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가 고래를 꿀꺽? 기업가치 평가의 세계 [상법 개정의 함정 ③]
편의점 매대에 놓인 상품에는 가격이 붙어 있다. 인터넷 몰에서는 여러 온라인 점포를 비교해서 가장 싼 가격을 알려준다. 거래가 이뤄지려면, 가격이 정확히 표시되어야 한다.
기업은 상품을 만들어 판다. 그러나 ‘기업 자신’도 상품으로 사고팔린다. 분할·합병·주식교환 등에서다. 기업 거래에도 가격이 필요하다. 가격을 알아야 사든지 말든지 할 수 있다. 주식을 교환하려면, 해당 기업들의 가격을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A사(100주) 가격이 100만원, B사(100주)가 200만원이면, A사와 B사의 1주는 각각 1만원, 2만원이다. B사 주식 1주(2만원)의 가치는 A사 주식 2주(2만원)와 같다. 분할에서도 마찬가지다. A사(100만원)에서 B사가 분할되었다. B사는 A사의 자산 일부를 들고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B사의 기업가치가 25만원으로 평가된다면, A사는 75만원이다.
그러나 기업가치 평가는 어렵다. 중고 승용차라면 그 차량의 ‘순자산(브랜드·부품·외장재·수명 등으로 평가한 뒤 결함을 뺀)’을 따져 가격을 산정하면 된다. 중고차 업체마다 다른 가격을 부르지만 그 차이는 크지 않다. 그러나 기업가치 평가 전문가들(회계법인·로펌·금융회사·컨설팅 업체)은 관점과 이해관계에 따라 평가 방법이 다르다. 액수도 천국과 지옥을 넘나든다.
직관적으로 볼 때 회사의 가치는, 중고차와 마찬가지로 그 기업이 ‘현재 보유한 자산(부동산·공장·증권·현금·지식재산)을 돈으로 환산한 다음 부채를 뺀’ 금액(=순자산)으로 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순자산은 그 회사가 현재까지 달성한 성과다. 그러나 기업가치엔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회사가 앞으로 벌어들일 돈이다. 그 회사는 사업 영역과 투자 계획에 따라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지금 잘나가는 기업이 5년 내외에 망할 수도 있다. 그래서 회사가 앞으로 벌어들일 돈을 추정한 다음 ‘현재 시점으로 환산하면 얼마일까’ 계산해서 기업가치를 산정하는 방법도 있다(DCF, 현금흐름 할인법).
그러나 DCF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다. 관점과 이해관계에 따라 기업가치를 엉뚱하게 평가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시가총액(주식가치)으로 기업가치를 매기면 어떨까. 수많은 투자자들이 각자 전망에 따라 주식을 사고파는 집단지성(시장)의 결과가 주가다. 현재 매출과 영업이익, 순자산이 변변치 않은 기업의 주가가 오르기도 한다. ‘과대평가’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오르는 것엔 이유가 있는 법. 독점적 기술력이든 해당 산업의 전망이든, 주가 상승은 시장이 추정한 그 기업의 가치다.
한국뿐 아니라 대다수 국가의 법률과 관행에서 주가는 기업가치 평가의 기본이다. 구조개편 발표 직전의 주가(‘기준 주가’)를 ‘베이스’로 순자산·수익 규모·부채 등을 고려한다. 국내 언론들은 ‘주가 기준 기업가치 평가’를 한국(재벌들이 판치는 나라!)만의 독특한 현상으로 보도한다.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지난 7월11일 발표된 두산그룹 구조개편안 관련 논란의 핵심은 기업가치 평가다. 두산그룹의 지주회사인 ㈜두산은 원자력 등 에너지 기자재를 생산하는 에너빌리티(이하 에너빌)와 로봇 업체 로보틱스를 자회사로 갖고 있다. 에너빌이 지분율 46%로 거느린 자회사 밥캣(트랙터, 지게차 등 소형 건설장비 생산)이 이번 사태의 중심이다. ㈜두산은 밥캣을 에너빌에서 떼내어 로보틱스의 100% 자회사로 편입시킬 계획이다. 밥캣은 지난해 1조4000억원 규모 영업이익을 낸 두산그룹의 ‘캐시카우’다. 두산 측은 미래 먹거리로 육성 중이지만 투자 여력이 부족한 로보틱스와 밥캣 사이에 자금의 통로를 뚫는 한편 기술적 시너지(예컨대 자율주행 지게차)를 노리고 있다. 구조개편은 대충 3단계(1, 2단계는 시간적으로 거의 동시에 수행)로 추진된다.
