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나고 자랐는데···‘일하는 시민’ 되기 이렇게 어렵나요
‘노동하는 시민’ 되려면 ‘첩첩산중’ 거쳐야
이주노동자 자녀 A씨 “계속 살고 싶은데…”
“어릴 때 동네 어른들이 ‘너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으니 나중에 한국 국적 준다’고 해서 그렇게 알고 살았어요. 중학교 2학년 때 현실을 알았죠. 정말….”
특성화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A씨(18)는 2006년 한국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모두 한국에서 다녔다. 쭉 한국어를 써 왔고 한국 밖으로 나간 적도 없다. A씨가 또래 한국인 친구들과 다른 건 딱 하나, 서류상 국적이다. A씨는 외국인가정 자녀다.
필리핀 출신 이주노동자인 A씨의 어머니는 1990년대 후반 한국에 들어와 한국에서 A씨를 출산했다. 출산 당시 어머니가 미등록 체류 신분이어서 A씨도 미등록 아동으로 오래 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의 지인 집에서 살게 된 그는 성공회 용산나눔의집의 도움으로 중학생 때 필리핀 국적 방문동거(F-1) 비자를 얻었다.
“한국에 계속 살 계획이에요. 여기서 태어나서 자랐으니까요.”
여느 한국인 친구들처럼, A씨도 나고 자란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다. 평범한 한국 고등학생인 A씨의 취미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농구, 축구를 하는 것이다.
“필리핀 가면 아무것도 못 하고 얼어있을 것 같아요. 필리핀은 가 본 적도 없고 지도상으로만 봤어요. 문화도 아는 게 거의 없어요.”
이제 곧 사회에 나올 A씨가 한국에서 쭉 살려면 일자리가 필요하다. 노동은 사회 성원권의 중요한 한 축이다. A씨도 “일을 한다는 건 여기서 계속 살 수 있다는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A씨의 앞길은 첩첩산중이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A씨가 한국 사회에서 쭉 살아가는 일은, 한국의 복잡한 비자 제도처럼 꼬여 있다.
대학·전문직만 허용···결국 꿈 접었다
A씨는 특성화고에서 자동차 정비를 전공한다.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A씨는 졸업 후 바로 관련 직종에 취업해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A씨도 자동차 쪽 일을 하길 원한다. 멋진 외제차가 즐비한 성수동으로 차 구경을 다닐 정도로 차를 좋아한다. “장난질해서 돈 더 받는 게 아니라, 진짜 정직하게 수리해서 돈 벌고 싶어요.”
A씨의 꿈은 체류자격 때문에 제동이 걸려 있다. A씨 같은 미성년 외국인가정 자녀가 가진 ‘F 비자(F-1, 2, 3 등)’는 성인이 되면 체류자격 연장이 불가능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은커녕 한국에 머물 수조차 없다는 뜻이다. A씨가 자신이 나고 자란 한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려면 체류자격을 바꿔야 한다.
문제는 A씨가 체류자격을 바꾸는 길이 하나뿐이라는 데 있다. 미성년 외국인가정 자녀가 한국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원하지 않아도 비싼 돈을 들여 반드시 대학에 가야만 한다. 특성화고를 나왔어도 마찬가지다. 방문동거(F-1) 비자를 유학(D-2) 비자로 바꾸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A씨의 선택지는 한 번 더 줄어든다. 유학 비자를 얻은 뒤 취업하려면 전문인력(E-7) 비자를 얻고, 해당 비자가 허용하는 일자리에만 취업할 수 있다. 전문인력 비자 일자리는 이름처럼 관리직·전문직·연구직 등이다. 다른 선택지는 최근 신설된 지역특화비자(F-2)를 취득해 비수도권에서 일하거나, 창업을 하는 정도밖에 없다.
“제 다른 외국인가정 친구는 코딩을 하는데, 실습 중인 회사에서 좋게 봐서 면접을 보게 됐는데 비자 때문에 막혔대요. 걔도 결국 대학 간대요.” A씨도 꿈인 자동차 정비를 일단 포기하고 스페인어 통번역을 공부하고 있다. “지금 제 전공인 자동차를 살리려면 연구소나 인공지능 쪽으로 취업해야 돼요. 그건 어렵거든요. 특성화고 나와서 바로 취업할 수 있었다면 저는 계속 자동차 했을 거예요.”
“일 하려면 대학 가야, 대학 가려면 일 해야…”
복잡하게 얽힌 체류관리 제도는 그 자체로 벽이다. A씨는 이주민을 오랫동안 지원해 온 성공회용산나눔의집과 인연이 있어 관련 정보를 알 수 있었지만, “운이 안 좋았다면 취업을 아예 못 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학교 선생님들도 정보를 정확히 모른다.
