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 박정훈·백해룡을 기다리며 [세상읽기]
박록삼 | 언론인
문재인 정부 때 공직 사회 내부를 고발한 이들이 있었다. 청와대 특별감찰반이었던 김태우씨는 공무상 취득한 공직 비위 정보를 폭로했다. 그의 폭로는 당시 정권을 흔들었고 심각한 균열을 냈다. 비슷한 시기 신재민 기획재정부 사무관은 청와대가 케이티앤지(KT&G)와 서울신문 사장 교체 과정에 개입했다고 폭로해 청년 세대 민심 이반의 방아쇠 구실을 톡톡히 했다.
논란은 컸다. 대법원 최종 유죄를 받은 김씨나 좌충우돌했던 신씨 사례는 정치적 의도 등을 의심받기도 했다. 여하튼 문재인 정부가 정치윤리적으로 철저하기보다는 관행에 안주했던 탓이 컸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가치와 철학을 통해 국정의 방향과 비전, 정책적 과제를 효과적으로 공유하지 못한 채 ‘구호적 개혁’을 추진한 세력으로서 겪어야 했던 한계이기도 했다. 안정 지향적인 공무원들로서는 어설프게 변화와 혁신을 꾀하는 모습의 권력에 저항하고 싶었을 수 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라 해도 관료 집단의 적절한 견제와 감시는 중요하다. 특히 공무원은 언론도, 국회도 미처 접할 수 없는 내밀한 진실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집행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내부 고발, 공익 제보는 권력의 부패와 비리를 막는 긴요한 수단임이 분명하다.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질적 발전의 역사 속에는 일찍이 이문옥 감사관, 이지문 중위, 윤석양 이병 등 관행화한 권력의 비리와 부패를 용기 있게 고발한 상징적인 인물들이 있었다.
그 공직 사회가 보여줬던 최소한의 양심과 기개가 2024년 윤석열 정부 앞에서 멈췄다. 전문 관료로서 당당함은커녕 오히려 윤석열 정부의 무능과 부정, 불법과 위법에 동조하는 공범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전락한 듯하다. 친일, 역사 지우기, 방송 장악, 수사 외압, 대통령 배우자 비리 비호 등 각종 논란과 의혹이 국민권익위, 방송통신위, 국가보훈부, 외교부, 검찰청, 경찰청, 국토교통부, 법무부 등 다수 정부 부처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상식과 정의를 따르며 성실히 업무를 수행했던 해병대 박정훈 대령은 항명 혐의로 기소됐고, 세관이 연루된 초대형 마약 수사 과정 중 외압 의혹을 얘기한 백해룡 영등포서 형사과장은 지구대로 좌천돼서 밀려났다.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사건 종결 처리 압박에 극심한 자괴감을 호소했다는 국민권익위 부패방지국장 직무대리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내몰렸다. 온갖 꼼수와 위법 의혹 속에 방송 장악 속도전을 펼친 방통위원들은 국회 청문회에서 미꾸라지처럼 답변 거부로 일관하고 있다. 방통위 공무원들도 그 곁에서 덩달아 침묵할 뿐이다.
공무원들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부정하고, 존립 근거를 갉아먹고 있다. 혹여나 ‘공무원은 영혼이 없는 존재’라는 자조적인 말로 자신들의 책무와 역할을 얼버무릴는지 모른다. 하지만 ‘영혼의 부재’를 앞세워 자신의 책임을 애써 외면하는 사이 국가의 안위는 너무도 위태로워졌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천연덕스럽게 유대인을 학살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하며 ‘악의 평범성’을 말했다. 지금의 공무원들을 그에 빗댄다면 억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가 지적했던 ‘생각의 무능력’, ‘무사유’는 지금 여러 부처의 공무원들에게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는 핵심 단어다. 절실하게 성찰하고 돌아보며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점검해야 할 핵심 사유가 될 것이다.
분명히 공직의 출발은 단순한 밥벌이 수단만이 아니었을 테다. 무책임한 침묵에 빠져 있다가 훗날 자책감과 자괴감으로 얼마나 괴로워질지 예상해야 한다. 상식을 가진 공직자로서, 최소한의 상식과 건강한 국가관을 가진 공직자로서 내부 고발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괴감에 빠지거나 순종하기보다 부당하거나 위법한 지시에 원칙으로 대응하며 꼼꼼히 기록하고 자료를 챙겨야 한다. 내부 고발은 공명심이나 소영웅주의도 아니고 조직과 동료에 대한 배신도 아니다. 외롭게 서서 고통받는 동료의 손을 잡아주는 일이자 공직자로서 국민에 대한 책임감의 발로다. 거창한 기자회견도 필요 없다. 그저 언론이 물을 때, 국민들이 의문을 품을 때 있는 그대로 사실을 얘기하면 된다.
권력이 벌이는 온갖 정치적, 형사사법적, 사회적 패악을 애써 눈감아주는 것은 결국 공무원 스스로 공범으로 자리매김하는 일이다. 왜 공직에 들어섰는지, 현재 하는 업무가 국가와 국민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사유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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