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김시습은 끝까지 불교를 버리지 않았다

최재봉 기자 2024. 8. 3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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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21살 때 삼각산(북한산) 중흥사에서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다가 책을 불태워 버린 뒤 미친 시늉을 하며 측간에 빠졌다.

고전문학자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김시습, 불교를 말하다'는 김시습과 불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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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의 불교론과 사상적 궤적
그가 남긴 두 텍스트 통해 검토
불교에도 진리 있다는 ‘유불 겸전’
동료 학자들 주장 정면 반박도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초상(보물 제1497호). 위키미디어 코먼스

김시습, 불교를 말하다
‘청한잡저 2’와 ‘임천가화’
박희병 지음 l 돌베개 l 3만5000원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21살 때 삼각산(북한산) 중흥사에서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다가 책을 불태워 버린 뒤 미친 시늉을 하며 측간에 빠졌다. 이른바 양광(佯狂)이다. 이후 삭발하고 승려가 되어 8년을 떠돌았고, 29살 때부터 36살 때까지는 금오산(경주 남산)에 머무르며 ‘금오신화’를 지었다. 37살에 상경하여 수락산에서 지내며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는 등 벼슬길에 나아갈 뜻을 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성종의 계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숨진 데 충격을 받아 49살에 다시 양광을 일삼다가 승복을 입고 관동 지방으로 떠났고, 결국 충남 부여 무량사에서 마지막 날들을 보냈다.

이렇듯 유가와 불도를 오간 김시습의 사상적 정체성에 관해서는 논의가 분분했다. 고전문학자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김시습, 불교를 말하다’는 김시습과 불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박 교수는 이 책에서 특히 김시습의 글 두 편에 주목한다. 김시습의 문집인 ‘매월당집’에 실린 ‘잡저’ 두 편 중 하나를 박 교수 자신이 ‘청한잡저 2’라 이름 붙인 글, 그리고 오래도록 제목만 전해 오다가 몇 년 전 일본 도쿄 국립공문서관에 소장된 필사본 ‘매월당집’에서 확인된 ‘임천가화’가 그것들이다. 박 교수는 이 두 글을 직접 번역해 원문과 함께 책 뒤에 실었고 ‘임천가화’는 영인본도 실었다. ‘청한잡저 2’는 김시습의 호인 ‘청한자’가 ‘객’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불교에 관한 생각을 밝힌 글이고, ‘임천가화’는 승려들의 잘못된 사고나 행태에 대한 비판과 올바른 깨달음의 길에 대한 생각 등을 담은 비평적 에세이집이다. ‘청한잡저 2’에서 “군주의 잘못된 불교 숭배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 보이고 ‘임천가화’에 현실 불교와 승려에 대한 비판적 색채가 짙지만, 심지어 그가 환속한 뒤 ‘이단변’이라는 일종의 사상 전향서를 발표하기까지 했음에도 김시습은 끝까지 불교를 버리지 않았고 “유불을 겸전”했다는 게 박 교수의 주장이다. “김시습에게 불교는 ‘비진리’가 아니었다. 그는 유교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불교에도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한시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고 보아야 옳다.”

김시습과 불교의 관계에 대한 이런 견해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기존 학설들에 대한 비판과 이의제기다. 박 교수는 그간 일본에서 출간된 일연의 책 '중편조동오위'의 서문 위에 김시습의 법명 ‘설잠’( 雪岑)이 적혀 있다고 해서 ‘조동오위요해’도 김시습의 저술이라는 주장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박 교수는 일본 간본의 설잠이 김시습이 아니라 일본 에도 시대 선승 셋신( 雪岑)과 관계된 것이라면서, 심경호 고려대 명예교수의 ‘김시습 평전’ 등에 이의를 제기한다.

또 ‘금오신화’ 후기에 ‘매’(梅)와 ‘월’(月) 두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을 근거로 김시습이 매월당이라는 호를 금오산 시절에 쓰기 시작했다는 주장 역시 사실과 다르며, 이 호는 무량사의 한 건물인 ‘매월당’에서 취한 말년의 호라고 바로잡는다. 이와 함께, 김시습이 나중에 세조를 성군으로 높이며 그의 불교 숭배를 극도로 찬미하는 시를 쓴 것이 “현실계를 있는 그대로 승인하려는 의식”을 보여준다(‘김시습 평전’)거나 “세조와의 관계가 아주 좋았음을 증명”(김풍기 강원대 교수)한다는 판단과 달리, 그것은 김시습의 본의가 아닌 ‘페인트 모션’(상대를 속이거나 견제하려는 동작)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료 학자들의 반응이 주목되는 대목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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