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예산안에 풍기는 인텔의 향기
얼마 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를 들렀다. 실리콘밸리에 온 이상 ‘반도체의 왕’ 인텔을 안 볼 수 있나. 가이드를 자처한 지인에게 인텔 본사에 위치한 인텔박물관에 가보자고 했다.
“거기는 안 가봐도 돼요. 요즘은 사람들이 안 가요.”
빅테크에서 수십년을 근무하다 몇달 전 퇴사한 그는 정색을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반도체 왕국은 이제 거기에 없습니다.”
‘인텔 인사이드’의 신화가 실리콘밸리에서 빠르게 지워지고 있다. 29일(현지시간) 기준 인텔의 주가는 주당 19달러, 시가총액은 837억달러다. 2000년 닷컴버블 당시 주가는 75달러, 시총은 5000억달러였다.
올 초 미국 정부는 반도체 부활을 꿈꾸며 인텔에 26조원을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추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인텔의 지난 2분기 매출은 1년 전에 비해 감소했고, 순손실은 2조원을 넘어섰다. CPU의 아성은 AMD에 의해 금이 가고 있고, 파운드리는 TSMC와 삼성전자의 벽에 꽉 막혀 있다. “인텔이 50년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를 맞고 있다”는 한탄이 안팎에서 나오는 이유다.
인텔은 왜 추락했을까. 실리콘밸리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패착은 비용절감을 통한 단기 실적주의다. 인텔은 2010년대 중반 ARM과 함께 모바일 시장에 진출하려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경쟁사들이 치고 나오자 2016년 브라이언 크러재니치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1만2000명을 해고하면서 허리띠 졸라매기에 나섰다. 이때 능력 있는 고연차 연구원들이 대거 AMD와 애플로 이동했다고 한다. 인텔의 40년 노하우는 그렇게 경쟁사로 넘어갔다. 비용절감은 투자 오판으로 이어졌다. 오픈AI는 인텔에 지분 15%를 10억달러에 사달라며 협업을 제안했지만 인텔은 거부했다. ‘빠른 시간 내 투자금 회수가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성장이 둔화됐음에도 인텔은 ‘고배당주’를 추구했다. 주당 배당금을 꾸준히 늘렸고, 자사주는 계속 매입했다. 주주환원을 강화한다는 취지였지만 곳간은 계속 비어갔다.
뒤늦게 위기감을 느낀 인텔은 반도체연구소와 파운드리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한번 뺏긴 주도권과 인재를 되찾아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인텔의 기업문화가 크게 바뀌지 않는 이상 반전은 어려울 것이라는 게 실리콘밸리의 시각이다.
2025년 정부 예산안을 보니 인텔의 향기가 난다. 내년도 정부 예산은 677조원이다. 3년 전인 2022년 총지출(682조원)보다 5조원 적다. 정부는 “허리띠를 졸라매서 비효율적인 부분을 과감하게 줄였다”고 했다. 비용절감을 우선한 인텔이 했던 말이다.
감세로 재원여력을 탕진하는 것도 닮았다. 정부의 올해 세법개정안에 따르면 2025~2029년 5년간 18조원이 넘는 세수가 또 줄어든다. 감세에 따른 혜택은 고소득자, 대기업에 집중된다. 고배당으로 큰손들의 주머니를 채워주면서 정작 자신의 곳간은 탕진시킨 인텔이 걸었던 길이다.
정부는 올해 대폭 삭감했던 연구·개발(R&D) 예산을 내년 원상복구시켰다. 하지만 올해 예산 지원이 끊기면서 중단되거나 조기종료된 사업이 1100여개에 이른다. 언제든 예산이 삭감될 수 있다는 불신도 커졌다. 대규모 해고와 보수적 투자로 혁신역량을 훼손시킨 뒤 뒤늦게 파운드리 투자를 늘리는 인텔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도 그랬다.
정부의 축소경영은 이미 민간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도서관, 박물관 등의 사업이 줄줄이 축소되거나 중단되면서 프리랜서, 문화예술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고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이 줄어들면서 민간 건설사들도 경영이 어렵다. 막힌 돈줄은 시차를 두고 내수경기를 꽁꽁 얼리고 있다. 재정지표를 개선시키려는 정부의 단기적 성과주의에 시장 밑바닥부터 골병이 들어가는 셈이다.
국내총생산(GDP) 순위를 보면 한국은 어느새 13위까지 밀려나 있다. 이탈리아, 캐나다를 넘어 G8으로 가겠다던 몇해 전 기대와 달리 지금은 2029년께 인도네시아에 따라잡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성장 둔화 위기 속에 정부가 택한 내년도 전략은 ‘비용절감’으로 요약된다. 쓰지 않고 지키는 것만으로 한국 경제를 떠받칠 수 있을까. 을씨년스럽기만 했던 인텔 본사 건물이 자꾸 떠오른다.
대규모 감세를 하면서도 긴축으로 재정건전성을 지켰다는 정부의 자화자찬이 그닥 미더워 보이지 않는 이유다.
박병률 콘텐츠랩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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