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깨졌다···암잡는 ‘착한 방사선’에 제약업계 러브콜 [약 읽어주는 안경진 기자]
방사선 원리 이용한 암 진단·치료 시도 활발
방사성의약품 ‘플루빅토’ 국내 처방 길 열려
“이모가 엄마 설득 좀 해주면 안 돼? 방사선학과는 위험해서 안 된대.”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70여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친척 결혼식에서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인 사촌동생을 만나 근황을 나누다 의도치 않게 진로상담을 하게 됐는데요. 사촌동생이 털어놓은 고민은 다소 뜻밖이었습니다. 방사선학과를 가려고 하는데 부모님의 반대가 너무 심하다는 거예요. 진학하려는 학교가 대부분 집에서 먼데다 졸업 후 방사선사가 됐을 때 방사선 피폭에 대한 우려가 크신 모양이었습니다.
방사선사 뿐 아니라 의사·간호사·치과의사 등 의료기관의 진단방사선 분야 종사자들은 일반인보다 방사선 노출량이 많을 수밖에 없겠죠. 방사선은 직접적으로 DNA 손상을 일으킬 뿐 아니라 세포 내 다른 원자나 분자와 작용하면서 생기는 활성산소에 의해 간접적으로 DNA를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방사선에 장기간 노출되면 발암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현행법상 의료 방사선 종사자들의 피폭 선량한도를 유효선량 기준 연간 50밀리시버트(mSv), 5년간 누적선량 100mSv로 제한하는 건 그런 이유입니다. 납 가운 같은 방사선차단용 보호장비 착용도 의무화되어 있죠.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학생 때부터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방사선’이라는 단어에 유독 겁을 내는 건 체르노빌·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를 떠올리기 때문일 겁니다. 2018년에도 침대 매트리스에서 방사성 물질인 라돈이 기준치 이상으로 검출돼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죠.
하지만 의료용 방사선은 얘기가 좀 다릅니다. X선·컴퓨터단층촬영(CT) 등 의료용 방사선도 분명 인체에 영향을 주지만 비교적 에너지 수준이 낮은 방사선을 이용하고 그 양도 미미합니다. 피폭선량을 예측할 수 있는데다 필요한 부위에만 부분적으로 피폭이 되기 때문에 SF영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방사능 노출 사고처럼 과도한 공포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얘기죠. 최근 제약·바이오업계에서는 암 진단과 치료 영역에서 방사선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치료(Therapy)’와 ‘진단(Diagnostics)’을 결합한 ‘테라노스틱스(Theranostics)’라는 용어도 등장했죠.
특정 암에만 들러붙는 물질에 방사성 동위원소(원자핵이 불안정해 스스로 변화하는 원소)를 결합해 만든 ‘방사성의약품’은 차세대 암치료법이란 평가 속에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방사성 동위원소가 α선이나 β선이라는 방사선을 방출시켜 암세포의 DNA를 절단하고 사멸시키는 게 핵심 기전인데요. 쉽게 말해 암세포만 피폭시켜 난치암을 치료하는 개념입니다. 방사성리간드를 투사해 세포의 표적 단백질에 결합시키고 암세포에 집중시킨다고 해서 일명 ‘방사선 미사일 치료’라고도 불리죠.
현재 방사성의약품 분야의 선두주자로는 스위스 제약사 노바티스가 개발한 ‘플루빅토’가 꼽힙니다. 전립선암 세포 표면에 많이 발현되는 ‘전립선특이막항원(PSMA)’에 방사성동위원소인 루테튬-177을 결합시켜 암세포를 없애는 약이죠. 임상 연구에 따르면 치료에 실패한 PSMA 양성 전이성 거세저항성 전립선암 환자가 표준치료와 플루빅토를 병행하면 표준치료만 시행했을 때보다 생존기간이 2배 가량 연장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2022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죠.
국내에선 ‘글로벌 혁신 제품 신속심사 지원체계’를 통해 지난 5월 허가를 받았는데 국립암센터·서울아산병원·분당차병원 등 주요 의료기관에 속속 도입되며 본격적인 처방이 이뤄질 예정입니다. 아직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비용 부담이 크지만 의료 현장에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전립선암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줄 것이란 기대감이 높습니다. 글로벌 제약사들의 일만은 아닙니다. 국내에서도 SK바이오팜(326030)을 필두로 동아에스티(170900)의 자회사인 앱티스, 퓨쳐켐(220100), 듀켐바이오 등이 진단 및 치료 용도로 방사성의약품을 개발 중이거든요. SK바이오팜은 지난 29일 미국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 기업 테라파워의 자회사인 테라파워 아이소토프스로부터 치료용 방사성동위원소 ‘악티늄-225’를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악티늄-225는 α선을 방출하는 방사성동위원소로 전립선암·대장암·췌장암 등을 치료하는 방사성의약품에 사용된다고 해요. 고순도의 악티늄-225를 확보해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방사성의약품 개발을 선도하겠다는 전략으로 보입니다. 비교적 초기 단계인 만큼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입증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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