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 런, 명상 런, 런 트립…‘힙한’ 달리기의 진화 [ESC]
비대면 야외 운동 러닝…코로나 팬데믹 때 크게 증가, 500만명 추산
‘부상 없이 뛰는 법’ 배우고, 우울증 퇴치, 여행지 문화 흡수 효능도
“집안 화목해져” “삶이 정상으로 돼가” “여행 도시 사용하는 기분”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계적인 작가가 된 데엔 ‘달리기’(러닝)가 한몫을 했다. 그는 장편소설 ‘양을 쫓는 모험’을 발표한 1982년 이후 줄곧 ‘달리고’ 있다. 건강 유지를 위해 고른 게 ‘달리기’였지만, 그가 정작 이를 통해 얻은 것은 자신을 응시하게 한 시간이었다. 소설의 자양분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 몇년간 국내에도 수많은 ‘하루키’들이 전국을 달리고 있다. 아침나절 한강 둔치나 남산 순환로에서 ‘러닝 크루’(달리기 모임)를 목격하는 일은 이제 흔하다. 서울마라톤 등 국내 유명 달리기 대회는 ‘임영웅 티케팅’에 버금가는 ‘광클릭’을 해도 참가 신청이 어려울 지경이다. 스포츠용품 브랜드 뉴발란스가 지난 7일 앱을 통해 진행한 10㎞ 달리기 행사 ‘2024 런 유어 웨이’ 참가 신청은 동시 접속자가 3만명이 몰려 3분 만에 조기 마감됐다. 지난 5일 출시한 뉴발란스 러닝화 ‘퓨어셀 에스시(SC) 트레이너 브이(v)3’는 나온 지 하루 만에 완판됐다.
“정말 신기해요. 덜 지치고 숨이 안 차요.”
러닝 인구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폭발적으로 늘었다. 비대면 운동인데다가 우울한 기분을 털어낼 수 있는 야외운동이기 때문. 여기에 최근 2~3년 사이 2030세대까지 가세하면서 러닝은 ‘기부 런’(달리기를 통한 기부), ‘런 트립’(달리기+여행), ‘헬시 플레저’(건강과 즐거움을 함께 추구) 같은 신조어가 탄생할 정도로 ‘힙한 문화’가 됐다. 이러다 보니 최근 ‘러닝 민폐’ 논란도 일었지만, 이는 인기의 또 다른 얼굴로 성숙한 러닝 문화 구축을 위한 과정으로 보는 이가 많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스포츠용품 업계는 국내 러닝 인구를 5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한다. 달리는 이가 늘수록 러닝 문화는 조금씩 진화하고 있다.
지난 20일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신촌캠퍼스 대운동장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가로등이 환히 비추는 트랙엔 무리 지어 달리는 이가 많았다. 그들 중엔 서대문구 홍제동 달리기 모임인 ‘비알알시’(BRRC) 회원 21명도 있었다. 직장인 염민규(38)씨가 2007년에 결성한 서대문구 대표 러닝 크루다. 줄지어 달리는 그들 모습엔 폭염도 어쩌지 못하는 열정이 스며 있었다. “팔치기(팔 동작) 해요, 팔치기! 앞뒤로 스윙해야죠. 팔이 말려 있어요.” 두 조로 나눠 각각 10바퀴를 돈 회원들 옆에서 뭔가를 주문하는 이가 보였다. 김성하(32) 코치다. 다른 러닝 크루와는 다른 풍광이다. 김 코치는 인천광역시 소속으로 대한육상연맹에 등록된 마라톤 선수다. 지난 5월에 열린 ‘제24회 인천 국제하프마라톤대회’ 남자 10㎞ 부문 우승자다. “달리기를 오래 하려면 자세가 중요합니다. 중급자분들이라서 제 말을 잘 이해하시죠.” 이날 회원들은 운동장을 25바퀴 돌았다.
