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기구’ 타던 아이와 함께 걸으면서 ‘숲’을 즐기다
[서울&] [김지석의 숲길 걷기]
서울 광진구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은 놀이시설로 알려져 있으나 숲길 걷기 코스로도 훌륭하다.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숲을 즐겨도 괜찮다. 그 정도의 양과 질이 있다.
1973년에 개장했으니 반세기 이상 된 숲이다. 산업화 이후 서울에서 처음 생긴 큰 공원이다. 1970년대 대학생 시절 이곳에서 미팅을 한 기억이 있다. 숲도 그만큼 성숙했을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아차산역(어린이대공원후문역) 5번 출구에서 출발한다. 진입로를 거쳐 후문을 지나 처음 나타나는 왼쪽 숲길로 들어가 시계 방향으로 크게 돈다.
편의상 6개 구역으로 나눠 살펴본다. 1구역은 동문 갈림길까지다. 양버즘나무, 전나무, 상수리나무 등 큰키나무가 많다. 작은 나무와 풀이 빈약해 아래쪽이 좀 허전하지만, 나무들이 시원하게 우뚝 서서 보기가 좋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지가 무성하다. 나무 아래 깔개를 펴고 한나절을 보낼 만하다.
무심하게 걸어가는데 뭔가 위에서 떨어진다. 올려다보니 청설모가 나무 꼭대기에 있다. 침엽수의 구과(열매)를 까먹다가 비늘조각(실편)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실편이 나무 아래 가득하다. 크기가 큰 걸 보니 소나무나 잣나무가 아니라 전나무 실편이다. 서울에선 드문 경험이다. 전나무는 어린 시절(유형기)이 20년 이상이어서 구과가 아득한 위쪽에 달리는 탓에 실물을 보기가 쉽지 않다.
이 공원에는 단풍나무 종류가 괜찮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단풍나무는 스무 종쯤 되는데, 여러 종류를 가깝게 만날 수 있다. 단풍나무 종류는 숲에서 잘 자라 결국 숲의 중심이 된다. 잎과 가지가 마주나고 균형이 잘 잡혀 단정해 보인다. 과와 종의 이름이 같은 단풍나무는 잎이 다섯 개나 일곱 개로 갈라지고 수피가 서어나무처럼 매끄러운 편이다. 가을에 ‘단풍’이 예쁘게 들어서 단풍나무다.
이 공원에서는 복자기나무가 두드러진다. 잎이 세 개씩 마주난다. 새빨간 단풍이 애절해 그것만으로도 공원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수피가 거칠게 벗겨지는 것은 고운 단풍을 돋보이게 하려는 장치라고 생각하자.
잎이 모란(목단)과 비슷해 학명에 네군도(‘목형’이라는 뜻)가 들어가는 네군도단풍과 수액이 몸에 좋다는 고로쇠나무도 여러 그루가 길가에서 잘 자라고 있다. 깊은 산속에 사는 부게꽃나무가 있는 것은 신기하다. 누군가 심었을 터인데 제법 우람하다. 스스로 알아서 잘 자랐다고 보는 게 좋겠다. 단풍나무와 비슷하면서도 잎과 꽃, 수피의 모양이 차이가 있다.
2구역은 구의문 입구까지다. 초반에 데크길을 설치해놓았다. 데크길은 대개 숲을 가로지른다. 그래서 나무를 가까이서 보고 만져볼 수도 있어서 좋다. 나무는 본성에 걸맞은 독특한 촉감을 제공한다. 죽 심어놓은 산딸나무에는 딸기를 닮은 붉은 열매가 가득 달려 있다. 밋밋한 맛이니 먹어볼 필요는 없다. 얼룩무늬 수피에 열매와 마주나는 잎이 모두 깔끔하다.
어린 열매를 단 상수리나무 가지 조각이 길에 많이 떨어져 있다. 가지 단면이 칼로 자른 것처럼 매끈하다. 도토리거위벌레의 짓이다. 딱딱하지 않은 새 도토리에 구멍을 뚫고 알을 낳은 뒤 입으로 가지를 잘라 땅으로 떨어뜨린다. 알에서 나온 애벌레는 땅으로 들어가 겨울을 나고, 성충이 되면 같은 행동을 되풀이한다. 새끼손톱 크기의 성충이 여러 시간에 걸쳐 가지를 자르는 모습을 보면 생명체의 신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3구역은 데크길과 시멘트길에 다시 데크길을 지나 포장도로까지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숲을 통과하는 흙길도 있다. 참나무 종류와 때죽나무, 조릿대, 조팝나무 등이 나타난다. 체계 없이 잡다하다는 느낌은 들지만 상당히 무성하다. 2구역과 더불어 자연숲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곳이다. 숲이 잘 형성되려면 수종을 잘 선택해 심는 것만큼이나 자생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아직 그 정도까지 충분하지는 않지만, 여름 한낮의 서울에서 이만한 숲길이면 우수하다.
