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2강 중국, 국제사회 이끌기엔 갈 길 멀다”
최창근 에포크타임스코리아 국내뉴스 에디터 2024. 8. 30. 09:00
[Focus] ‘슬픈 중국’ 시리즈로 메시지 던지는 송재윤 교수
"역사는 인간의 본성과 삶의 현실에 관한 경험적 탐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중국'을 빼고서는 이 세계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국사에 본격 관심을 가지게 됐고 언어장벽을 넘기 위해서 한자, 중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고려대 철학과 재학 시절 같은 문과대학에 한문학과, 중어중문학과도 있었습니다. 해당 학과 과목을 두루 수강했죠. 광의(廣義)의 중국학 학습 여건은 좋았던 셈입니다. 1990년대 하얼빈, 베이징 등에서 연수했고요.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사에 천착하게 됐습니다."
‘슬픈 중국' 시리즈를 연재 중인데 '변방의 중국몽'이라고 한국 이야기도 다루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슬픈 중국' 1~3부작에서 '중국'은 현대 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칭합니다. 현재 연재를 이어가는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에서 '중국'은 중화 문명권을 지칭합니다. 저는 중화 문화권에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속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심 문명권 변방에 생겨난 변종 문화권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슬픈 중국'이란 제목을 유지하고서 조선조에서 북한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또 북한에 동조하는 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송재윤 교수는 조선시대 군주와 사대부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쓴 '변방의 중국몽'에는 다음 구절이 나온다.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은 명(明)을 흠모하고 존경하고 숭배했다. 열강에 휩싸여 조선이 망국의 길로 치달을 때까지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의 숭명(崇明) 의식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고종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세워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했음에도 퇴위하는 1907년까지 대보단(大報壇)에서 명 황제들에 대한 제사를 이어갔다."
중국인들은 북한을 가리켜 '동북 4성의 하나'라고 하더군요.
"북한은 명목상 독립국가이지만 오늘날 실제 수출입의 9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대중국 의존도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중국이 없으면 북한은 연명할 수 없습니다. 북한은 중국의, 중국에 의한, 중국을 위한, 반미의 최전선이자 항미(抗美) 전초기지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중국에 북한은 순망치한(脣亡齒寒) 이상의 관계라고 봅니다."
송재윤 교수는 중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북한의 베트남화'라고도 했다.
"북한이 베트남의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채택하고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편입된다면 중국은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대륙 문명권을 이탈해 해양 문명권으로 가는 것인데 중국은 이를 방치할 수 없겠죠.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거시적 관점에서 슬픈 중국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강건성세(康乾盛世)'라 칭하는 청 전성기를 맞이해 인구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1800년 무렵 인구가 4억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되죠. 그 결과 경작 토지는 부족하고 인구는 늘어서 다수가 빈곤의 늪에 빠졌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결과 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했죠. 민국(民國)은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 국가체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다 1931년 9·18 사변, 1937년 중일전쟁 등 일본 침략 전쟁을 겪었고요. 그 시절 내부적으로는 제1·2차 국공내전이 있었습니다. 이 속에서 인민의 고통은 가중됐습니다. 최근 학계에서 밝히고 있지만, 1930~40년대 국민당이 통치하던 민국 시대는 1950년대 중화인민공화국보다 훨씬 개방되고 자유로운 시대였습니다. 여전히 빈곤이 만연했지만, 부를 추구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는 보장됐습니다. 외래 사상을 자유롭게 탐구하는 학문적 자유도 있었습니다. 전체 중국 역사를 통틀어 초기 중화인민공화국처럼 사적 소유를 제한한 시기는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1958년부터 전국에 7만 개 이상의 인민공사(人民公社)가 세워졌습니다. 2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 넘는 농민이 군사 조직과 유사한 대규모 집단농장에 배치됐습니다. 그 결과 인민들은 밤낮으로 중노동에 시달렸지만 경제적 파산 지경에 이르렀죠. 대약진(大躍進)은 대역진(大逆進)의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 여파로 수천만 명이 아사(餓死)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고유의 문화·전통을 파괴하고 수백만 인명을 살상한 문화대혁명은 말할 것도 없고요."
6·4 톈안먼 사건 유혈 진압 원죄가 있지만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한 덩샤오핑의 업적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중국 인구의 절대다수를 점하는 농민 생활 수준이 결정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개혁·개방 실시 이후입니다. 그 이전에는 빈곤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죠. 절대다수 인민을 '농노(農奴)화' 했기 때문입니다. 마오쩌둥 집권기(1949~1976)는 집단 생산에 기반한 경제발전이 기조였습니다. 사회주의 관념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들이 강하게 눌렀기 때문에 마오쩌둥 사망 이전까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죠. 류사오치(劉少奇),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 등은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추종파)로 몰렸고요."
