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을 기르지 않는 마을’ [장준영의’지피지기’ 일본역사]

2024. 8. 3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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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을 기르지 않는 마을에 있는 히라키다의 7인묘비. [출처 나가사키현 마쓰우라시]

‘무쿠리, 고쿠리가 온다’

‘사로잡은 여성들의 손바닥에 구멍을 뚫고 사슬로 꿰어서 이들을 뱃전에 내세웠다. 그리고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인간 방패로 삼았다’

일본불교 니치렌종의 창시자 니치렌은 몽골인과 한인 그리고 고려인 병사로 구성된 여·몽연합군이 1274년 일본을 침공할 당시 쓰시마에서 자행한 끔찍한 만행을 위의 글로 남겼다.

여·몽 연합군 병사들은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최단 거리인 사쓰마, 이키섬, 마츠우라의 다카시마 섬에 차례로 들이닥쳐 눈에 띄는 사람은 모조리 살해하는 등 이들 지역을 초토화시키며 주민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산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이를 추적해서 산속에 숨어 있는 가족들을 몰살시켰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일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항복하거나 복속하지 않으면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잔인한 행태는 몽골군의 고려침공 때에도 자행되어 ‘고려사’에서는 이를 ‘시체가 온 들판을 뒤덮었다’라고 묘사했다.

이키섬에서는 ‘무쿠리, 고쿠리가 온다!’라고 말하면 우는 아이도 도중에 울음을 뚝 그친다는 이야기가 수 대에 걸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무쿠리는 몽골군, 고쿠리는 고려 병사를 말한다. 또한 나가사키현 마츠우라시 다카시마 섬의 후나토즈 산간 마을에는 ‘닭을 기르지 않는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여·몽연합군의 눈을 피해 집 안에 숨어 있었는데 집에서 기르던 닭이 우는 바람에 이들에게 들켜 잿더미 속에 숨어 있던 노파 한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 가족 7명은 전부 몰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이 마을에서는 닭을 기르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현지에는 이들 가족을 기리는 ‘히라키다의 7인총’이란 묘비가 남아 있다.

원 황제 쿠빌라이는 고려인 출신의 신하 조이의 남송 견제를 위한 일본과의 교섭 필요성을 제기한 데 공감하여 1268년 자신의 친서를 휴대한 사신을 일본 가마쿠라 막부에 파견한다. 그 이후 수차례나 사신을 보냈음에도 일본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격노한 쿠빌라이는 휘하 장수들에게는 일본 침공의 뜻을 밝힘과 동시에 속국 고려에 대해서는 군함 건조와 병사 확보를 명령했다.

일본 침공 1년 전인 1273년, 고려에서는 40여 년에 걸쳐 반몽항쟁의 선봉에 서 있던 고려 무신정권의 삼별초가 토벌되었고, 중국 남부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남송은 5년에 걸친 원과의 전투에서 승기를 잃어 사실상 국력을 상실했다. 쿠빌라이는 이듬해에는 자기 딸을 고려 원종의 왕세자 심에게 시집을 보내 정략결혼을 성사시켰다. 그해 원종이 서거하자 자신의 사위, 심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고려 충렬왕이다. 이로써 고려와 원의 관계는 한층 공고해졌다.

쿠빌라이는 주변 정세의 안정화로 인해 일본 침공을 위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자, 몽골인 홀돈을 총사령관으로, 한인 유복형과 몽골 귀화 고려인 출신 홍다구를 각각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한 몽골·한족으로 구성된 주력군과 고려군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 등 합계 4만여 명의 병사와 전함 등 900여 척은 1274년 10월 3일 고려의 마산 합포항을 출항, 제1차 일본 침공에 나섰다. 원정군은 쓰시마 이키 다카시마 등 침공로의 길목에 자리한 섬들을 초토화시켰으나 정작 규슈 본토 전투에서는 일본 측의 거센 저항에 맞닥뜨려 고전을 면치 못하여 하카타만 진입 단 하루 만에 철군을 결정하고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귀로에 올랐다. 원왕조의 역사서 ‘원사’는 철군 이유로서 혼성군 지휘관 간의 알력으로 인한 내부 갈등과 화살 등 군수 보급품 부족 등을 예로 들었다.