4구역은 정문까지다. 왕복 2차선 아스팔트길이다. 숲의 밀도는 낮으나 좌우 큰 나무들의 생육 상태는 이 공원에서 가장 낫다. 복자기나무는 단풍 드는 가을에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길 오른쪽에 과수원인 듯이 많이 심어놓은 자두나무, 모과나무, 감나무, 배나무 등은 젊음을 과시한다. 유실수는 도시 숲에 어울린다. 열매가 골고루 달려 있다. 나무들 가운데에 원두막을 지어 열매를 맛보며 쉬어갈 수 있도록 하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길 왼쪽의 참나무 종류와 물오리나무, 은행나무 등도 자리를 잘 잡고 모양을 낸다. 메타세쿼이아와 버드나무, 수양버들도 키가 크고 운치가 있다. 수양버들은 줄기가 비틀어지면서 올라가는 목리 현상이 뚜렷하다. 그만큼 환경 변화에 대한 저항력이 커진다. 잘 자란 나무는 자신만의 아우라를 갖는다. 공원이 빛나려면 이런 나무가 많아야 한다.
5구역은 정문광장에서 숲길 속 포장도로를 따라 풋살장까지다. 양버즘나무와 왕벚나무와 산딸나무가 주역이다. 왕벚나무는 꽃이 좋다. 잎이 나기 전에 풍성하게 피었다가 한꺼번에 진다. 계절의 상징이 될 만하다. 하지만 꽃이 지고 나면 밋밋하다. 수명도 길지 않아 이미 노쇠한 모습을 보인다. 벚나무 종류는 잎 아래 양쪽에 볼록한 작은 선점(꿀샘)과 줄기에 있는 입술 모양의 피목(껍질눈)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피목은 나무가 호흡하는 통로이고, 선점에서 나오는 꿀은 곤충을 유인해 어린잎을 보호한다. 양버즘나무는 이 구역의 것이 가장 멋있다. 역시 넓은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나무다. 마음껏 가지를 뻗으니 거대한 새가 날아가는 듯하다.
6구역은 출발점인 후문까지다. 살구나무와 버드나무, 상수리나무, 일본잎갈나무(낙엽송), 자작나무가 눈에 띈다. 살구나무는 꽃도 열매도 예쁘다. 벚나무가 언급되지 않던 시대부터 친근하게 자리를 잡은 나무다. 열매가 너무 맛있어서 많이 심지 않는 걸까.
길가 철책에 미국담쟁이가 한창이다. 손바닥 모양의 잎이 담쟁이덩굴 잎보다 크다. 번져나가는 속도로 보면 생태계 교란 식물로 지정된 환삼덩굴에 못잖다. 잎에 힘이 넘쳐서 짙은 초록색으로 반짝반짝한다. 그 자체로 좋다. 바닥에는 결초보은이라는 고사의 주인공인 그령이 한창이다. 비바람에 시달리고 동물과 사람의 발에 밟히면서도 끈질기게 자란다. 이 정도는 돼야 사랑의 풀(lovegrass)로 불릴 수 있다. 원예종으로 많이 심는 수크령보다 친근하다. 팥의 조상인 새팥도 왕성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씨앗의 색과는 반대로 새팥의 꽃은 노랗고 새콩과 돌콩의 꽃은 자주색이다. 꽃댕강나무도 꽃이 한창이다. 별 모양의 꽃받침이 꽃이 진 뒤에도 계속 남는 게 특징이다.
지하철역 쪽으로 다시 온다. 눈에 거슬리는 게 있다. 대왕참나무라고 미국이 원산지인 참나무 종류가 있다. 줄기가 매끈하게 곧고 잎이 좌우로 모양 있게 갈라지는 나무다.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뒤 머리에 쓴 월계관의 나무이기도 하다. 이 나무가 수난을 당하고 있다. 지하철역에서 공원 후문으로 통하는 넓은 진입로에 이 나무 십여 그루가 ‘간판’이 됐다. 그냥 나무에 뭘 설치한 게 아니라 나무가 자랄 수 없게 해놨다. 그 뒤쪽에는 이 나무를 등나무처럼 굽히고 늘어뜨려 쉼터의 그늘막 나무로 만들었다. 말 못하는 나무이니 어떻게 해도 된다는 사고의 산물이다.
어린이대공원의 숲은 성숙해가고 있다. 놀이시설과 섞이다보니 끊어지고 성기게 된 곳도 있지만, 나무의 생명력은 그런 어려움을 이겨낸다. 제각기 특색이 있으나 1~4구역 쪽이 5~6구역 쪽보다 낫다. 음미하면서 구석구석 걷다보면 작지만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놀라움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공감하며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과 자연은 더 풍성해진다. <끝>
글·사진 김지석 나무의사·언론인 jisuktree@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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