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공모가 억누르려고 새로 만든 ‘내부기준’, 잘못된 정책이다

배동주 기자 2024. 8. 3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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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주 기자

사건의 경과는 이렇다. 반도체 팹리스 업체인 파두는 연간 예상 매출액을 1200억원으로 제시하며 지난해 9월 코스닥시장에 입성했다. 상장 후 공개된 2분기 매출액은 5900만원에 불과했다. 주가는 반토막인 2만원대 아래로 밀린 뒤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당장 주관사의 ‘게이트 키퍼’ 역할에 의문을 제기했다. 자본시장법에 이미 상장 주관사의 ‘성실한 이행’이 명시됐는데, 충실한 실사는 미뤄두고 수수료 수익을 위해 무리한 상장을 추진한 것 아니냐고 의심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6월 무리한 상장 추진을 막을 대안을 꺼내 들었다.

눈에 띄는 건 수수료 개선과 기업실사 강화다. 상장해야만 수수료를 받는 구조가 무리한 상장을 이끈다고 보고 계약해지 시에도 주관사가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 실사 강화를 위해 주관사 임원이 실사 보고서에 직접 사인하고 책임을 지도록 했다.

그런데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문제가 될 지점이 보인다. 금융감독원은 수수료 구조와 실사 책임 강화를 넘어 ‘가격’에도 규제의 칼을 꺼냈다. 증권 인수업무 등에 관한 규정에 공모가 결정에 관한 방법과 절차를 내부기준으로 마련하고, 이에 따라 공모가를 결정하라고 명시했다.

수수료 개선과 기업실사 강화는 지난 8월 대표 주관계약 분부터 적용됐다. 그러나 증권사는 오는 10월 시행을 앞둔 공모가 결정에 관한 내부기준 마련을 놓고는 한숨만 쉬고 있다. 기업가치를 시장이 아닌 별도의 내부 기준에 따라 정하라는 의미인 탓이다.

규정 적용 시점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국내 증권사 그 어디도 공모가 결정 내부 기준을 완성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일부 증권사에선 “가격을 결정하는 기준을 마련하라는 게 대체 무슨 개념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적정 공모가는 그때그때 다르다. 주관사는 기업 실사 후 해당 기업의 특성과 시장의 흐름을 반영해 주당 공모가를 범위로 제시하고, 시장의 평가를 받는 방식으로 최종 공모가를 결정한다. 시장의 흐름을 반영하기 위해서다.

금융투자협회가 지난 6월 말 증권사로 내부기준 예시를 제시했지만, 혼란은 더 커지는 모양새다. 내부기준 예시에는 평가 시가총액 산정에 주로 사용되는 주가수익비율(PER)의 범위를 특정하고, 비교 기업에는 국내 기업을 우선 채택한다 등의 기준이 포함됐다.

이는 시장의 가격 결정 기능을 무시하는 행위다. 유사 기업의 PER은 시시각각 변동되는데 해당 구간을 미리 정해 둬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상장한 M83은 ‘시장 친화적 몸값’이란 평가를 받았다. 비교 기업의 주가 하락이 반영, 과거 투자유치 당시의 몸값이 책정돼서다.

국내 기업을 비교 기업으로 우선 채택하는 것도 문제다. 비교 기업이라는 것은 그 회사와 닮은 회사라는 의미다. 그런데 특정 회사와 닮았다, 닮지 않았다를 기준에 맞춰 객관화할 수는 없다. 기준을 세우는 것 자체가 틀렸다. 향후 나오게 될 신산업은 어떻게 유사 기업을 찾을지도 의문이다.

앞서 와인 수입사는 명품 브랜드 운영사를 유사 회사로 제시하기도 했다. 와인도 브랜드라는 의미였지만, 지나친 비약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그리고 외면을 받았다. 활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장이 판단한 셈으로, 그래도 주관사는 다양한 방식을 택할 수 있어야 한다.

금융감독원이 주관사를 향해 꺼내든 공모가 내부기준 마련 규제의 핵심은 결국 너무 높은 공모가를 제시하지 말라는 데 있다. 공모가가 공모주의 시장가격보다 높을 때 공모주에 청약해 주식을 받은 투자자들은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점만을 살핀 결과다.

그런데 공모주의 저가 책정은 공모주식수로 조달할 수 있는 자금 규모의 축소를 의미하기 때문에, 신규 상장 추진 기업이 간접적으로 지불하는 자금 조달 비용이 된다. 더욱이 기업들은 예상되는 공모가가 자신들의 기대치보다 낮을 때 상장을 아예 포기하기도 한다.

금융감독원이 할 일은 주관사가 제시하는 공모가를 누르는 일이 아니다. 적정 공모가를 찾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차라리 기관 투자자 수요예측 후 공모가를 확정하는 게 아니라 개인 투자자 청약까지 마치고 공모가를 확정하도록 하는 게 대안일 수 있다.

일본, 대만, 홍콩의 공모주 시장에서는 기관 투자자 대상의 수요예측과 개인 투자자 공모 절차를 모두 마친 후에 공모가를 결정하고 있다. 일본은 아예 주관사가 공모예정가를 제시하면 개인 투자자들도 희망 공모가와 배정 희망 물량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공모주는 일단 배정부터 받고 상장일 빠르게 팔면 무조건 돈을 벌 수 있는 ‘안전한 시장’이 애초에 아니다. 상장 주식도 적정가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비상장 주식이 처음 거래되는 위험한 시장이다. 주관사가 공모가를 낮게 제시하기만 하면 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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