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코리아게이트...박정희는 왜 美에 ‘불법 로비’ 총력전 폈나
전 CIA 분석관 박사학위 논문 입수
수미 테리 “왜 대만·이스라엘처럼 로비 못할까?”
공공외교·대미 로비 역량 이대론 안돼
수미 테리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분석관의 박사 논문을 입수했습니다. 그는 지난달 미국을 상대로 한국 정부를 불법 대리한 혐의로 미 수사당국에 기소됐습니다.
한미 외교가에 미친 파장이 작지 않았는데요. 미 당국의 기소 의도에 대한 의문뿐 아니라 수미 테리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도 컸습니다.
글을 읽어보면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격이나 세계관 등이 묻어납니다. 글은 또하나의 지문(指紋)입니다. ‘지적 지문’입니다.
형사가 사건 현장에서 지문을 찾듯 저는 알려지지 않았던 수미 테리의 ‘지문’을 지난 한달간 찾아나섰습니다. 다행히 구했습니다. 그가 미 플레처 스쿨에서 쓴 박사 학위 논문 ‘박정희의 한국 1961~1979:정치적 리더십과 국정운영에 대한 연구’라는 ‘지문’입니다.
이 논문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고 플레처 스쿨이 소속된 미 보스턴 터프츠대 도서관에만 소장돼 있었습니다. 제가 현재 방문연구원으로 있는 워싱턴 D.C. 조지타운대 도서관을 통해 상호대차(Interlibrary Loan) 신청을 해도 거부를 하는 등 3주가 지나도록 받지 못하다 다른 채널을 통해 며칠 전 논문 사본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논문 확보에 도움을 주신 외설 구독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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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영문 자료 너무 없더라”
320쪽이 넘는 논문은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직전부터 암살로 그의 정권이 막을 내리는 시기까지를 담고 있습니다.
수미 테리는 2001년 5월 펴낸 논문 서문에서 “한국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연구와 기록이 많지만 영문으로는 찾아보기 힘들다”면서 박정희 대통령를 박사 학위 논문 주제로 삼은 이유를 밝혔습니다. 사실 지금도 역대 한국 지도자에 대한 영문 자료가 부족한 데 23년 전은 오죽했을까 싶었습니다.
논문은 사실관계 위주로 박정희 정권을 정리하는 식으로 서술됐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해 권위주의적 통치를 펼쳤다며 ‘독재자’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집권 정당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박정희는 한 세대만에 대한민국을 누더기에서 부국으로 탈바꿈한 지도자”로 평가된다고 썼습니다.
논문은 박정희 국정운영의 명과 암을 부단히 오가며 조명합니다. 수미 테리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원 조국인 한국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박정희에 대해 새 조국인 미국에 자신의 주관적 평가는 유보하고, 있는 그대로 알리기 위해 노력한 것 같습니다.
◆수미 테리가 본 ‘코리아 게이트’
수미 테리가 불법 로비 혐의로 기소되어서인지 그의 논문에 ‘코리아 게이트(Korea Gate)’가 꽤 상세히 기술된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논문의 마지막 장인 4장의 4개 항목 가운데 ‘코리아 게이트’라는 제목의 제2 항목은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포스트는 ‘서울이 미 인사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제공했다’고 보도했다”는 기사를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 통치의 주력 수단이었던 KCIA(중앙정보부·중정)의 활동상을 분석하는 맥락에서입니다.
‘코리아 게이트’는 이번 수미 테리 사건이 터지면서 여러 언론에 소환돼 비교됐습니다. 많은 신문과 방송이 ‘코리아 게이트’에 대해 “1970년대 중정이 재미 한국인 사업가 박동선씨를 통해 미 의회 등에 불법 로비하며 영향을 미치려 한 사건’이라고 소개를 했는데요.
막상 기사를 보면 왜 중정이 그때 그랬는지는 빠져있습니다. 지금도 낯설고 논란이 되는 대미 로비의 활동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니 로비를 할 수밖에 없던 연유보다는 로비의 불법성과 그 파장에 더 주목이 쏠렸을 것입니다.
수미 테리도 논문에서 로비의 방법이 부적절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박정희 정권이 21세기 한국과 비교했을 때 국력이 미약하기 그지 없는 상황에서도 대미 로비 총력전을 편 배경에 대해 살폈습니다.
◆朴, 주한미군 철수 막기 위해 로비 총력전
논문은 ‘코리아 게이트’의 배경에는 1970년 전후 극심한 안보 불안 상황이 있었다고 분석했습니다. 북한은 1960년대 베트남전이 터져 미군의 한반도 집중력이 떨어지고 한국군이 참전을 하자 제2의 6·25전쟁을 방불케하는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1·21 청와대 기습 사건, 푸에블로호 납북, 울진·삼척 무장 공비 사건, 미 EC-121 정찰기 격추 등이 잇따랐습니다.
이런 가운데 ‘닉슨 독트린’이 전격 발표됐습니다. 1969년 7월 25일 닉슨 미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포함해 해외 주둔 미군의 규모를 줄이고 동맹국이 방위 책임을 더 많이 부담하도록 하겠다는 대외 전략의 변화를 선포한 것입니다.
반대 여론에도 베트남전 파병이란 결단까지 내리고 당시 린든 존슨 미 대통령으로부터 감사 편지까지 받았던 박정희 정권으로선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지요. 박정희 집권 후 한국의 경제가 매년 두 자릿수 성장을 했다고 해도 당시만 해도 북한은 경제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우위에 있었습니다.
닉슨은 베트남전으로 국민적 지지를 잃는 바람에 대선 재선 도전조차 할 수 없었던 린든을 타산지석 삼아 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을 축소하는 독트린을 추진했습니다.
