 아이야.
"안녕하세요. 저는 경찰을 꿈꾸는 심재호 경위의 아들 심우연이라고 합니다. 경찰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졌던 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4살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아빠가 집에 안 들어오고 있고 엄마는 매일같이 울고. 아 우리 아빠가 돌아가신 거구나… 이렇게 인지하고 있었다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제가 혼자 조사를 하고. 범인이 왜 그랬는가, 왜 그런 짓을 했는가에 대한 심리를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들이 더 커져 가지고… 경찰이 더더욱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심우연, 故 심재호 형사 아들
4살 우연이는 아빠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경찰행정학과에 진학해 열심히 목표를 향해 달리는 중이야. 우연이의 최종 꿈은, 아버지와 같은 강력반 형사가 되는 거래. '꼬꼬무'가 우연이에게 경찰 임명장을 받는 그날,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물었어.
"나 아빠 없이도 잘 컸다… 엄마도 많이 힘들었을 거고, 나도 동생도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 되게 자랑스럽게 크지 않았어? 하고 얘기를 할 것 같습니다. 어쩔 때 한 번씩 아버지가 꿈에 나올 때가 있어요. 그럼 그때, 매번 아버지 말씀이 없으신데.... 제가 얘기하죠. 아버지 보고. '내가 꼭 아빠 넘는 경찰이 되겠다' '사회에 이바지하겠다'… 그러면 아버지는 항상 흐뭇하게 웃고 가세요. 경찰이 그렇게 순직을 하면, 그 가족들이 힘든 그런 고통… 더 이상 만들지 않도록 많이 노력하겠다, 그거 꼭 계속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하고 얘기할 것 같아요. 많이 많이 사랑한다고 얘기할 것 같고…"
-심우연, 故 심재호 형사 아들
이번에 '꼬꼬무'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이 20년 전 아픈 상처를 다시 꺼낸 이유는, 단 하나야. 모두가 알지만 또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찰의 희생과 헌신. 오늘을 계기로 다시 한번 되새겨 줬으면 하는 마음에 나오셨다고 해.
이 사건을 계기로 바뀐 것들이 있어. 테이저건이 도입됐고, 갑옷처럼 무거웠던 방검복도 한결 가벼운 재질의 방검조끼로 바뀌었대. 두 형사의 숭고한 희생이, 오늘날 많은 걸 변화시킨 거지.
서울경찰청 앞에는 순직경찰관들의 추모 공간인 '경찰기념공원'이 있어. 1945년 광복 이후부터 나라를 위해 순직한 경찰관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데, 거기엔 1만 3700명의 이름이 적혀있어. 수많은 경찰관들이 범인 검거 현장에서, 또 교통정리를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고 있대. 그리고 이곳엔 아직 300명의 순직경찰관들의 이름을 새길 수 있는 빈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고 해. 부디 이 빈자리가 영원히 채워지지 않기를…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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