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욕망…그 속에 살아 펄떡거리는 정유정의 문장 [책&생각]
가상세계 속 정보로 영생하는 인간
그 티켓을 노린 각축과 음모, 살인
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l 은행나무 l 1만9800원
정유정의 신작 ‘영원한 천국’은 여러 얼굴을 지닌 소설이다. 에스에프인가 하면 미스터리의 면모를 지녔고 액션 누아르로 읽히다가는 러브 스토리로 다가오기도 한다. 유빙이 떠다니는 한반도의 서해안과 황량하고 아름다운 이집트의 사막, 쇠락한 소도시와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꿈의 가상 세계가 한 작품 안에 공존한다.
소설의 주요 무대는 노숙자 재활 시설 삼애원. 기상이변으로 유빙이 떠밀려와 갯바위에 부딪히는 서해의 외딴 곶 절벽 위에 자리한 이곳에 두 남자가 보안요원으로 들어온다. 노숙자 촌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동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전직 도수치료사 경주, 그리고 노숙자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한 수수께끼의 인물 제이가 그들. 인간의 모든 정보가 가상 세계에 업로드되어 육체의 소멸 이후에도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노숙자들을 상대로 그 실험 티켓이 발부되었으며, 티켓을 노린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삼애원 안팎을 떠돈다.
“먼바다로부터 밀려온 유빙이 갯바위나 이미 밀려와 있던 유빙 덩어리와 충돌하며 내는 굉음이었다. 한 번씩 부딪칠 때마다 산산이 부서진 유빙 가루가 물보라처럼 솟구쳐 올랐다. 몰려온 유빙들은 직소 퍼즐을 맞추듯 해안가 전역에 얼음 벌판을 형성하고 있었다. 영구동토의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삼애원에 갓 부임한 경주가 자신의 귀에 배경음처럼 들려오던 쿵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는 장면이다. 오호츠크해 쪽으로 열린 동해도 아니고 한반도 서해에 유빙 벌판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이 소설이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삼았음을 알게 한다. 과학기술 발전으로 게임과 같은 가상현실에서 인간이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설정이 그로써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보안요원으로 업무를 시작한 경주와 제이가 처음 맞닥뜨린 상황은 놀랍고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새벽 비상 호출 전화에 불려간 그들을 맞은 것은 잠긴 식당 안에서 연장을 든 두 남자와 맨손으로 대치 중인 보안팀장과 보안팀 선임 옥희 씨. 그들 주위를 다섯 남자가 둘러싸고 있는데, 여차하면 연장 든 남자들 편에서 참전할 기세다. 지팡이와 스프레이건으로 싸움에 끼어든 경주와 제이 덕에 보안팀은 일단 상황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지만, 관리팀장이 나타나면서 싸움은 중단된다. 그러나 이 강렬한 첫 경험은 소설이 진행되면서 차례로 강도를 높여 가며 되풀이되고, 소설의 기조를 이루며 주제와도 연결된다.
“등 근육이 경련하듯 펄떡거렸다. 심장에서 뻗어 나온 한기가 혈관을 얼리며 몸 구석구석으로 내달렸다. 머릿속은 어둠만큼이나 짙은 안개로 가득 찼다. 생각이 진동하지 않았다. 소리를 따라가야 할지 멀어져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소설이 좀 더 진행된 뒤, 보안 순찰에 나섰다가 수상쩍은 발자국과 소리를 접한 경주의 상태를 묘사한 대목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아직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기 전이지만, 상황이 더 진전되면 결투 상대가 내리찍은 단검이 경주의 가슴을 파고들고 경주가 휘두른 젓가락은 상대의 눈알을 찌르는 스펙터클한 장면도 펼쳐진다. “물컹한 구체를 뚫고 들어가는 손의 촉감과 흉곽을 뚫고 들어오는 칼의 충격을 동시에 인지했다. (…) 머리가 화염에 휩싸였다. 거대한 유빙에 깔린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이렇듯 긴장감을 유발하거나 박진감 넘치는 결투 장면을 그릴 때 정유정의 문장은 살아서 펄떡거린다. 사막을 배경으로 불타오른 제이와 해상의 사랑, 그리고 병원 업무와 병행해서 피어나는 경주와 지은의 연애 감정을 다룰 때 소설은 청춘 로맨스처럼 간지럽고 달달하다. 그런가 하면 육신을 벗고 가상 세계에서 영원을 살게 된 인물이 품는 이런 질문은 사뭇 실존적이어서 더불어 곱씹을 만하다. “그쪽 세상에서 본다면 나는 죽은 자일까, 산 자일까. 스스로 사고하는 게 가능한 한 덩어리의 정보에 불과할까. 아니면 신과 인간 사이에 위치한 최종 진화물일까.”
그렇다. 이 소설은 정보 형태로 바뀐 인간이 가상 세계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어느 미래에 관한 이야기이고, 몸과 몸이 부딪치고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받는 결투란 그런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한갓 해프닝일지도 모를 일이다. 몸의 결투와 정보의 영생 사이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낙차가 있어 보이지만, 영생하는 인간에게도 몸으로 부대꼈던 ‘전생’의 욕망과 상처는 어떻게든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일 것이다. 보안요원 경주와 제이의 분투가 이 소설의 표면 이야기라면, ‘롤라’라는 영생의 가상 세계로 입장하기 위한 각축은 이면의 서사여서 함부로 까발리기 어렵다. 소설 첫 장면에서 일인칭 가상 극장 ‘드림시어터’의 설계자와 의뢰인으로 만나는 해상과 경주, 그리고 삼애원 보안요원으로 마주치는 경주와 제이라는 두 관계가 어떻게 하나로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책을 읽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하리라. 바리스타 베토벤과 랑이 언니, 그리고 말하는 앵무새 공달이라는 흥미로운 조연들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는 사실을 귀띔하고자 한다. 아울러, 표면 이야기는 이면 서사에 의해 추동되고, 때로 양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경계 없이 섞이기도 하며, 종내에는 이면 서사가 표면 이야기의 영향과 지배를 받기에 이른다는 사실 역시 보너스 삼아 덧붙여 둔다.
해상과 경주의 시점을 오가고 현실과 가상 세계를 넘나드는 소설을 읽다 보면 독자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 어지럼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손잡이를 꽉 잡고 소설이라는 놀이기구의 진동을 끝까지 버텨 내면 이런 깨달음의 종착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데우스가 되어 영원한 천국에 살더라도 인간은 결국 자기 문제를 끌어안고 끙끙댈 존재라는 것. 욕망과 추구는 인간이 가진 특성이자 마지막까지 간직할 본성이라는 것.”(‘작가의 말’) 그렇게 자신의 욕망과 추구를 끝까지 끌어안고 버티는 기질을 가리켜 작가는 ‘야성’이라 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야성에 관한 소설이다.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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