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눈처럼 사라지다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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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지도자였던 고 문익환 목사의 아호는 '늦봄'이다.
자신이 직접 지었다고 하는데 오랫동안 신학자·목사로서 학문과 신앙의 세계에서 살다가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서야 늦깎이로 민주화운동 대열에 합류한 것에 대한 자책과, 늦었지만 그럼에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봄을 열겠다는 자부(自負)의 뜻이 함께 담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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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지도자였던 고 문익환 목사의 아호는 '늦봄'이다. 자신이 직접 지었다고 하는데 오랫동안 신학자·목사로서 학문과 신앙의 세계에서 살다가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서야 늦깎이로 민주화운동 대열에 합류한 것에 대한 자책과, 늦었지만 그럼에도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봄을 열겠다는 자부(自負)의 뜻이 함께 담긴 듯하다. 문 목사의 부인이자 동지인 고 박용길 장로의 아호는 '봄길'이다. 문 목사가 지어준 것이라고 하는데 아내의 앞길이 오롯이 아름답기만을 바라는 남편의 애정이 듬뿍 담겼다.
아호(雅號)라는 말뜻 그대로 참 아름다운 두 분의 아호를 알게 된 후, 두 분과 아무 관련이 없으면서도 두 분의 아호를 모방해서 나 자신의 별칭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엉뚱한 욕구가 솟구쳤던 적이 있다. 며칠 고민한 끝에 떠오른 말은 '봄눈'이었다. 먼저, 빨리 녹아버리는 봄눈의 속성에 빗대어 감정, 특히 원한·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이 금세 사라지는 모양을 '봄눈 녹듯 한다'라고 하는 것이 좋았다. 사전을 찾아보면 봄눈을 봄철에 오는 눈이라고 풀이하고 있지만 겨울철에 내렸다가 봄이 올 때까지 녹지 않은 잔설(殘雪)도 봄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잔설이든 봄에 오는 눈이든, 봄눈은 봄이라는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일 수 있지만, 봄이 자리를 잡으면 속히 녹아 사라지므로 결코 봄을 위협하지 않는다. 봄눈 녹듯 살고 봄눈 녹듯 사라지면 어떨까 생각하였다.
올봄 티비엔(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의 OST엔 '봄눈'이란 곡이 있다. 상대를 봄이라 부르며 사랑을 고백하는 서정적인 노래인데 가사에 눈이란 단어도 나오지 않고 눈에 관한 언급도 없다. 그러면 봄눈이라는 제목은 뭔가를 상징하는 것일 텐데,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이 현재의 불행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타임슬립을 통해 과거로 거슬러가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낼 때마다 지워지는 과거의 기억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봄에 내리는 눈이 흔치 않은 것처럼 특별한 사랑의 순간을 상징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애당초 봄눈은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어울리지 않는 조합 또는 모순형용이라 할 수 있다. 이 어색함과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눈이 빨리 녹아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등장하고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잘 사라지고 퇴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솔로몬이 지었다는 전도서에는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는 구절이 있는 것일까? 잘 사라지고 적기에 퇴장하는 것이 화려한 등장보다 더 어렵고 더 가치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여기 이 지면에 한 달에 한 번꼴로 칼럼을 쓴 지도 1년 8개월이 넘었다. 글은 쉽게 써지지 않는 법이라, 여기에 쓴 스무 편 정도의 칼럼은 모두 예전에 내 딴에는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았거나 감흥이 크게 있었던 것들을 글감으로 한 것이었다. 갈수록 글감은 떨어지고 칼럼을 계속 쓰는 게 연료가 제로인 차를 몰고 가는 것처럼 느껴질 무렵 하차하게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짧지 않은 기간 귀한 지면에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만큼이나, 적당한 때에 봄눈 녹듯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게 해주신 것도 감사드린다.
우재욱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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