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편린들이 모여 보편적 역사가 된다[책과 삶]
이동해 지음 | 푸른역사 | 268쪽 | 1만7900원
“1935년 5월21일에 태어났어. 충청남도 아산군 영인면 신운리 210번지에서. (중략) 양반 가문이었지. 옛날에 양반 가문은 고깔 같은 거 이렇게 쓰고, 긴 담뱃대 가지고 깨끗이 입고 그렇게 생활을 했잖아. 할아버지가 그런 양반이었어. 부유하니까 남들이 많이 인정을 했고, 또 남을 도울 줄도 알고 하니까 남들이 우러러 보고 마을에서 인식이 아주 좋았어.”
2016년 7월13일, 학부 사학과 2학년 이동해는 휴대폰 녹음기를 켜고 외할아버지 허홍무와 마주앉았다. “이름 모를 누군가도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미시사, 경험한 것 자체도 사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구술사” 개념을 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녹취를 정리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주관적 경험담을 당대의 보편적인 역사적 맥락 안에 위치시키는 건 더욱 난망한 일이었다. 대학원에서 사료를 찾고 분석하는 방법을 충분히 익힌 뒤에야 작업을 재개할 자신감이 생겼다. 호적부, 국민학교 생활기록부, 군이력카드 등 각종 서류를 찾아내고 관련 문헌들을 파고들었다. 1990년대생 손자가 1930년대생 외할아버지의 삶과 그 삶을 요동치게 만든 현대사의 커다란 흐름을 복원한 <단 한 사람의 한국 현대사>는 이렇게 탄생했다.
책이 다루는 시기는 허홍무가 태어난 1935년부터 결혼 직후인 1959년까지다. 일제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난 시기다. 그 이후 시기를 다루지 말았으면 하는 다른 가족들의 바람도 고려했다.
허홍무는 머슴을 셋이나 부리는 부유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허홍무의 아버지 허용은 그 시절에 기타와 바이올린을 갖고 있었다. 허홍무는 5세 무렵 찍은 사진이 있을 정도다. 이 재력은 허홍무의 할아버지 허벽에게서 나온 것으로, 그는 지역의 중소지주이자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면협의회 협의원이었다. 허벽은 집에 세 명의 머슴을 두고 있었는데, 1930년 기준으로 조선에서 머슴을 3명 고용한 농가는 전체의 2.2%에 불과했다.
허홍무는 1940년 6월쯤 이와무라 하루시게라는 일본 이름을 갖게 된다. 총독부의 창씨개명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총독부는 1940년 이전까지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로서 법률적용이나 대우·급여에 차등”을 두기 위해 조선인이 일본풍 이름을 갖는 것을 금지했으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창씨를 강제했다.
위세 좋던 허씨 집안은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조선을 덮친 금광 열풍에 휘말려 몰락한다. 허벽은 동생 허옥이 시작한 금광사업에 거액을 투자한 상태였다. 당시 금광 개발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사망하는 일이 많았는데, 사망사고에 대한 보상금 지급 부담이 누적되면서 돈이 바닥난 것으로 추정된다. “사업으로 한순간에 망한 허벽은 그 충격으로 몸져누웠고, 그 여파는 아들 허용에게까지 미쳐 집안을 잘 돌보지 못하게 된다. 허홍무의 부잣집 도련님 생활도 끝이었다.”
허홍무는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1949년 중학교 입시를 치러 합격했으나 가세가 기운 탓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졸업해도 가난하니까 중학교에 못 가서 서당을 다녔어. (중략) <천자문>부터 <명심보감>, <소학>까지 배웠어. <명심보감>만 읽어도 한문 훤해.” 중학교 진학이 좌절된 그가 간 곳이 서당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저자에 따르면 총독부의 폐쇄령에도 불구하고 1941년까지도 서당 학생 수가 15만명을 넘었고, 해방 이후에도 “마을에 학교가 없거나 학비를 마련하기 어려운 경우에 서당에 가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 당시 북한군에 점령된 아산에서 벌어진 좌익에 의한 ‘반동분자’ 숙청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허홍무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이다. “그래서 나가보면, 창, 몽둥이, 곡괭이, 농기구, 별걸 다 가지고 쫓아가면서 도망가는 놈을 뒤에서 때려죽이는 거야.” 허홍무의 가족도 ‘반동분자’로 낙인 찍혀 그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도망을 쳐야 했다. 다만 저자는 대한청년단 같은 우익단체들도 “군경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부역자를 색출, 구금했으며 구타·살해하는 일도 빈번했다”고 밝혀둔다.
허홍무는 만 18세였던 1954년 병역대상자가 만 19세에서 만 18세로 확대된 사실을 모르고 자동차운전 기술을 배우러 서울에 왔다가 병역기피 혐의로 체포돼 논산훈련소로 끌려갔다. 강제로 끌려가 “뒤지게” 맞으며 군생활을 했지만, 군에서 만난 ‘연탄집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술김에 이웃 친구와 사돈을 맺기로 하면서 1959년 봄 다른 사람과 혼례를 올린다. “내가 우리집 장손이고 집안 뼈대가 있는데, 지금은 암만 못살아도 불효는 하면 안 된다는 게 내 신조였어. 그 바람에 결혼식을 올렸지.”
허홍무는 자신이 군복무 시절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폭동을 목격했다고 말했지만 저자가 병적증명서를 확인해보니 허홍무의 군입대 시점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도 일 년이 지난 1954년 7월이었다. 구술 생애사의 경우 당사자가 지명과 인명, 사건 등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책은 현대사 전공자인 저자가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 사료를 꼼꼼히 들여다본 덕분에 이 같은 난점들을 피해가는 동시에 허홍무라는 특정 개인의 삶을 해방과 전쟁을 겪은 세대의 보편적 경험의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책을 쓰는 과정은 서로에 대한 가족들의 이해가 높아진 ‘치유의 과정’이기도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가 생길 때면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새로 발굴한 자료와 함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했다. (중략) ‘아, 그래서 그랬구나.’ 고달픈 어린 시절을 보내며 마음속 응어리가 진 자식들은 어느새 허홍무를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자신들의 생각과 경험도 공유하기 시작하고, 허홍무도 한두 마디씩 거들며 소통의 장이 펼쳐졌다. 구술사가 가진 치유의 힘을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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