러닝 문화가 진화하면서 달리기에서 즐거움을 찾는 ‘펀 런’으로 시작했다가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달리는 ‘학습 런’ 도전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각종 대회 완주나 기록 경신을 목표로 하는 이가 다수다. 교육자로 나선 이들 대부분은 김 코치처럼 엘리트 체육교육을 받은 육상 선수들이다. 비용은 얼마나 들까. ‘비알알시’ 회원이 낸 교육비는 없다. 지난 6월 초 서대문구보건소는 지역 주민의 건강 증진을 위해 ‘러너를 위한 야간 달리기’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구민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프로그램이다. 강사로는 대한육상연맹에 등록된 선수이자 달리기 교육 스타트업 ‘고나’(GONA)의 양세윤 대표와 김성하 코치가 나섰다. 보건소 최혜민 주무관은 “주민 호응이 폭발적이어서 내년 상반기에도 모집할 예정”이라고 한다. 서대문구보건소처럼 달리기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구청이나 지자체가 늘고 있다. 거주지 구청이나 보건소 누리집 에스엔에스(SNS) 계정을 자주 확인하면 의외로 달리기 ‘꿀 교육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날 프로그램에 참여한 양세정(44)씨는 달리기 예찬론자다. “집안이 화목해졌어요. 잠도 잘 오고 스트레스도 풀리다 보니 가족들 대하는 게 부드러워졌죠. 술도 안 먹게 되니, 그것도 좋아합니다.” 20년 남짓 근무한 대기업을 그만두고 사업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로 자신도 모르게 가족에게 짜증을 내곤 했던 그다. 그가 얻은 소득은 이뿐만이 아니다. 20살, 18살인 두 자녀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됐다. “10㎞, 20㎞, 30㎞ 뛰고 들어왔다고 하면 애들이 ‘대단하다’며 좋아해줬죠. 메달이 부럽다고도 해요.” 그는 뿌듯했다. 오는 10월에 열리는 춘천마라톤대회 풀코스(42.195㎞)에 난생처음 도전할 계획이다. “(교육받기 전과) 완전 달라요. 정말 신기해요. 덜 지치고 숨이 안 차요. 20바퀴 넘게 뛰었는데 말이죠. 부상 없이 뛰는 법을 배웠죠. 큰 도움이 됐어요.”
달릴 수 있는 근육 먼저 만들어야
규모가 큰 대회 준비생들에게만 전문 교육이 필요할까. 양세윤 대표는 “부상을 안 당하기 위해선 교육이 꼭 필요하다”며 “달릴 수 있는 몸을 먼저 만든 후 뛰어야 한다”고 한다. “달리려면 근육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된 상태에서 뛰면 평상시 자세로 뛰게 되죠. 그러면 자세는 더 안 좋아지고 부상 입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똑같은 페이스(1㎞를 달리는 시간)로 똑같은 거리를 계속 뛰게 하는 게 달리기의 목표죠.” 초급자는 걷기부터 하라고 한다. 그는 요즘 ‘보여주기 문화’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풀코스는 2~3년은 준비해야 하는데, 일단 나가 딴 메달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위험합니다.” 고나는 다채로운 달리기 클래스를 운영한다. 최근 러너들의 전문 교육에 대한 갈증이 늘자 대한육상연맹은 지난해 8월 전 국민 대상 무료 ‘러닝 클래스’를 열었다. 오는 9월에 열리는 클래스가 3기다. 육상 선수 출신으로 스포츠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한 이가 강사다. 달리기 자세 교정과 기초체력 향상, 단계별 훈련법과 부상 방지법, 개인 기록 도전 등이 강의 내용이다. 서울, 인천 등 3곳에서 이뤄지는 클래스는 6개 반으로 각각 15명씩이다. 총 10회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 22일 모집 공고가 뜨자마자 마감될 정도로 인기이다. 연맹 주최 클래스는 점진적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교육이나 기술과 결합한 러닝 문화 이외도 진화의 종류는 다양해지고 있다. ‘러닝 플러스(+)’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러닝 요가’ ‘러닝 명상’ ‘러닝 여행’ ‘러닝 영화’ 등으로 말이다. 그중에서 명상과 결합한 달리기를 통해 ‘자신을 구한 이’가 있다.
광고대행업체이자 콘텐츠 제작사인 미남컴퍼니 이우성(44) 대표는 3년 전 6~7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지면서 상실의 아픔이 컸다. 자신이 이별을 통보했지만, 마음은 갈기갈기 찢겼다. “기부도 하는 등 열심히 착하게 산다고 살았는데, 이별 이후로 온 충격이 컸고 인간 자체에 대한 회의가 드니까 죽음마저 생각하게 됐어요.” 우울의 원인과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함부로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 그는 “더 사는 게 의미가 있나”란 생각에 아침에 눈 뜨는 게 두려웠다. 16시간이나 일어나지 못한 때도 있었다.