주자파로 몰려 실각과 복권을 반복했던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부주석·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국무원 부총리·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지위를 공식 회복했다.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 후에는 '최고지도자' 자격으로 미국을 순방했다. 그의 별칭은 개혁·개방 설계자다.
이른바 '신중국'은 성립 후 반우파 투쟁,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항일전쟁 기간보다 더 많은 인명 손실이 발생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대약진운동은 완벽히 실패한 것입니다. 적게는 3000만 명, 많게는 4500만 명, 미출생 인구까지 합산하면 7000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중국 대기근을 다룬 '묘비(墓碑)', 문화대혁명을 다룬 '천지번복(天地翻覆)' 등을 쓴 저널리스트 양지성(楊繼繩) 등도 주장하죠. 어떤 사회구조를 급격하게 변동시키려 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봅니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 이런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더 무서운 것이고요. 1978년 중국 정부 발표에 따르면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1억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대학 시절 고 리영희 교수의 저작들을 접했을 듯합니다만.
송재윤 교수는 "리영희 교수 책을 읽기는 했으나 감명은 없었다"고 전제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도 '우상과 이성' 등 일련의 저작을 읽었죠. 당시만 해도 '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리영희 교수가 주요 언론사 국제부 기자로 일했다는 사실입니다. 1960~70년대 한국 언론의 중국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니 상당히 정확한 시각으로 보도했습니다. 서구나 일본을 거쳐온 외신이었지만 실상을 왜곡하지 않았어요."
리영희 교수는 '8억인과의 대화'에서 문화대혁명기 중국이 미국보다 나은 사회라고 했어요.
"중국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던 시기입니다. 리영희 교수는 이를 교묘히 파고든 것이고요. 서구 지성인 중에서도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오류를 범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실증적 방법으로 중국을 비판하며 '진실'을 찾은 학자도 적지 않고요. 리영희 교수는 서구, 일본에서 출간된 좌편향 지식인의 글을 편향적으로 흡수해서 편향적으로 한국 사회에 제공했습니다. 인류 보편 상식과 동떨어진 '특수한 중화 문명' 옹호 논리를 개발한 것이죠."
송재윤 교수는 '리영희식 논리'가 더 당혹스러운 것은 문화대혁명 이후에 보여준 그의 태도라고도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리영희를 함께 읽다'라는 대담집에서 사회학자 김동춘 교수가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변화했다. 어떻게 생각하나?'고 물어요. 리영희 교수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는 관심이 없어졌다'고 답하죠. 공산혁명기 중국에만 관심이 있고 그 이후에는 관심이 없어졌다는 것은 현실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잖아요. 리영희 교수는 저널리스트 출신 연구자이잖아요. 현실에 관심 없으면서 왜 저널리스트가 됐죠? 제 관점에서 그는 '비현실적 염세주의자'입니다. 중국에 대한 판타지를 창조하고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거예요."
지난날 반미(反美)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오늘날 친중(親中)화됐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반미와 친중은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좌파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일제 패망 후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국이 이승만 정권과 결탁해 분단을 고착화했다고 생각합니다."
송재윤 교수는 일각의 시각에는 반론을 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해양 문명권에 속하게 된 대한민국의 번영에 미국이 기여했다는 취지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이식한 미국의 공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미국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도 없는 것이죠. 일부 반미주의자들은 '미국이 분단을 영속화했다' '분단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6·25전쟁도 '김일성의 통일전쟁'으로 정당화될 수 있겠죠."
반미주의자들이 구소련의 '대체제'로서 중국을 택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동의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동서 냉전 체제하에서 소련과 대결했습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반미주의자들은 침묵했습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의 급부상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식으로 사고하는 것이죠. 한국은 지난날 중화 문명권에 속했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반미를 내세우며 중국과 결합을 주장합니다. 시진핑 체제 들어 '중국몽(中國夢)'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중국몽이 뭐냐?'고 질문하면 돌아오는 답이 '중화제국의 위대한 부흥' 정도에 그치는 형편이죠. 중국몽이 인류 발전에 어떤 의미가 있죠?"
