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케인스’ 기리며… 제자들, 스승의 저서 개정판 헌정
12번째 개정판 영전에 올려
“(조순) 선생님이 부르셔서 당시 광화문 네거리 국제극장 옆 아주 오래된 마당 넓은 한옥 여관에서 기라성 같은 선배 4명과 경제학원론 집필 작업을 도왔습니다. 책 머리말에 다섯 수재라고 해 주셨어요. 명예로웠습니다.”(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경제학원론 개정판에서 오탈자를 잡는 작업을 했는데 머리말에 ‘올해 대학원에 입학한 윤희숙양이 열심히 수고해주셨다’고 써 주셨습니다. 이 큰 경제학원론의 패밀리가 돼 너무 즐겁습니다.”(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
2022년 세상을 떠난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집필한 ‘경제학원론’이 출간 50년을 맞았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 전성인 홍익대 교수, 김영식 서울대 교수 등 그의 제자들이 29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 모여 이번 달에 나온 경제학원론 최신 개정판을 조 전 부총리 영전에 헌정하는 행사를 가졌다. 후학과 가족 150여 명은 행사장에서 조순 선생과 조순 경제학원론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이미 타계한 저자의 책이 개정판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제자들이 차례로 공동 저자로 합류하며 경제학원론을 새로 써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케인스’로 불리는 조순 선생은 1967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서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974년 국내 경제학계가 제대로 된 첫 번째 현대 경제학 교과서로 평가하는 ‘경제학원론’을 냈다. 그는 생전에 “원론은 경제학의 모든 기본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원론을 확실히 알면 모든 경제 문제에 대해 관점이 확립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가로쓰기, 780페이지의 두툼한 교과서였다. 한국 경제가 이제 막 뜀박질을 시작했을 때, 경제 현상을 보는 기본적인 이론과 철학을 제공하기 시작했던 책이 이제 ‘지천명(知天命)’ 나이가 됐다.
‘경제학에 뜻을 둔 학생은 물론 그렇지 않은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의 기본 원리를 체득하고자 하는 의욕은 대단히 크다’라는 머리말로 시작하는 초판은 2만부 넘게 팔렸다고 한다. 일본 책을 그대로 베낀 책이 대부분이었을 때 조순 경제학원론은 미시경제, 화폐금융, 국제무역 등을 체계적으로 담았고, 케인스 이론 등을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조순 선생이 경제부총리로 재직하던 1988년 정운찬 전 총리가 공동 저자로 참여했고, 전성인 홍익대 교수가 2003년, 김영식 서울대 교수가 2009년 합류하면서 최근 12판이 출간됐다.
초판에 가득했던 한자는 거의 사라졌고, 만연체의 길었던 문장은 단문으로 바뀌었다. 최신판은 경제 이론을 뒷받침하는 국내외 사례와 통계 자료가 업데이트됐다. 코로나 후의 세계경제, 인공지능과 거시경제 등 새로운 주제와 50년 전 초판에는 있을 리 없던 저출생 같은 현안도 포함됐다.
정운찬 전 총리는 이날 인사말에서 스승 조순 선생과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한 학생이 조순 선생에게 “경제 현안 문제는 어떻게 다뤄야 합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조순 선생의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항상 시장을 가봐야 하네. 발표되는 경제 통계 숫자만을 보고 경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옳지 않네. 그리고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풀 때도 기본적인 경제적 사고의 틀이 중요하네. 수요와 공급, 단기와 장기만 염두에 두고 분석하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네.” 정 전 총리는 이를 경제학원론 중의 ‘원론’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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