2010년 중반에 한국에서도 발매를 시작한 세계적인 마라톤 잡지 ‘러너스 월드’의 편집장도 맡았던 그는 서울 노원구의 러닝 크루 ‘노크’의 회원으로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을 만나서 달리는 것 자체가 너무 싫었다”고 했다. 그는 더 고립되고 검은 지옥 구덩이 같은 외로움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명상과 달리기를 병행하는 모임을 발견했다. 무엇보다 아는 이가 한명도 없다는 점에 끌렸다. 그는 ‘도시명상’ 회원이 됐다. ‘도시명상’은 요가와 철인3종을 섭렵한 임보미씨가 대표로, 명상과 결합한 달리기 모임이다. 1~2시간 달린 뒤 10~20분 명상 시간을 갖는 게 특징이다. 임 대표는 “빠른 도시에서 느린 시간을 만드는 자신만의 명상적인 취미 활동”이라고 모임의 성격을 정의했다. 기록이 목적이 아닌 달리는 발걸음 하나가 곧 명상이라고 그는 말한다. “느린 시간이 주는 영감을 통해 주체적인 삶, 사유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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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는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모르는 이들과 있으니 말을 안 해도 되는 점이 좋았고요, 주로 ‘님’으로 부르는 문화인데 지금도 누가 뭘 하는 이인지 나이조차 모릅니다.” 이우성 대표는 적당한 거리 유지가 위로가 되어 돌아왔다고 했다. 묘하게 안전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명상이 주는 몰입감도 좋았다. 그저 달리기만 해서는 얻을 수 없는 선물 같은 명상이었다. “조금씩 제 삶이 정상적으로 돼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들 덕분에 살아 있고, 살아 있으니 햇볕을 받고 달릴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마음이 들었지요.” 잊었던 달리기가 주는 평온함도 다시 찾아왔다. 우울함이 또 찾아와도 이겨낼 자신도 생겼다. 그가 당부의 말을 남겼다. “강물이 흘러가듯이 바람이 불듯이 천천히 뛰면 됩니다. 나라는 생명조차 (달리는) 풍경 안에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을 벗 삼아 내면에 침잠하는 달리기는 명상 수련과 다를 바 없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가벼운 우울증에 달리기가 도움이 된다”며 “실외 운동이다 보니, 햇볕을 맞으면서 자기만의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낼 수 있다”고 한다. 달릴 때마다 스며드는 충만감은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내고 삶의 생기를 되찾아준다.
달리기의 진화는 ‘런 트립’이란 새로운 영역도 개척했다. ‘런 트립’은 달린다는 뜻의 ‘런’과 여행을 뜻하는 ‘트립’이 합쳐진 말로, 달리면서 여행지의 문화를 흡수하는 신개념 여행법이다. 여행작가 천소현씨는 국외 취재 때마다 러닝화와 러닝 벨트를 꼭 챙긴다.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숙소 주변에 있는 공원이나 강변길을 지도에서 찾는 것이다. 취재 일정이 시작되기 전 1~2시간 일찍 일어나 공원에서 달린다. 지난해 일주일간 머문 유럽의 세 도시인 바르셀로나, 밀라노 등에서도 그는 달렸다. 3년차 러너인 그가 여행지에서 달리는 이유는 “로컬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다. “여행지는 낯선 곳인데, 그곳이 어디든 달리면 마치 그곳에서 오래 산 이가 된 것 같습니다. 마치 도시를 (나를 위해) ‘사용’하는 기분도 들죠.” 그는 ‘런 트립’의 장점을 한 가지 더 말한다. “여행의 고질적인 병인 시차 적응도 극복할 수 있는 체력이 길러집니다.” 이런 점 때문에 천 작가처럼 달리는 여행자가 많다. 이들의 사진첩에는 높은 탑이나 신비로운 정원, 울창한 도시의 그늘을 달리는 자신의 모습이 풍경처럼 담긴다.
엠제트(MZ) 세대 중심으로 ‘런 트립’의 인기가 높다. ‘런 트립’ 중심 여행 상품을 판매하는 스타트업도 생겼고, ‘런 트립’을 계획하는 러닝 크루도 늘고 있다. 국내에서만 머물지 않고 베트남 다낭 등 인기 있는 국외 여행지 ‘런 트립’도 인기다. ‘○○○과 떠나는 다낭 런 트립’ ‘후쿠오카 런 트립’ 등이 상품으로 잇따라 출시됐다. 지난해 교원투어는 ‘여행이지×엑스크루 일본 벚꽃 런 트립’을 내놨다. 2박3일간 후쿠오카 등 일본 여행지를 달리며 관광하는 여행 상품이다.
‘런 트립’의 인기는 지자체들이 관광지를 알리는 요긴한 수단으로 삼는 이유가 됐다. 지난 4월 전북 군산시는 ‘2024 군산 새만금 국제마라톤’을 앞두고 부대 행사로 ‘스포츠 힐링 런 트립’을 진행했다. 참가자들은 군산의 명소인 은파호수공원 등을 달리면서 여행지로서 군산의 매력을 새겼다. 인구 소멸 위기에 놓인 지자체들 입장에선 이보다 더 매력적인 여행 콘텐츠가 없다.
하루키는 달리기를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폭염이 가고 살랑거리는 가을바람맞이를 앞둔 지금, ‘멋진 일’이 당신 앞에 있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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