"소프트파워 측면에서 지난 19세기 대영제국이 제시한 '세계 자본주의'에 비춰봐도 중국몽은 보편적이지 못합니다. '중화 특수주의' '중화 문명 예외주의' '중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죠. 중국은 국제사회를 이끌기엔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 내 친중주의를 비판하는 근거이고요."
송재윤 교수는 친중주의의 원류를 조선시대에서 찾기도 했다.
"조선은 명을 숭배했습니다. 사대부들은 유가적 관점에서 이상화된 중국만 바라보고 맹신했던 것이죠. 당시 명의 현실을 알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사대부들의 관념 속 중국은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였던 셈입니다. 이상화된 중국, 그래서 저는 슬픈 중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고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중국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고자 합니다."
한 전직 대통령이 한국도 중국몽과 함께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한국 대통령이 중국에 저자세로 임하니 중국은 환대했습니까? 오히려 짓밟혔죠. 한국이 왜 중국몽에 동참해야 하나요? 중국 현대사에 대한 몰이해, 중화 문명에 대한 환상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외교·안보 정책 책임자들은 중국 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고 보고요. 중립적·객관적 언어를 사용해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원수가 중국에 저자세를 취하는 것은 국가정체성을 해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변방의 중국몽'을 주제로 한 대화는 한반도와 더불어 또 다른 변방이라 할 수 있는 대만, 홍콩 문제로 이어졌다. 중국은 일국양제(一國兩制)를 내세워 홍콩(1997), 마카오(1999)의 주권을 반환받았고 '마지막 퍼즐' 대만을 상대로 통일전선 공작을 전개하고 있다.
‘홍콩의 오늘은 대만의 내일이다'라고 합니다. 대만인의 불안을 반영한 말이라 봅니다.
"중국이 홍콩 문제를 잘못 처리했습니다. 홍콩의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국제적 신뢰를 상실했습니다. 덩샤오핑은 일국양제를 주창했죠. 1997년 홍콩 반환 시 2047년까지 50년간 홍콩의 제한적 자치를 보장한다고 약속했습니다. 덩샤오핑은 미래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서로 다른 두 체제는 결국 수렴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 세계에 중국 특유의 조화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시진핑은 이를 깨뜨렸고요."
그는 홍콩 사례가 대만에도 심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일국양제는 대만 통일을 두고 고안한 체제입니다. 홍콩, 마카오에 우선 적용한 것이고요. 베이징이 반환 시 약속을 어기고 홍콩의 민주·자유를 파괴했는데 한국 이상으로 자유화·민주화된 대만이 중국 지배하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어렵다고 봅니다."
‘중국' '중국사' 연구를 한국 현실에 투영해 분석하던 송재윤 교수는 다음을 강조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인종주의 관점에서 중국인을 혐오하거나 미개하다고 비하하는 것은 나쁜 태도입니다. 그들도 같은 '사람'이니까요. 중국공산당과 인민은 분리해서 접근해야 합니다. 중국 인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가지고 있어야 하고요. 저는 중국공산당 중심으로 중국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늘 주장합니다. 국내 유명 대학의 한 중국 연구자는 '엘리트 중심의 중국공산당 통치 시스템이 완벽하다. 절대 안 무너진다'고 주장하기도 하던데 이런 시각에서 중국을 분석하니 예측이 엇나간다고 봅니다. 민주주의 체제가 겉보기에 허약해 보여도 훨씬 유연하고 강한 체제입니다. 중국의 민주화·자유화를 위해 노력하는 '대륙의 자유인들'을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한국, 소중화(小中華) 자임하던 봉건 조선 탈피 못 해
● 1950~60년대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은 재앙
● 반미와 친중은 동전 양면과 같아
● 리영희가 창조한 중국 판타지서 벗어날 때
● 중국몽은 환상… 냉정하게 직시해야
우리에게 중국은 무엇인가.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경제·무역 관계가 긴밀한 한국에 영원한 난제다. 중국, 중국인, 중국공산당은 친숙하면서도 낯선 존재이기도 하다. 당(唐)대 문인 한유(韓愈)의 표현대로 '지대물박(地大物博)'의 중국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가운데 외국 거주 한국인의 시각으로 중국 현대사의 속살을 풀어내는 중국 연구자가 있다.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교수다. '슬픈 중국' 시리즈를 통해 신중국이라 칭하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한국 독자에게 전하고 있다.
송재윤 교수는 고려대 철학과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하버드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테네시주립대를 거쳐 2009년부터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로 연구·강의하고 있다. 주요 과목은 중국 근현대사, 정치사상이다. "중국에 대한 환상을 걷고 냉정한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하는 교수를 8월 6일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마주했다.