“예전에 A씨랑 같이 담임 선생님을 만났는데, 선생님이 되레 저한테 물어보더라고요. 외국인이 취업이 가능하냐고요. 외국인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까요.” 성공회 용산나눔의집 강다영 활동가가 말했다.
A씨가 맞닥뜨린 또 다른 벽은 ‘돈’이다. 등록금 외에도 수도권 대학은 연간 2000만원, 비수도권 대학은 연간 1600만원의 통장 잔고를 유학생에게 요구한다. ‘교육국제화역량인증대학’은 이 금액의 절반을 요구하지만, 이제 막 성인이 된 외국인가정 자녀에겐 큰 돈이다.
A씨처럼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경우가 많은 외국인가정 자녀들에게 돈 문제는 더 무겁다. A씨는 이주민 지원단체들에서 받는 장학금을 “드래곤볼 하듯” 모으고 있지만 충분치 않다. 생활에 보탬이 되려고 아르바이트 지원도 많이 넣어 봤지만 마지막엔 늘 ‘비자의 벽’에 부딪혔다.
“일을 하려면 대학에 가야 하는데, 대학 가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벌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일을 하려면…. 윤회 같아요.” A씨가 말했다.
‘감시’ 당하는 아이들…‘일하는 시민’ 되려면
국내 통계에 등록된 외국인가정 자녀는 2012년 2626명에서 지난해 4만372명으로 늘었다. 이주노동자 도입이 늘면서 외국인가정 자녀도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부모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라 체류 등록이 되지 않는 미등록 아동도 약 5000명으로 추산된다.
한국에서 태어나 쭉 자랐지만, 정작 한국 제도는 이들을 ‘관리 대상’으로 보고 미래를 촘촘히 제한한다. 강 활동가는 “제도는 이주배경 청소년들이 어떻게 한국 사회에 통합돼 노동자로서 잘 성장할 수 있을지가 아니라, ‘불법 취업해서 미등록이 되면 어쩌지’라는 관리 관점에서 보고 있다”고 했다.
“기분이 좋지는 않죠.” A씨가 말했다. 관리의 대상으로만 취급되는 현실은 A씨 같은 아이들을 위축시킨다. “제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까딱하면 꼬투리를 잡힐 수 있으니…. 예의주시당하는 느낌이라 더 조심하게 돼요.”
대학 진학에 실패해 고향인 한국에서 추방당한 지인들도 여럿이다. 롤 모델이 없다는 건 A씨에게는 갑갑한 일이다. “한국에서 잘된 형누나가 없어요. 그러니까 미래가 상상이 안 되는 거예요. 상상의 끝이 (가본 적도 없는) 필리핀인 게 힘들어요.” 서류상 외국인인 A씨는 병역 의무가 없지만, “국적을 준다면 무조건 군대에 가겠다”고 한다.
A씨가 ‘노동하는 시민’이 되는 건 어렵지만 중요한 일이다. 노동은 한 사람을 생활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수단을 넘어, 그를 사회와 이어지도록 하는 중요한 다리다. 한 사람의 당당한 성원이 되기를 꿈꾸는 A씨의 소망은 이 사회의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다.
“돈을 벌고 있다면 일단 지금 저를 길러주시는 이모(어머니의 지인)에게 용돈을 드리고, 도움 주신 이모님들도 가능하면 뵙고 싶어요. 친구들끼리 국내여행도 가고, 몇이랑 해외도 나가 보고 싶어요.”
정보도 부족하고, 제도도 복잡하고…. 외국인가정 자녀에게 취업은 너무 막막하고 힘든 일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강다영 성공회 용산나눔의집 활동가가 진로·진학에 도움이 될 알짜배기 정보를 자세히 정리했습니다. 성공회 용산나눔의집이 지난달 20일 개최한 외국인가정 자녀 진로·진학 설명회에서 활용된 자료입니다. 정보를 알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넣기하면 됩니다.
https://ysnanum.notion.site/ae4d72ba129f49f1a3a50d2234e2669a
▼ 더 알아보려면
‘이주배경 아동’ 중에는 A씨처럼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도 있고, 부모님을 따라 중도에 입국한 자녀들도 있습니다. 살아온 배경은 다르지만 이들은 대부분 같은 곳에서 난관에 부딪힙니다. 이주민을 포용보다는 관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높은 벽’ 입니다. 특히 ‘노동하는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너무 많은 장애물을 돌파해야 합니다. 주간경향은 2022년 이주배경 청년들의 노동시장 진입 문제를 깊게 다뤘습니다.
☞ 경계에 선 청춘의 험난한 취업 여정
https://weekly.khan.co.kr/khnm.html/?www&mode=view&art_id=202207221116501&dept=115
☞ 통계 사각지대에 갇힌 이주배경 청년들
https://weekly.khan.co.kr/khnm.html/?www&mode=view&art_id=202207221116481&dept=115
☞ 긍정의 눈 떠야 공존의 길 열린다
https://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2207221116461&code=115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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