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제국’의 길과 소녀상 [특파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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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전체가 '기억의 공간'으로 불리는 독일 베를린에는 독일제국 시대가 설핏 드러나는 공간도 있다.
아프리카 국가와 독일 식민지 '개척 영웅 '들의 이름은 아프리카 지구 곳곳에 길 이름으로 새겨졌다.
한 활동가는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프리카 지구는 이제 반식민지의 공간으로 바뀌었다"고 자긍심을 보였다.
이곳에서 소녀상이 단순히 한·일 관계나 역사적 갈등의 수단쯤으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는 미테구의 독일인들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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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예지 | 베를린 특파원
도시 전체가 ‘기억의 공간’으로 불리는 독일 베를린에는 독일제국 시대가 설핏 드러나는 공간도 있다. 베를린 미테구 베딩 지역에 있는 ‘아프리카 지구’다. 이곳엔 식민지 사람들을 ‘인간 박물관 ’에 전시하자는 기획을 만들어냈던 독일제국의 기억이 묻어 있었다. 19세기 독일령 동아프리카(탄자니아·부룬디·르완다 등) 식민지 관리를 총괄했던 카를 페터스는 가혹한 통치로 “피의 손”, “교수형 집행인 페터스”로 불렸지만, 독일에선 제국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도 평가받았다. 그의 이름을 딴 길 이름인 ‘페터스의 거리’(Petersallee)가 아프리카 지구 위에 있었다.
아프리카 국가와 독일 식민지 ‘개척 영웅 ’들의 이름은 아프리카 지구 곳곳에 길 이름으로 새겨졌다. 이곳에 뿌리를 내린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은 평온을 누려야 할 공간 앞에서 늘 ‘가해자의 역사 ’를 맞닥뜨리는 셈이었다 .
하지만 지난 23일 페터스의 거리 앞에서 작은 축제가 열렸다. 카를 페터스의 이름을 내리고 두 개의 새 표지판을 달기 위해서였다. 독일의 식민 지배에 대항한 탄자니아인들의 저항운동 이름을 딴 ‘마지마지알레’(Maji-Maji-Alle)와, 마찬가지로 독일 식민지였던 나미비아의 아파르트헤이트(‘분리’를 뜻하는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했던 여성 운동가 안나 뭉군다 이름을 딴 표지판이다. 탈식민주의 운동가들의 오랜 요구와 미테구 의회의 결정, 법정 싸움 끝에 얻어낸 결실이기도 했다.
식민주의의 역사를 가리키는 길 이름은 계속해서 새 이름으로 교체됐다. 한 활동가는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프리카 지구는 이제 반식민지의 공간으로 바뀌었다”고 자긍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 72살의 탄자니아 출신 활동가 음니아카 수루루 음보로는 “40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도시는 변하고 있는 것일까? 카를 페터스가 사라진 이 길목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철거 위기에 놓여 있다. 이곳에서 ‘아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소녀상은 4년 전 미테구 공공부지에 세워져 일본 정부의 압박에도 자리를 지켰지만, 미테구청은 “더 이상의 기간 연장은 불가하다”며 소녀상을 설치한 시민단체에 9월 말까지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이 결정을 철회해 달라고 청원한 미테구민 수는 이제 3천명을 넘겼다. 한 아프리카계 남성은 소녀상 앞에서 과거 독일군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을 했던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고 한다. 그는 아리가 자신의 여동생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소녀상을 세운 코리아협의회는 지난해까지도 베를린 지역사회의 학교와 청소년 단체에서 아이들을 만나 일본을 넘어 독일, 르완다 등에서 발생한 식민지 시대 전시 성폭력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곳에서 소녀상이 단순히 한·일 관계나 역사적 갈등의 수단쯤으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는 미테구의 독일인들이 말해주고 있다. 슈테파니 렘링거 미테구청장은 카를 페터스의 이름이 거리에서 사라진 것은 “옳고 좋은 일”이라며 시민 사회에 감사함을 표하곤, “너무 오래 걸린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녀상을 향한 그의 마지막 답변이 궁금하다.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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