1단계, 에너빌(‘원 에너빌’)을 두 회사로 인적분할한다. 하나는 원자력 등 에너지 사업을 영위하는 에너빌(존속회사, ‘후 에너빌’), 다른 하나는 비상장 ‘투자회사(신설회사)’다. 투자회사는 ‘원 에너빌’의 어떤 자산을 들고나오나? 딱 하나, ‘밥캣 지분 46%’다. 지난 1분기 말 ‘원 에너빌’의 순자산은 ‘별도 재무정보(해당 업체의 재무 상황을 자회사들과 별도로 표시)’ 기준으로 6조원. 당시 밥캣의 순자산(별도 기준)은 3조원대 초반인데, 그 46%의 가치는 1조5000억원쯤이다. ‘원 에너빌’의 순자산(6조원)에서 1조5000억원을 빼면 4조5000억원(‘후 에너빌’의 순자산)이 남는다. ‘원 에너빌’의 순자산이 4조5000억원(‘후 에너빌’, 75%)과 1조5000억원(투자회사, 25%)으로 나뉜다. 이에 따라, ‘원 에너빌’의 100주 보유자는 ‘후 에너빌’ 75주와 투자회사 25주를 갖는 셈이다.
로봇 사업이 아무리 유망하다지만…
2단계에서 로보틱스는 합병으로 ‘밥캣 46%’를 손에 넣게 된다. 로보틱스의 합병 대상이 (밥캣이 아니라) ‘밥캣 주식 46%(1조5000억원)만을 자산으로 가진 비상장 투자회사’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둘 다 상장회사인 밥캣과 로보틱스의 합병이라면 기업가치가 주가로 평가된다. 구조개편 발표 직전, 로보틱스의 주가는 8만원대 초반, 밥캣은 5만원대 초반이었다. 밥캣 8주(40만원)와 로보틱스 5주(40만원)의 가치가 같다는 의미다.
그러나 로보틱스의 실제 합병 대상은 ‘원 에너빌에서 분할된’ 비상장 투자회사다. 이 투자회사의 자산은 ‘밥캣 주식 46%(순자산 기준으로 1조5000억원, 주식가치로 환산하면 1조6000억원을 약간 웃도는 금액)’밖에 없다. 이에 따라 투자회사의 기업가치는 1조6000억원(주식 수로 나누면 1주당 1만221원)으로 산정된다. 상장회사인 로보틱스의 기준 주가는 8만114원이다. 로보틱스는 자사의 1주를 ‘원 에너빌에서 분리된 투자회사’의 8주와 바꾸는 방식으로 합병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로써 ‘밥캣 46%’는 로보틱스 밑으로 들어간다. 결과적으로, ‘원 에너빌’ 100주를 가진 주주는 인적분할과 합병 이후엔, ‘후 에너빌’ 75주와 로보틱스 3주(투자회사 25주와 교환)를 갖게 된다.
두산 측의 금융적 기교로 합병 비용이 대폭 줄었다. ‘로보틱스-밥캣 합병’이라면, 밥캣 8주에 로보틱스 5주를 지급해야 한다. 그러나 ‘로보틱스-비상장 투자회사 합병’에서는 밥캣 8주에 로보틱스 1주로 충분하다.
3단계, 로보틱스가 밥캣의 나머지 주식(54%)을 인수한다. 밥캣은 로보틱스의 100% 자회사로 전환된다(상장폐지). 주주들이 밥캣 주식을 들고 오면 로보틱스 주식과 일정한 비율로 바꿔주는 방식(포괄적 주식교환)이다. 둘 다 상장회사이므로 ‘기준시가’에 따라 기업가치를 평가한다. 밥캣의 기준 주가는 구조개편 발표 직전 시세에 따라 5만612원으로 산정되었다. 밥캣 주식 10주를 가져가면 로보틱스 6주 정도로 바꿔준다는 의미다.
에너빌과 밥캣 소수주주들의 분노는 당연하다. 주식 가치 이외의 실적에선 밥캣이 로보틱스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 로보틱스의 지난 1분기 순자산(별도 재무정보)은 4400억원에 불과하다. 투자를 많이 해서 그렇다지만 지난해 영업적자가 170억원이다. 매출 역시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나 지난해 실적은 550억원 정도다.
밥캣(별도 재무정보)의 지난해 실적은, 매출액 9조7000억원, 영업이익 1조3900억원, 순자산 3조원이다. 로봇산업이 아무리 유망하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수익을 올릴지 모르겠지만, 멸치가 고래를 삼키는 꼴로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기업가치 평가’의 세계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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