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가 시작된 그날의 잊혀진 꿈 [책&생각]

한겨레 2024. 8. 3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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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광복절은 곧 방학이 끝난다는 아쉬움이었고, 더 커서는 앞으로 무더위가 한풀 꺾이리라 기대하는 휴일이었다.

이현의 '1945, 철원'을 읽고 나자 광복절이 다르게 다가왔다.

분단 이전 철원은 남과 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철원중학교 적색독서회에서 공산주의를 만난 기수는 새로운 세상에서 어머니와 다시 시작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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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철원
이현 지음 l 창비(2012)

어릴 때 광복절은 곧 방학이 끝난다는 아쉬움이었고, 더 커서는 앞으로 무더위가 한풀 꺾이리라 기대하는 휴일이었다. 이현의 ‘1945, 철원’을 읽고 나자 광복절이 다르게 다가왔다. 경애와 기수 그리고 연천댁과 꺽쇠네가 기쁨에 겨워 더운 줄도 모르고 만세를 불렀을 그날이었다.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이지만 이후의 길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 협상, 대립, 결렬, 암살, 분단, 전쟁, 휴전으로 이어지는 모진 길을 걸어야 했다. 또한 우리 삶에 그늘을 드리운 숱한 문제가 그날로부터 시작되었다. 작가는 철원이라는 해방 공간을 통해 이 모든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분단 이전 철원은 남과 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철원역에서 금강산선과 경원선이 분기했고, 도청이 있었으며 철원 인구가 10만 명을 웃돌았다. 요릿집만 200개가 넘었다. 경원선이 더는 북으로 올라가지 못하며 과거의 모습은 사라졌다. 단 하나, 그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다. 뼈대만 남은 노동당사 건물이다(현재는 복원 공사 중이다). 철원은 해방 후에는 삼팔선 이북, 전쟁이 끝나고는 휴전선 이남에 속한 곳이 되었다. 노동당사는 해방과 휴전에 이르기까지 철원의 희망과 좌절을 모두 지켜본 셈이다.

작가는 노동당사, 철원역, 철원백화점 등 과거 철원의 풍경뿐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았던 이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독자의 마음에서 그들이 살아 움직인다. 넓디넓은 철원평야를 소유한 아흔아홉 칸 천세택의 안주인 차씨와 막내아들 기수, 대대로 양반인 곽치영과 총명하지만 계집이라 인정받지 못한 은혜, 이상주의자이자 혁명가인 홍정두와 현실주의자인 배롱나무 집 서화영 그리고 평생에 한 번 내 집과 내 땅을 가져보는 게 소원이었던 수많은 사람 중에 열다섯 살 경애도 있다. 경애와 기수와 은혜는 동갑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꾸는, 해방 공간의 주인공이다. 경애는 일제의 수탈과 매질에 부모가 죽고 언니들과 헤어지자 배롱나무 집에서 계집종으로 지냈다. 뼛속까지 양반인 은혜는 감히 상종도 못 할 아랫것들이 제 주장을 하는 세상에 치를 떤다. 철원중학교 적색독서회에서 공산주의를 만난 기수는 새로운 세상에서 어머니와 다시 시작하고 싶어한다.

이들에게 해방이란 무엇이었을까. 경애에게는 아버지가 손수 지은 초가삼간에서 언니들과 다 함께 사는 일이었다. 기수에게는 반상의 구별 없이 어울려 놀던 어린 날을 닮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은혜에게는 미친 세상을 피해 무사히 남으로 도피해 할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집안을 구하고자 하는 집념이었다. 각기 다른 욕망은 이들에게 큰 아픔을 남긴다. 한반도는 아직도 휴전 중이니 1945년의 갈등은 미완의 숙제라 하겠다. 더 아픈 건 그날의 일들이 아직도 우리에게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한미화 출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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