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이 42평 집·수영장·레스토랑으로 변했다
영화 '기생충'서 영감 얻은 몰입형 공간설치…"물리적인 경험에 대한 전시"
북유럽 작가 듀오 엘름그린&드라그셋,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개인전
영화 '기생충'서 영감 얻은 몰입형 공간설치…"물리적인 경험에 대한 전시"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기자 = 거실과 주방, 침실, 화장실이 있는 140㎡(약 42평)의 세련된 집. 건축 스케치와 모형이 있고 책장엔 건축 책이 가득한 것으로 봐서 어느 건축가의 집인 것 같다. 그렇지만 큰 집에는 한 소년만 있다. 소년은 창에 입김을 불어 'I'(나)라는 글자를 쓰고 있다. 시든 꽃다발이 놓인 현관의 거울에는 '다시는 보지 말자'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으스스한 분위기가 도는 이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뭔가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이 집은 덴마크 출신의 마이클 엘름그린과 노르웨이 출신의 잉가 드라그셋으로 구성된 작가 듀오 엘름그린앤(&)드라그셋이 서울 용산의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 지은 집이다. 전시장을 공항이나 기차역, 병동 등으로 전환하는 공간 작업으로 유명한 엘름그린&드라그셋은 9월 3일 개막하는 개인전 '공간들'(Spaces)에서는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을 수영장과 집, 레스토랑, 주방, 작가 아틀리에로 변신시켰다.
1995년부터 함께 활동하고 있는 두 사람은 초기에는 퍼포먼스와 조각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건축적인 요소를 도입하며 작업 세계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2005년 미국 텍사스 사막 지역인 마파에 '가짜' 프라다 매장을 세운 '프라다 마파' 작업으로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들은 화이트 큐브 전시장을 실생활 속 공간처럼 전환하며 공간에 대한 독창적인 시각을 선보여왔다.
개막에 앞서 29일 전시장에서 만난 엘름그린은 이번 작업에 대해 "우리에게 미술관은 공간 그 자체가 캔버스이자 재료이며 작업의 과정 그 자체"라면서 "조각 작업도, 벽을 활용한 작업도, 오브제 작업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작품이 공간을 변형하는 설치품 전체"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면적과 볼륨이 큰 공간이라 벽에 붙은 작은 엽서처럼 시야에서 사라지는 작업을 하고 싶진 않았고 공간을 잘 활용하고 싶어 5개의 몰입형 설치물을 배치했다"고 덧붙였다.
몰입형 설치 작업은 불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집이 있는 전시장을 지나면 대형 수영장이 나타난다. 수영장은 작가 작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다. 전시를 위해 바닥을 1.2m 정도 높여 물이 빠진 수영장을 실감 나게 구현했다. 수영장 안과 밖에는 걸터앉아 있는 소년, 가상현실(VR) 안경을 쓴 소년, 창밖을 내다보는 소년 조각상들이 설치돼 또 다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다음 장소는 레스토랑이다. 뭔가 비싼 메뉴를 팔 것 같은 분위기의 식당에는 한 여성이 앉아서 영상 통화를 하고 있다. 실제 인물처럼 정교하게 재현된 여성 조각이 들여다보는 휴대전화 화면에서는 한 남성이 뭔가를 말하고 있다.
엘름그린은 집 작업에 대해서는 "공포 영화의 세트장 같기도 하고,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에 나올 법한 공간처럼 보이는 이 작업은 영화 '기생충'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며 "기생충에서는 집이라는 공간 자체가 영화의 내러티브, 이야기를 촉발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작가들은 관객들에게 공간을 물리적으로 경험하면서 해당 공간의 방문객이 되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보라고 권했다.
엘름그린은 "미술관 공간을 미술관이라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해서 다른 방식으로 감상하도록 하고 싶다"면서 "집 설치물에서는 2차원이라 들어갈 수 없는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도, 보통은 해서는 안 되는 남의 집을 들여다보는 느낌도 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전시는 물리적인 경험, 몸으로 경험하는 것, 3차원 공간 안에서 경험하는 것, 그리고 이 공간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또한 경험하는 것에 대한 전시"라고 강조했다.
엘름그린은 또 불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설치 작업에 대해 "처음 봤을 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피드를 넘기면서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마주하듯이 매우 다양한 이미지처럼 보이겠지만 가까이 가서 세부(디테일)를 보면 볼수록 내러티브(이야기) 상에서 연결되는 지점들을 찾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30여년 가까이 함께하는 사이 작가들을 둘러싼 작업 환경도, 기술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신기술을 이용하기보다는 지금과 같은 '올드스쿨 스타일'(전통적인 예전 방식)의 공간 설치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드라그셋은 "인공지능(AI) 같은 신기술을 작업 안에서는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신기술이 일상에, 사회에, 심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는 것이고 설치라는 매체를 통해 그것을 다루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치 화가들이 화가이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처럼 설치 작업을 하는 것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다만 우리가 다루는 주제가 계속해서 시의성이 있길 바랄 뿐"이라고 덧붙였다.
전시는 내년 2월 23일까지. 개막일에 작가가 직접 이번 전시와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티스트 토크'가 미술관 2층 대강당에서 진행된다. 유료 관람.
zitron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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