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규의 외교만사 外交萬思]선에서 면으로의 대외전략 발상 전환
대한민국이 처한 경제·안보·외교·남북관계 현실은 엄중하다. 그간의 성공 신화는 접고 새로운 대응책을 찾아나서야 한다. 지난 100년간 제국주의의 침략, 동족상잔의 전쟁, 세계 최악의 가난을 겪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20세기 하반기에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에 성공하면서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무역 역량과 군사력을 갖춘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한 역사적 성취를 이뤄냈다. K팝과 같이 세계적인 찬사를 받는 문화현상도 창조해냈다. 세계가 인정한 강국이 되었다. 위대한 국민들의 노고와 분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성공을 제공했던 국제질서는 바뀌고, 미·중 전략경쟁 시대가 되었다. 강대국 간 각축시대 속 자국 이기주의의 만연, 북한의 핵무장 완성과 선제 핵공격 독트린의 채택, 세계 공급망의 분화·재편이 이뤄지고 있다. 생태환경의 위기, 질병, 에너지, 사이버, 기후변화와 같은 세계적 차원의 안보적 도전도 몰려오고 있다. 향후 5년이 미래 50여년의 역사를 좌우할지도 모르는 역사적 갈림길에 서 있다.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정에 대한 국민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간 단절과 대립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러시아 및 중국과 같은 주변 강대국들과의 갈등도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북한의 핵 위협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미국의 대선 결과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고, 그 결과는 우리의 경제·안보·외교 환경에 사활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윤석열 정부는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정치적 자산을 쏟아붓고 있지만, 실리나 자존감 그 어느 쪽도 찾기 어렵다.
보수는 안이, 진보는 해법 못 내놔
국내적으로는 분열의 정치가 강화되고, 국민들은 해법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고통을 겪고 있다. 대외정책은 냉전과 같이 단선논리가 지배하는 이분법적 국제정치관에 머물러 있고, 강대국 각축에 휘둘리고 있다. 미국에만 의존하려는 타성적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보수는 진부하고 안이하며 심지어 무책임해 보인다. 진보는 아직 그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대륙과 해양 사이에 끼인 지정학적 요충·중간 국가다. 분단으로 인한 전쟁의 위협이 상존하고, 통상국가로서 국가발전은 국제시장 확대에 의존하는 취약한 구조이다. 미·중 전략경쟁 시기 강대국들 간에 협력보다는 갈등이 강화되고, 시장이 좁아질수록 우리는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이할 개연성도 커진다. 미·중 전략경쟁은 단기적인 북한 비핵화 추진 전망도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간 미국 자유주의 패권질서의 덕을 많이 보았다. 미국과의 동맹 속에 안보를 보장받으면서 경제발전에 매진할 수 있었다. 일본은 이웃국가로서 기술과 자금 면에서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중국은 지난 30년간 연평균 10% 성장이라는 미증유의 업적을 이룩함으로써, 한국에 안정적인 시장을 제공하고, 경제성장을 위한 주 수익원이 되어주었다. 이제 이러한 축복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한국은 기존 질서가 무너져가는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면서 스스로 해법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불확실성과 혼돈의 시대에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공감대에 기반한 정치의 확립과 공화의 정신을 되살릴 리더십을 확보하는 것이다. 17세기 이후 서구에서 정글과 같은 현 민족국가 체제가 태동할 때, 국가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국민을 통합하는 능력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경제발전, 군사력 강화, 복지국가 달성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국민통합과 동원에 가장 효과적인 체제임을 입증했다. 여기에 공과 사의 엄격한 구분, 공평·공감대에 입각한 법과 권력의 집행, 자유로운 개인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적 미덕을 지닌 공화정의 구성은 국력과 진보의 상징이 되었다.
현 세계는 이러한 덕목들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음을 목도한다. 민주공화정은 오염되어 공평·공감·공동체의 정신은 실종되고, 가족주의적인 당파적 이익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자유·민주주의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전락하면서 민주주의·다수 제도를 참칭한 소수의 기득권과 엘리트층들의 권력과 정책독점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혼돈의 시대가 도래했다.
갈등보다 협력·공존을 모색해야
대외관계는 이러한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미국 패권은 자리를 잃고,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각국은 오직 실리에 따른 권력을 추구하고 갈등은 확산되고 있다. 타국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다. 민족국가를 넘어선 지역과 지구촌의 공동체 의식은 설 자리가 너무 좁다. 동북아와 한반도는 갈등과 분쟁의 파괴적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현 상황대로라면 향후 지역의 안정, 발전, 평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지정학적 중간·낀 국가인 대한민국은 강대국 간 패권경쟁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기 쉽다. 국내정치에 미치는 이들 강대국들의 원심력도 강해지면서, 국내적으로 분열과 반목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최근 친일논쟁이 그 예다.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 기존 우리의 대외정책은 북한이나 미국과 같이 하나의 점과 같은 관계에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 현재는 미국과 일본, 자유민주주의 가치외교라는 선형적 사고로 대응하고 있다. 이는 선으로 그어지는 분열과 갈등의 확대로 나타난다. 다양한 점과 선이 공존하면서, 서로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면(Zone)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국제정치는 보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상대는 절멸시키거나 파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각자의 이해를 지닌 동등한 생존체로 본다. 갈등보다는 협력과 공감의 세계를 중시하고, 공존·공동체적인 인식의 확대에 더 중점을 두는 세계다. 국내정치적으로는 공감대 형성의 중시, 공화주의의 재발견이 필요하다. 국제정치적으로는 자기 파괴적인 민족국가 체제의 이기심, 편견, 적대성을 넘어서서 지구촌 운명공동체, 공동안보, 협력안보가 더 중시되는 새로운 전략사고의 발현이 필요하다. 민주·민생·공화·평화주의 원칙에 입각한 국민 화합형 통합국가, 평화·안보의 균형을 잡은 스마트국가, 그리고 국제적 가치를 선도하는 표준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시대를 꿈꾼다.
김흥규 (사)플라자프로젝트 이사장 겸 아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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