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신종근의 'K-리큐르' 이야기…녹두장군과 죽력고

성도현2 2024. 8. 2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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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이에 연합뉴스 K컬처 팀은 독자 제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신종근 전시기획자.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미술과 술' 칼럼니스트.

'죽력고' 제조 기능 보유자 송명섭 씨 대나무에 열을 가하여 짜낸 진액 '죽력'으로 제조되는 전통주 '죽력고(竹瀝膏)'가 전북 정읍시의 대표적인 향토주로 등장한다. '죽력고' 제조기능보유자 송명섭(전북도 무형문화재 6-3호.45.정읍시 태인면)씨가 '죽력고'를 내리고 있다. /박희창/지방/2004.12.13 (정읍=연합뉴스) changhip@yna.co.kr

육당 최남선 선생은 1937년에 160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한 '조선상식'이란 글을 해방 이후 모아서 만든 저서 '조선상식문답'에서 이강주, 감홍로와 함께 조선의 3대 명주로 죽력고를 꼽았다.

죽력고는 원래 전라도 지역 곳곳에서 빚던 술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그 맥이 끊겼다. 다행히 현재 죽력고를 빚고 있는 송명섭 명인의 외할아버지가 만든 비전이 전해졌다.

한약방을 운영하던 송 명인의 외조부는 약으로 사용하기 위해 죽력를 빚었고 명인의 모친에게 이어졌다. 모친은 양조장으로 시집을 가서 다시 아들인 송명섭 명인에게 이어져 2000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송 명인은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48호 및 전북 무형문화재 제 6-3호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명섭 명인은 '송명섭 막걸리'로도 유명하다.

죽력고와 송명섭 막걸리

녹두장군 최후의 술

본래 한약재로 쓰이는 죽력으로 만들지만, 죽력을 추출이 어려워 현재는 전북 정읍에서 소량만 생산한다. 송 명인은 죽력고를 만드는 법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공개하지만, 워낙 어려워 대부분 중도에 포기한다고 한다.

죽력은 대나무의 진액으로 대나무에 불을 쬐어 추출하는 데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고 대량생산이 매우 힘들다. 이 죽력에 생강. 꿀, 솔잎, 대나뭇잎, 창포, 계피를 섞어 증류하면 죽력고가 되는 것이다.

죽력은 성질이 차고 피를 맑게 하며 노폐물을 제거하고 막힌 혈을 뚫어주는 효능이 있다. 성인병에 효과가 있어 예로부터 비상 상비약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춘향전에서 춘향이 이몽룡에게 올린 술이 죽력고이며 우암 송시열이 산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에서 '진실절미'(眞是絶味, 이 세상에 없는 별미)라며 극찬한 술이 죽력고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고부는 현재는 행정구역상으로 전북 정읍시에 속한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후 같은 해 12월 말에 안타깝게 전북 순창 쌍치에서 일본군에게 잡혀 모진 고문을 받고 만신창이가 됐을 때 죽력고를 마시고 원기를 회복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매천 황헌(1855~1910)은 자신의 문집 '오하기문'(梧下記聞)에 전봉준이 죽력고를 마신 후 기력을 찾아 허리를 꼿꼿이 편 상태에서 서울로 압송됐다고 전했다.

전봉준은 1895년 2월에 압송 후 4월에 교수형에 처했다.

박생광 화백의 '전봉준'(1985)

박생광(1904~1985) 화백은 자신의 작고하던 해에 전봉준이 압송되는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림 중앙에 있는 전봉준의 결의에 차 있는 눈을 볼 수 있고 그의 주변에는 오열하는 농민과 놀란 모습의 관군이 그려져 있다.

박 화백은 경남의 진주농고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시립회화전문 학교 (현. 교토예술대학)에 입학하여 전통적인 일본화 기법을 배웠다.

조선미술전람회, 일본미술원전 등에서 인정받고 해방 후 귀국해 활동했지만, 그의그의 채색기법이 일본적이란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후 말년에 이르러 일본화 영향이라는 불명예를 떨쳐버리고 민족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그의 작품이 인정받았다. 박 화백은 작고하던 해인 1985년에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르 살롱전에 특별 초대되기도 했다.

한국화가 박생광 화백 (서울=연합뉴스) 조성휘 기자 = 한국화가 박생광씨(81). 감히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는 기억 저편으로 잦아벼 버린 우리네 신명을 다시 일깨우는 화가로 작품의 화제와 색채와 구도가 풍기는 강렬한 인상, 젊은이를 부끄럽게 만드는 하루 10시간 이상의 작업과 노령이 무색한 카랑카랑한 음성, 일본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기쪽 화단에서 더 인정받고 있음에도 우리 것에 대한 유다른 고집을 보여준다. 1984.11.22 (본사자료)

'전봉준'은 박 화백이 회고전을 준비하면서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조그만 문간방에서 그린 가로 510㎝, 세로 360㎝의 대작이다.

당시 그의 작업실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작품을 한 번에 다 펼칠 수가 없어서 종이를 말아가면서 한쪽은 펼치고, 한쪽은 밀면서 그린 작품"이라고 했다. 작가도 전시장에 나와서야 작품의 전체를 처음 봤다고 한다.

죽력고의 전승

전봉준을 기리며 전북 정읍시 고부면에서 만든 술이 하나 있다. 정읍의 특산물이자 세계 10대 수퍼푸드인 귀리를 발효해 증류한 소주로 농업회사법인 유한회사 '귀리귀인'에서 만든 '1894혁명'이라는 술이다. 이 술은 '동학농민혁명 명주'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귀리귀인 고부지점에서 만든 '1894혁명'

송명섭 명인 외에 현재 죽력고를 빚어 판매 중인 곳이 두 군데 더 있다.

대나무라면 모두가 연상되는 전남 담양에 위치한,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22호 양대수 명인의 양조장 '추성고을'에서 만든 죽력고다.

양 명인은 대나무의 본고장인 담양에서 죽력고를 빚어야겠다는 신념으로 기존 죽력고보다 더 맑고 깔끔한 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대나무 추출물인 죽력의 제조장치 특허받아 맑은 죽력을 생산했다.

직접 생산한 죽력과 생강, 석창포, 계피를 넣어 숙성시킨 담양 죽력고가 탄생했다.

추성고을은 대나무로 만든 대잎술과 죽력고, 전남 담양 전통 민속주인 추성주도 만들고 있다. 추성고을은 5대째 가업을 잇는 전통 양조장으로 양대수 명인과 양재창 전수자가 양조장을 지키고 있다.

추성고을 죽력고

또 다른 한 곳은 태평주가(대표 이영춘)로 전북 진안의 진안고원 산지에서 자생하는 대나무에서 추출한 죽력으로 죽력고를 빚고 있다.

태평주가의 '녹두장군 죽력고'

녹두장군 전봉준의 기력을 살렸다는 죽력고.

조선 말 격동의 시대를 함께 견디며 여러 명인의 집념으로 이어진 귀한 문화유산임은 틀림없다.

혹자는 건강에 좋고 몸에 좋은 술이 어디 있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약으로도 죽력고는 몸에 좋은 술임이 분명하다. 물론 뭐든 과용은 금물이다.

<정리 : 이세영·성도현 기자>

rapha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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