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들 ‘솔직한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김헌·김월회의 고전 매트릭스]
■ 변신 이야기
목소리 뺏긴 ‘에코’ 결국 메아리만 남아
선수들 고백·작심발언 누군가엔 불편해도
공허한 울림 안되게 세심히 이해해야
에코라는 요정이 있었다. 말을 얼마나 재미있게 잘하는지, 그의 말을 들은 누구든 하던 일도, 가던 길도 멈추고 솔깃해진 귀를 그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았지만, 제우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녀의 이야기가 재미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특별한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그가 지상으로 내려와 아름다운 요정들과 몰래 사랑을 나눌 때, 그의 아내 헤라가 눈치채고 현장을 덮칠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에코가 헤라의 귀를 빼앗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바람에 헤라가 허탕을 친 것이다. 제우스로서는 얼마나 에코가 고맙고 예뻤겠는가! 모든 사실을 알아차린 헤라는 그녀의 목소리를 빼앗았다. “너의 혀는 이제부터 다른 이의 말의 끄트머리만 반복할 것이다.” 그때부터 에코는 ‘자기 목소리’를 잃게 되었다.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어느 날, 나르키소스라는 멋진 청년을 본 것이다.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헤라의 저주 때문에 자기 마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모습을 숨긴 채로 그의 뒤를 쫓아갈 뿐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나르키소스가 “여기 누구 있니?”라고 말했을 때, 비로소 에코는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누구 있니?”였다. “누가 있구나? 피하지 말고 나와라!” 이 말에 에코는 “나와라!”라고 그의 말 끝부분을 반복하며 튀어나와 그를 껴안았다. 나르키소스는 깜짝 놀라며, “이 손 치워, 껴안지 말고!”라고 외쳤다. 에코는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기 목소리를 잃은 에코는 “껴안지 말고!”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나르키소스가 그녀를 뿌리치고 달아나자, 에코는 실연의 상실감과 수치심, 모욕감을 느끼고 숲속 깊이 달아나 깊은 동굴 속으로 몸을 숨겼다. 동굴 속에 처박혀 실연의 고통을 곱씹었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과 외로움, 수치심을 자기 목소리로 낼 수가 없었다. 에코는 점점 여위어 갔다. 살갗이 오그라들고 피가 말라가더니,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몸은 산산조각이 났고, 먼지로 날아가 버렸다. 오로지 자기 목소리를 잃은 그녀의 목소리만이 동굴 속에 남아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의 끝부분만을 메아리로 반복할 수 있었다. “야호!” 하며 울리는 메아리는 자기 목소리를 잃은 에코의 서글픔이란다.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올림픽이 끝났다. 최고 기량의 선수들이 멋진 경쟁과 활약을 보여주었고, 그 광경을 보며 감탄하고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최후의 승자들에게는 영광의 메달이 건네졌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의 소감은 또 다른 감동과 교훈을 선사했다. “메달을 땄다고 젖어 있지 마라. 해 뜨면 다시 마른다”라며 “오늘 메달은 오늘까지만 즐기겠다”는 양궁의 김우진 선수의 말에는 성공과 실패의 병가상사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관록이 보였다. 주 종목인 25m 권총 본선에서 0점을 쏘는 바람에 결선 진출에 실패한 사격의 김예지 선수는 자신의 실수를 ‘빅이벤트’라고 호탕하게 말하면서 “여러분의 실망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0점을 쏘았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실수를 툭 털어버리는 의연함을 보여주었다.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이 낸 자기 목소리는 보도자료를 읽는 듯했던 예전의 인터뷰 풍경과는 사뭇 달리 들렸다. 승리한 사람이 ‘애국’이나 ‘대한민국 만세’를 내세우거나, 패배한 사람이 죄인 된 듯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아니었다. 실패의 아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하고, 승리의 순간에 그동안의 외로움과 고통, 울분을 솔직하게 고백한 배드민턴의 안세영 선수의 작심 발언도 예전의 인터뷰와 비교하면 참신하고 용기가 돋보인다. 이런 솔직함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색하고 반박하며 불쾌감을 드러내기보다는 그런 솔직한 목소리에 담긴 마음과 처지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자기 목소리를 잃은 에코가 뼈와 살과 피가 메말라 가루가 되어 남의 목소리만을 반복하며 공허하게 메아리치는 불행을 피하려면 말이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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