1281년 5월부터 시작된 제2차 침공에서 동로군(여·몽연합군)과 강남군(주로 남송 출신자) 합계 14만 명, 4400여 척의 전력으로 일본에 쳐들어왔으나 때마침 불어 닥친 태풍으로 인해 함선들은 좌초, 침몰되고 병사들은 익사하는 등 궤멸적 타격을 입은 채 철군했다. 이 가운데 3~4만여 명만이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는데 일본은 남송 출신자에 대해서는 노예로 삼았으나, 고려인과 몽골 한인들은 가차 없이 처형했다. 이는 제1차 침공 당시 쓰시마, 이키, 다카시마 등 마츠우라 지방에서 자행했던 여·몽연합군의 잔학행위에 대한 응징이었다고 한다. 결국 원의 일본 침공은 두 차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여몽 연합군의 1차 일본침공 [출처 이키관광사무소]

눈엣가시, 일본

그렇다면 쿠빌라이는 왜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집요하게 일본정벌에 나섰던 것일까. 1271년 원을 세우고 황제로 등극한 그에게 있어서 중국 전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남송 정복이 절실했다. 그 당시 일본은 남송에 유황을 수출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대량으로 산출되는 유황은 화약 원료로 사용되었는데 남송은 일본에서 수입한 유황으로 폭탄을 만들어서 원과의 전투에 맞섰다고 한다. 원에게 있어서 일본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원은 일본과 남송 간의 관계에 쐐기를 박지 않을 수 없었다. 쿠빌라이의 제1차 일본 침공에는 일·송 간의 무기 원료 거래를 원천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남송을 멸망시킨 후에 감행된 제2차 침공에는 대다수가 구남송군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이 소지한 물품 가운데 농기구가 상당수 발견된 점에서 이는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라고 하기보다는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해외 이민자집단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는 견해마저 제기된다. 쿠빌라이가 남송의 불만 섞인 잔존 세력을 일본으로 이주시켜 내부체제의 안정을 꾀하려는 차원에서 제2차 일본 침공을 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몽골 2차 일본침공 [출처 일본사 사전]

혐한·반한 감정의 원점

여·몽연합군의 일본 침공 이후 일본인들은 고려에 대해 극도의 반감과 적개심을 드러냈다. 왜구들이 한반도 해안가에 침입하여 약탈 방화 인질을 사로잡는 등의 노략질을 자행하는 것에 대해 일본의 사찰 측 자료에는 “(몽골) 침략자와 같은 패거리인 고려에 대해 보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는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라며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고 기록했다. 일본 침공 당시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쓰시마, 이키, 마츠우라 지역 일대는 그 이후에 ‘왜구의 소굴’로도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일부에서는 이들은 ‘전기 왜구’로 분류하며 그들이 한반도에 침입하여 자행하는 노략질을 복수 행위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시기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고려가 일본 침공에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여 한반도는 정벌·정복해야 할 악인의 땅으로 각인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는 논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쿠빌라이가 주도한 여·몽연합군의 일본 침공은 오랜 세월 유지하여 온 한반도와 일본과의 우호 관계에 어두운 잔영을 짙게 남겼다. 또한 일본인의 한반도에 대한 감정의 골을 깊게 파놓아 그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점에서 쿠빌라이에 의해 자행된 일본 침공은 일본인들의 혐한·반한 감정의 ‘원점’이 되었다는 견해는 설득력을 얻을 것으로 본다.

다음 회에서는 이성계를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킨 왜구 아기발도와 조총의 일본 전래와 관련되었다는 중국인 왜구 두목 장직에 관해 ‘아기발도와 장직’이란 제목으로 소개하여 올리고자 한다.

bons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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