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첫 부커상 심사위원 “K문학 번역하고 영어 소설도 써요”
“제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해요. 제 일, 제 직업은 제가 만들었어요.”
누군가는 그에게 ‘성깔 있다’ 할 것이 틀림없다. 최근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번역가 안톤 허(43·허정범)는 거리낌 없이 당당했다. 불과 몇 년 새 그가 이뤄낸 성과를 되짚어보면 그럴 법하다. 억지로 겸손한 척하는 게 오히려 어색했을 것이다.
2022년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에 그가 영어로 번역한 두 작품(정보라 ‘저주 토끼’,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이 롱 리스트(1차 후보 13편)로 올랐다. 한국 작가 작품이 동시 지명되기는 처음이다. 이후 ‘저주 토끼’는 쇼트 리스트(최종 후보 6편)에 들었고, 지난해 전미 도서상 번역 문학 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올해는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를 번역해 미 바리오스 번역상 최종 후보에 들었다. 수상 목전에 서 있다.
지난달엔 한국인 최초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심사위원 다섯 명 중 한 명으로 위촉됐다. 이와 관련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기밀 사항”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 인터뷰도 위원회에 보고해야 해요.”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의 유서 깊은 문학 전문 출판사 ‘크노프’와 이성복 시인의 시집 ‘그 여름의 끝’ 번역·출간 계약도 맺었다. 2026년 출간 예정이다. 크노프가 한국 문학을 출간하는 건 2011년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 영어판 이후 15년 만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미국의 ‘빅(Big) 5′ 출판사라는 ‘하퍼콜린스’에서 영어로 쓴 SF 소설 ‘Toward Eternity’를 냈다. 뉴욕타임스는 ‘요즘 번역가들은 소설도 쓴다’는 기사로 그를 주목했다.
지난 3년간 그가 번역한 책은 10권. 1년에 3.3권꼴로 번역한 셈이다. 계약까지 합치면 훨씬 많다. 계속 이 강도의 생산성을 유지할 생각일까.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 저 죽어요. 물이 올랐으니 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너무 전진했어요. 이제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안톤 허는 번역가이기 이전에 열렬한 한국 문학 독자다. 한때의 문학 소년은 애정을 듬뿍 담아 번역할 책을 직접 고르고, 영미권 출판사에 제안서를 보내 ‘장사’까지 한다. 선정 기준을 묻자 “딱히 없다”고 했다. “우주의 신비인지, 어떻게든 그 책이 제 앞에 나타나요. 책이 저를 선택하죠.” 업무의 8할이 번역 제안서 쓰는 일이라고 툴툴댔지만, 자부심이 넘쳤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고, 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 홍콩·에티오피아·태국 등 해외에서 산 경험이 그를 차별화한다. 영미 출판 시장에서 팔리는 책을 직감적으로 안다. 박서련 작가의 ‘마법 소녀 은퇴합니다’를 번역·출간한 이후 하퍼콜린스 본사에 들른 일을 소개했다. 주디스 커 하퍼원(하퍼콜린스 자회사) 회장이 느닷없이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단다. “박서련 작가 책이 그렇게 잘 팔린대요. 그래서 저한테 고맙대요.”
해외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영리한 사업가 기질도 있다. 6~7년 전쯤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 ‘무한화서’를 번역하기로 마음먹고 한국문학번역원에 번역 지원서를 냈다. 그런데 ‘시장성이 없다’고 잘렸다. 2020년 해외 번역가들이 모이는 워크숍에 이 책 샘플 번역을 들고 갔는데 다들 열광했다.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무한화서’는 미 시애틀 독립 출판사 ‘서블루너리’에서 출간돼 6쇄를 돌파, 수천 권이 팔렸다. 시집 시장이 한국보다도 작은 미국에선 기적 같은 일. 겹경사로 영국 유명 출판사 펭귄랜덤하우스에 판권이 팔려 올가을 하드커버로 출간된다.
이 실적을 들고 크노프의 문을 두드렸다. “너희도 ‘무한화서’처럼 성공하고 싶지 않니?”라며. 안톤 허는 “물질성이 느껴지면서도 선불교적, 추상적 이미지가 강한 이성복 시인의 시는 영어가 잘 어울린다”고 했다. “영어를 잘 받는 작가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박상영 소설가는, 거의 미국 작가죠.”
소설 데뷔작은 머지않아 한국에서도 번역·출간된다. 한국어 번역은 정보라 소설가가 맡겠다고 나섰다. 서로 책을 번역해 주는 독특한 콤비가 됐다. “재밌는 양반이에요. 제 소설에 시가 많이 나오는데, 정보라 작가님 첫 반응은 ‘재밌다’, 그다음은 ‘그런데 나는 시를 굉장히 싫어한다’였어요.”
이 모든 게 문학 번역가로 7년 차에 이룬 성과다. 부모 성화에 못 이겨 한국에서 법대(고려대)를 졸업하고, 고시 보라는 말에 시달리다 가출까지 감행한 지난한 가정사가 있다. 승승장구하는 아들에게 이제 더는 뭐라고 못 하지 않을까. “40대 아저씨한테 뭐라고 하시겠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죠.” 부모의 뜻을 거스른 그의 저항이 한국 문학계에는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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