논문에 따르면, 닉슨은 1971년 3월 주한미군 2만명 가량을 철수시켰습니다. 닉슨은 1973년 주한미군 4만명 가량을 추가로 철수할 방안도 검토했습니다.
수미 테리는 논문에서 “박정희는 주한미군 병력 감축과 미국의 원조 축소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 안보의 취약성을 우려했다”면서 “이에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 원조에 관한 미 의회 여론을 흔들기 위해 미 의원을 대상으로 서툰 영향력 매수 계획을 중정에 지시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닉슨 독트린과 더불어 1971년 4월에는 또 다른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미국과 중국의 “핑퐁 외교”였다”면서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면서 닉슨 행정부는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과 같은 예상치 못한 곳에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이어 “1971년 7월 중순 헨리 키신저의 중국 방문 이후, 닉슨이 직접 1972년 2월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서울(박정희 정권)은 크게 놀랐다”면서 “박정희 정권은 이 소식에 대해 즉각적으로 공식 논평을 내놓지 않았는데, 새로운 상황이 한국에 미칠 영향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성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북한의 위협 증가, 국내 반정부 여론 고조, 닉슨 독트린 등으로 박정희 정부가 안보 사면초가 처지에 빠졌기에 자구책으로 대미 불법 로비까지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논문은 1974년, 1975년 각각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된 북한 땅굴 사건도 거론했습니다.
◆난리는 났지만 로비의 목적은 달성
‘코리아 게이트’는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 김형욱 전 중정 부장의 폭로로 더 불 붙으며 약 3년간 미 주요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내상을 입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지미 카터 행정부는 전임 닉슨 행정부보다 한술 더 떠서 주한미군 ‘지상군’의 완전 철수를 못 박았습니다.
논문은 “카터는 취임 직후인 1977년 1월 한국에서 전투 병력을 철수하겠다는 의지를 재차 강조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1977년 3월 9일, 백악관은 주한 미 지상군을 4~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고 했습니다.
논문이 인용한 지미 카터 도서관, 정부 자료에 따르면, 70년대 후반 주한미군은 서울과 비무장지대 사이의 제2보병사단과 F-4 팬텀을 보유한 제3전술전투비행단, 공군 및 통신부대 등으로 구성됐습니다. 병력은 총 4만2000여 규모였습니다.
카터는 여기에서 미 2사단 지상군 3만3000명은 1982년까지 철수하고, 공군 병력 7000명과 통신 병참 및 정보 병력 약 2000명만 남겨 놓기로 계획했습니다. 카터는 “한반도 유사시 미군 자동 개입 원칙도 유지해선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아시아에서의 지상전, 특히 한국에서 미 지상군의 전략적 가치가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합니다. 닉슨은 공화당, 카터는 민주당 대통령입니다. 베트남전 이후 소속 정당 불문하고 연이은 두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빼는 게 미 국익에 맞다고 판단했다는 건 지금 한국의 전략가치 등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우리 정부가 곱씹어볼 만한 사례입니다.
카터 계획에 따라 약 3600명의 병력이 1차로 철수까지 했는데요. 이 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백악관의 계획에 미 군부와 의회가 제동을 걸고 나선 것입니다. 논문은 “존 K. 싱글러브(John K. Singlaub) 유엔사 참모장은 공개적으로 카터 결정에 노골적으로 비판했다”며 “언론 인터뷰에서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의 침략을 불러올 수 있다’고 발언했다”고 했습니다.
미 상원도 주한미군 철수 결의안 통과를 거부했다며 “상원 다수는 주한미군 철수가 시기상조라고 봤다”고 논문은 전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대미 로비는 큰 논란을 일으켰지만 결과적으로는 본 목적인 주한미군 지상군 주둔 등 미국의 군사 지원 및 협력 유지를 관철하는데 성공한 셈입니다.
◆”왜 한국은 대미 로비 대만·이스라엘처럼 못하나”
320쪽이 넘는 방대한 논문을 읽으며 배운 것도 많았지만, 한국에선 익히 평가된 것들이 다수 누락돼 좀 부실하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예컨대,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이 되지 않았고, 한일 기본 조약이나 남북 공동 성명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에 비해 의미를 크게 두지 않았습니다.
수미 테리는 지난달 말 구속 체포됐다가 현재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상태인데요. 워싱턴 정가에서 유명한 변호사를 고용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간 그가 대북 전문가로서 한 기고 등 각종 활동이 한국 정부의 조종을 받아 대리한 것이 아닌 전문가로서의 정당한 활동이었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고요.
그는 논문에서 “다른 국가들, 특히 대만과 이스라엘은 매우 성공적인 대미 로비 활동을 펼쳤는데, 왜 한국은 안 될까?”라며 1970년대 한국 정부의 대미 로비의 방법이 부적절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대미 로비, 달리 말하면 국제사회, 특히 최강국인 미국을 무대로한 우리의 국익 챙기기 활동이 여전히 미흡하구나 싶었습니다.
그걸 외국 대리인 등록법(FARA) 위반으로 기소된 전직 CIA 분석관의 박사 논문으로 새삼 확인하게 된 것도 묘했습니다.
수미 테리 사건을 계기로 우리의 공공외교, 영향력 공작, 대미 로비 방법에 대해 재점검을 하고 역량을 강화할 방안을 강구하는 것도 필요할 듯합니다.
※추신
수미 테리(Terry)의 성은 왜 테리일까요? 그가 미국으로 귀화하기 전 한국 이름은 ‘김수미’였습니다. 혹자는 수미 테리의 전 남편의 성이 ‘테리’였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팩트 체크를 해보니 아니었습니다. 수미 테리는 ‘테리’라는 성을 가진 남편을 둔 적이 없었습니다. 현 남편은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인 맥스 부트(Max Boot)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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