송재윤 교수는 고려대 철학과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하버드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테네시주립대를 거쳐 2009년부터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로 연구·강의하고 있다. 주요 과목은 중국 근현대사, 정치사상이다. "중국에 대한 환상을 걷고 냉정한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하는 교수를 8월 6일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마주했다.
변방의 중국몽, 한국과 북한의 이야기
철학 전공인데 역사학, 그중 중국사에 천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역사는 인간의 본성과 삶의 현실에 관한 경험적 탐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중국'을 빼고서는 이 세계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국사에 본격 관심을 가지게 됐고 언어장벽을 넘기 위해서 한자, 중국어를 공부했습니다. 고려대 철학과 재학 시절 같은 문과대학에 한문학과, 중어중문학과도 있었습니다. 해당 학과 과목을 두루 수강했죠. 광의(廣義)의 중국학 학습 여건은 좋았던 셈입니다. 1990년대 하얼빈, 베이징 등에서 연수했고요.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사에 천착하게 됐습니다."
‘슬픈 중국' 시리즈를 연재 중인데 '변방의 중국몽'이라고 한국 이야기도 다루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슬픈 중국' 1~3부작에서 '중국'은 현대 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칭합니다. 현재 연재를 이어가는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에서 '중국'은 중화 문명권을 지칭합니다. 저는 중화 문화권에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속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심 문명권 변방에 생겨난 변종 문화권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슬픈 중국'이란 제목을 유지하고서 조선조에서 북한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또 북한에 동조하는 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송재윤 교수는 조선시대 군주와 사대부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쓴 '변방의 중국몽'에는 다음 구절이 나온다.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은 명(明)을 흠모하고 존경하고 숭배했다. 열강에 휩싸여 조선이 망국의 길로 치달을 때까지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의 숭명(崇明) 의식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고종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세워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했음에도 퇴위하는 1907년까지 대보단(大報壇)에서 명 황제들에 대한 제사를 이어갔다."
중국인들은 북한을 가리켜 '동북 4성의 하나'라고 하더군요.
"북한은 명목상 독립국가이지만 오늘날 실제 수출입의 9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대중국 의존도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중국이 없으면 북한은 연명할 수 없습니다. 북한은 중국의, 중국에 의한, 중국을 위한, 반미의 최전선이자 항미(抗美) 전초기지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중국에 북한은 순망치한(脣亡齒寒) 이상의 관계라고 봅니다."
송재윤 교수는 중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북한의 베트남화'라고도 했다.
"북한이 베트남의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채택하고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편입된다면 중국은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대륙 문명권을 이탈해 해양 문명권으로 가는 것인데 중국은 이를 방치할 수 없겠죠.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거시적 관점에서 슬픈 중국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1억1300만 명 타격
중국 근현대사를 주로 다루는데 '인민의 삶' 관점에서 마지막 봉건제국 청(淸), 1912년 성립한 중화민국, 현대 중국을 통치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을 비교한다면요.
"‘강건성세(康乾盛世)'라 칭하는 청 전성기를 맞이해 인구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1800년 무렵 인구가 4억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되죠. 그 결과 경작 토지는 부족하고 인구는 늘어서 다수가 빈곤의 늪에 빠졌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결과 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했죠. 민국(民國)은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 국가체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다 1931년 9·18 사변, 1937년 중일전쟁 등 일본 침략 전쟁을 겪었고요. 그 시절 내부적으로는 제1·2차 국공내전이 있었습니다. 이 속에서 인민의 고통은 가중됐습니다. 최근 학계에서 밝히고 있지만, 1930~40년대 국민당이 통치하던 민국 시대는 1950년대 중화인민공화국보다 훨씬 개방되고 자유로운 시대였습니다. 여전히 빈곤이 만연했지만, 부를 추구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는 보장됐습니다. 외래 사상을 자유롭게 탐구하는 학문적 자유도 있었습니다. 전체 중국 역사를 통틀어 초기 중화인민공화국처럼 사적 소유를 제한한 시기는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1958년부터 전국에 7만 개 이상의 인민공사(人民公社)가 세워졌습니다. 2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 넘는 농민이 군사 조직과 유사한 대규모 집단농장에 배치됐습니다. 그 결과 인민들은 밤낮으로 중노동에 시달렸지만 경제적 파산 지경에 이르렀죠. 대약진(大躍進)은 대역진(大逆進)의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 여파로 수천만 명이 아사(餓死)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고유의 문화·전통을 파괴하고 수백만 인명을 살상한 문화대혁명은 말할 것도 없고요."
