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전 천안 일본인 6인 살해사건 '남산항일전투' 재조명

윤평호 기자 2024. 8. 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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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년 전인 1894년 9월 11일(음력 8월 12일) 지금의 천안 남산 일원 사직동에서 발생한 일본인 6명 살해사건을 동학농민혁명과 연관해 항일전투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주목받고 있다.

학술대회에서 송길룡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연구실장은 '천안남산전투의 전개와 의의'라는 제목의 기조발제를 통해 "'일본인 6명 살해'라는 사건명을 쓰게 되면 일본인 피해자 관점의 사건해석을 하게 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며 "사망한 일본인이 민간인이 아니고 신원을 확인하니 군인으로 판명됐고 자국 일본도 아닌 타국 조선의 충청도 천안 땅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하다가 실패해서 모두 사망"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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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역사문화연구회, 천안남산항일전투 학술대회 개최
동학농민혁명 연관성 주목, "우발 사건 아닌 항일전투"
일본식 도깨비 상으로 지목된 천안남산공원의 석상. 윤평호 기자

[천안]130년 전인 1894년 9월 11일(음력 8월 12일) 지금의 천안 남산 일원 사직동에서 발생한 일본인 6명 살해사건을 동학농민혁명과 연관해 항일전투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주목받고 있다.

천안역사문화연구회는 29일 오후 천안YMCA 강당에서 '동학농민혁명 천안남산항일전투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학술대회에서 송길룡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연구실장은 '천안남산전투의 전개와 의의'라는 제목의 기조발제를 통해 "'일본인 6명 살해'라는 사건명을 쓰게 되면 일본인 피해자 관점의 사건해석을 하게 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며 "사망한 일본인이 민간인이 아니고 신원을 확인하니 군인으로 판명됐고 자국 일본도 아닌 타국 조선의 충청도 천안 땅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하다가 실패해서 모두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어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군 점령을 기점으로 그 이후에 국권침탈에 항거하는 모든 행동들은 항일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다"며 일본인 6명 살해 사건이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사이의 모종의 전투를 함축한 만큼 '천안남산항일전투'가 제대로 된 사건명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최현식은 1980년 발간한 '갑오동학혁명사'에 "천안에서는 8월 12일 민간인들이 일본인 6명을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동학교인 등 10여 명이 교량공사를 하고 있는데 때 마침 일본인들이 이곳을 통과하려 함에 이를 제지하자 일본인들이 반항하여 시비를 벌인 끝에 일본인 3명이 현장에서 타살되고 3명은 도망하다 붙잡혀 살해되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에 사실을 규명하라고 항의하였다"고 기술했다.

학술대회에서 토론자인 천안향토문화연구회 김종식 회장은 1911년 지도를 근거로 남산주변을 조사한 결과 가야의원 뒤 민가골목을 1894년 남산항일전투의 위치로 비정했다. 김 회장은 일제 시대 천안 남산에 있던 신사는 사라졌지만 일본 신전을 지키는 석상과 신사를 지을 때 돈을 낸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이 남산에 남아 있는 점도 제시했다.

김경숙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장은 토론에서 남산항일전투 기념사업으로 학술조사연구, 표지판과 조형물 제작, 지역사 아카이브 등을 제안했다.

#충남 #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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