6·4 톈안먼 사건 유혈 진압 원죄가 있지만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한 덩샤오핑의 업적을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중국 인구의 절대다수를 점하는 농민 생활 수준이 결정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개혁·개방 실시 이후입니다. 그 이전에는 빈곤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죠. 절대다수 인민을 '농노(農奴)화' 했기 때문입니다. 마오쩌둥 집권기(1949~1976)는 집단 생산에 기반한 경제발전이 기조였습니다. 사회주의 관념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들이 강하게 눌렀기 때문에 마오쩌둥 사망 이전까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죠. 류사오치(劉少奇),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 등은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추종파)로 몰렸고요."
주자파로 몰려 실각과 복권을 반복했던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부주석·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국무원 부총리·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지위를 공식 회복했다.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 후에는 '최고지도자' 자격으로 미국을 순방했다. 그의 별칭은 개혁·개방 설계자다.
이른바 '신중국'은 성립 후 반우파 투쟁,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항일전쟁 기간보다 더 많은 인명 손실이 발생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대약진운동은 완벽히 실패한 것입니다. 적게는 3000만 명, 많게는 4500만 명, 미출생 인구까지 합산하면 7000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중국 대기근을 다룬 '묘비(墓碑)', 문화대혁명을 다룬 '천지번복(天地翻覆)' 등을 쓴 저널리스트 양지성(楊繼繩) 등도 주장하죠. 어떤 사회구조를 급격하게 변동시키려 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봅니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 이런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더 무서운 것이고요. 1978년 중국 정부 발표에 따르면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1억1300만 명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미국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도 없다
1969년생인 송재윤 교수는 이른바 '86세대'의 막내뻘이다. 고(故) 리영희 교수의 그늘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다. 리영희 교수는 '8억인과의 대화' 등의 저서에서 마오쩌둥, 문화대혁명을 미화해 비판받기도 했다.
대학 시절 고 리영희 교수의 저작들을 접했을 듯합니다만.
송재윤 교수는 "리영희 교수 책을 읽기는 했으나 감명은 없었다"고 전제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도 '우상과 이성' 등 일련의 저작을 읽었죠. 당시만 해도 '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리영희 교수가 주요 언론사 국제부 기자로 일했다는 사실입니다. 1960~70년대 한국 언론의 중국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니 상당히 정확한 시각으로 보도했습니다. 서구나 일본을 거쳐온 외신이었지만 실상을 왜곡하지 않았어요."
리영희 교수는 '8억인과의 대화'에서 문화대혁명기 중국이 미국보다 나은 사회라고 했어요.
"중국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던 시기입니다. 리영희 교수는 이를 교묘히 파고든 것이고요. 서구 지성인 중에서도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오류를 범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실증적 방법으로 중국을 비판하며 '진실'을 찾은 학자도 적지 않고요. 리영희 교수는 서구, 일본에서 출간된 좌편향 지식인의 글을 편향적으로 흡수해서 편향적으로 한국 사회에 제공했습니다. 인류 보편 상식과 동떨어진 '특수한 중화 문명' 옹호 논리를 개발한 것이죠."
송재윤 교수는 '리영희식 논리'가 더 당혹스러운 것은 문화대혁명 이후에 보여준 그의 태도라고도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리영희를 함께 읽다'라는 대담집에서 사회학자 김동춘 교수가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변화했다. 어떻게 생각하나?'고 물어요. 리영희 교수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는 관심이 없어졌다'고 답하죠. 공산혁명기 중국에만 관심이 있고 그 이후에는 관심이 없어졌다는 것은 현실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잖아요. 리영희 교수는 저널리스트 출신 연구자이잖아요. 현실에 관심 없으면서 왜 저널리스트가 됐죠? 제 관점에서 그는 '비현실적 염세주의자'입니다. 중국에 대한 판타지를 창조하고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거예요."
지난날 반미(反美)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오늘날 친중(親中)화됐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반미와 친중은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좌파 지식인들은 일반적으로 일제 패망 후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국이 이승만 정권과 결탁해 분단을 고착화했다고 생각합니다."
송재윤 교수는 일각의 시각에는 반론을 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해양 문명권에 속하게 된 대한민국의 번영에 미국이 기여했다는 취지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이식한 미국의 공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미국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도 없는 것이죠. 일부 반미주의자들은 '미국이 분단을 영속화했다' '분단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6·25전쟁도 '김일성의 통일전쟁'으로 정당화될 수 있겠죠."
반미주의자들이 구소련의 '대체제'로서 중국을 택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동의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동서 냉전 체제하에서 소련과 대결했습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반미주의자들은 침묵했습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의 급부상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식으로 사고하는 것이죠. 한국은 지난날 중화 문명권에 속했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반미를 내세우며 중국과 결합을 주장합니다. 시진핑 체제 들어 '중국몽(中國夢)'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중국몽이 뭐냐?'고 질문하면 돌아오는 답이 '중화제국의 위대한 부흥' 정도에 그치는 형편이죠. 중국몽이 인류 발전에 어떤 의미가 있죠?"
중국은 국제사회 이끌기엔 아직 멀었다
‘중국몽'의 한계는 무엇이라 보나요.
"소프트파워 측면에서 지난 19세기 대영제국이 제시한 '세계 자본주의'에 비춰봐도 중국몽은 보편적이지 못합니다. '중화 특수주의' '중화 문명 예외주의' '중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죠. 중국은 국제사회를 이끌기엔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 내 친중주의를 비판하는 근거이고요."
송재윤 교수는 친중주의의 원류를 조선시대에서 찾기도 했다.
"조선은 명을 숭배했습니다. 사대부들은 유가적 관점에서 이상화된 중국만 바라보고 맹신했던 것이죠. 당시 명의 현실을 알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사대부들의 관념 속 중국은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였던 셈입니다. 이상화된 중국, 그래서 저는 슬픈 중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고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중국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고자 합니다."
한 전직 대통령이 한국도 중국몽과 함께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한국 대통령이 중국에 저자세로 임하니 중국은 환대했습니까? 오히려 짓밟혔죠. 한국이 왜 중국몽에 동참해야 하나요? 중국 현대사에 대한 몰이해, 중화 문명에 대한 환상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외교·안보 정책 책임자들은 중국 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고 보고요. 중립적·객관적 언어를 사용해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원수가 중국에 저자세를 취하는 것은 국가정체성을 해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변방의 중국몽'을 주제로 한 대화는 한반도와 더불어 또 다른 변방이라 할 수 있는 대만, 홍콩 문제로 이어졌다. 중국은 일국양제(一國兩制)를 내세워 홍콩(1997), 마카오(1999)의 주권을 반환받았고 '마지막 퍼즐' 대만을 상대로 통일전선 공작을 전개하고 있다.
‘홍콩의 오늘은 대만의 내일이다'라고 합니다. 대만인의 불안을 반영한 말이라 봅니다.
"중국이 홍콩 문제를 잘못 처리했습니다. 홍콩의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국제적 신뢰를 상실했습니다. 덩샤오핑은 일국양제를 주창했죠. 1997년 홍콩 반환 시 2047년까지 50년간 홍콩의 제한적 자치를 보장한다고 약속했습니다. 덩샤오핑은 미래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서로 다른 두 체제는 결국 수렴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 세계에 중국 특유의 조화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시진핑은 이를 깨뜨렸고요."
그는 홍콩 사례가 대만에도 심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일국양제는 대만 통일을 두고 고안한 체제입니다. 홍콩, 마카오에 우선 적용한 것이고요. 베이징이 반환 시 약속을 어기고 홍콩의 민주·자유를 파괴했는데 한국 이상으로 자유화·민주화된 대만이 중국 지배하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어렵다고 봅니다."
‘중국' '중국사' 연구를 한국 현실에 투영해 분석하던 송재윤 교수는 다음을 강조하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인종주의 관점에서 중국인을 혐오하거나 미개하다고 비하하는 것은 나쁜 태도입니다. 그들도 같은 '사람'이니까요. 중국공산당과 인민은 분리해서 접근해야 합니다. 중국 인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가지고 있어야 하고요. 저는 중국공산당 중심으로 중국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늘 주장합니다. 국내 유명 대학의 한 중국 연구자는 '엘리트 중심의 중국공산당 통치 시스템이 완벽하다. 절대 안 무너진다'고 주장하기도 하던데 이런 시각에서 중국을 분석하니 예측이 엇나간다고 봅니다. 민주주의 체제가 겉보기에 허약해 보여도 훨씬 유연하고 강한 체제입니다. 중국의 민주화·자유화를 위해 노력하는 '대륙의 자유인들'을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창근 에포크타임스코리아 국내뉴스 에디터 caesar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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