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김시습 지혜를 만날 수 있는 이 곳”…6개의 보물 있는 부여 무량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낯익다. 생육신이고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썼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설잠(雪岑)은 김시습의 법명이다, ‘눈덮인 산봉우리’, ‘히말라야’ 란 뜻이다. 3세 때부터 한시를 지어 세종대왕도 인정한 천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분개해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양심과 지조를 지킨다며 응달진 뒤안길을 배회했던 생육신 김시습이 승려였단 사실은 생소했다.
21세 때 머리를 깎고 가난과 병고 속에서도 국외자, 방관자가 되어 저잣거리에서 술 마시고 시 읊으며, 통렬한 풍자로 38년 동안 광인 취급 받으며 선비인 듯, 스님인 듯 전국을 방랑하며 한 세상 풍운아로 살다가 무량사에 마지막 몸을 의탁했고 그곳에서 입적했다.
22세 때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자 김시습은 광화문에서 능지처참형을 당한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응부, 성승 등 다섯 충신의 머리를 몰래 훔쳐 강 건너 노량진 기슭에 매장해 줬다. 세조의 서슬 퍼런 기세에 다들 숨죽이며 벌벌 떨던 시절, 김시습은 어떤 마음으로 그랬을까.
‘수명이 한량없다’는 뜻의 무량사에서 자신의 재주를 펼쳐보지 못한 채 ‘쓸모없는 늙은이’(췌세옹, 贅世翁)라는 자조 섞인 호를 남기고 세수 59세에 쓸쓸하게 입적했지만 매월당 김시습의 정신만큼은 현재까지도 스승의 표상으로 남아있다.
아미타 부처를 ‘무량수불’이라고도 한다. ‘수명이 한량없는 부처’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흙으로 빚은 불상 중에 가장 큰 아미타 부처가 있는 부여 만수산 무량사에 ‘설잠 김시습’을 만나러 갔다.
무량사는 백제의 고도 부여가 내세우는 가장 아름다운 명찰이라고 한다.
백제의 옛 도읍지 충남 부여의 끝자락 외산면에 정몽주를 죽였던 이방원(태종)의 ‘하여가(何如歌)’가 생각나는 만수산(萬壽山, 575m)자락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 무량사가 있다. 신라시대에 범일국사가 창건하고 신라 말 무염선사가 중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 세조 때 김시습이 세상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다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병화에 의해 사찰 전체가 불타버린 뒤 조선 인조 때에 중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수산 무량사’란 현판의 듬직해 보이는 원목 기둥의 일주문을 지나니 널따란 공터가 보이고 이정표가 있다. 옛 무량사지를 발굴하고 있는 듯 옛 사지터 개발 배치 표지판이다. 산등성이로 둘러싸인 아주 넓은 산중 분지다. 원나라 침공 때 불에 타서 고려 고종 때 중창하면서 불탄 자리 일부는 놔두고 지금의 위치에 중건해 만수천을 경계로 동쪽이 옛터이고 서쪽이 지금의 무량사가 됐다.
만수천 극락교를 지나니 곧바로 좌측에 입적한 지 400여년이 훨씬 넘었지만 조성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 김시습 부도탑이 깨끗이 정돈돼 있다. 고려전기 것으로 알려진 당간지주를 우측에 두고 천왕문에 들어서니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석등과 석탑 그리고 2층의 극락전이 일직선상에 놓여있어, 휘어진 소나무 한 그루와 큰 그늘을 드리운 수백 년은 됨직한 해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어우러지니 한 폭의 그림이다. 여기에 눈이 쌓이면 얼마나 아늑하고 정겨울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극락전에 있는 아미타삼존불상, 괘불탱화, 삼전패(三殿牌)등을 포함해 6점의 보물이 모두 천왕문부터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특이한 형국이다.
아미타 삼존불상이 있는 극락전은 외관상으로는 중층이나 내부는 상하 구분 없이 통층으로 돼 있는 흔치 않은 중층의 불전 건물이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웅장한 건물로 조선 중기 건축양식을 잘 반영해 내부 천장은 초호화형 장식들이 돋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중층 불전은 총 4개로 무량사 극락전 외에 화엄사 각황전, 법주사 대웅보전, 마곡사 대웅보전이 있다.
극락전 아미타삼존불상은 1633년(인조 1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중앙에 있는 본존불상인 아미타불은 높이 5.4m, 좌우 협시보살이 높이 4.8m로 소조불상 중 완주 송광사 삼존불과 함께 가장 크다고 알려졌다. 소조불상은 나무와 새끼줄로 기본 형태를 만든 후 진흙을 발라 형상을 만들어 건조시킨 후 금박을 입힌 불상이다. 후불탱화는 삼베로 이은 바탕천에 족자 형태로 그린 것으로 크기가 8m에 달해 조선 후불화 중 가장 크다고 한다.
극락전 앞 5층 석탑은 백제와 신라의 석탑 양식이 융합된 고려 초기작품으로, 7.5m 꽤 커서 보기에 시원하면서 탑을 받치는 기단이 단층으로 뭉툭하여 위압감도 느껴진다. 현재 남아있는 백제시대 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뿐이지만, 백제탑의 영향을 받은 탑들이 고려 초기까지 옛 백제 지역에 조성됐고 무량사 5층 석탑도 그 중 하나이다.
산중 분지에 있는 절임에도 오래된 극락전 앞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수백년된 느티나무, 소나무와 5층 석탑, 석등 등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움과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나무 밑 돌 의자에서 무념무상으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극락보전 우측엔 명부전이, 좌측엔 선방 우화궁이 있고 우화궁 뒤쪽으로 조그만 석등과 백일홍이 붉게 피어 있는 영산전 앞마당을 통해 올라가면 현판도 없이 이정표만 있는 김시습 영정각이 외롭게 있다. 그래서인지 극락전 뒤편 만수천 넘어 있는 삼성각 아래 김시습이 머물렀던 자리에 최근 고증을 거쳐 돌 축대 위에 복원한 선방 청한당 현판이 돋보인다.
청한당(淸閒堂)의 한(閒)자를 뒤집어 써놓아서 현판만 봐서는 도통 글을 알 수 없지만 ‘청한자(淸閒子)’는 김시습의 호 중 하나여서 무량사가 김시습과 인연을 중시 여긴다는 의미로 붙인 듯하다.
임진왜란으로 병화를 입은 무량사는 인조때 진묵대사(1563~1633년)가 중창했다고 하며 현재의 극락전 및 삼존불도 이때 만들어 졌다고 한다. 무량사 극락전 옆 선방인 우화궁(雨花宮) 기둥 벽(柱聯)에는 석가모니의 작은 화신(化身)으로 추앙받는 진묵대사의 시가 걸려 있다.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 삼으며, 산을 베게 삼아 달빛은 촛불 되고 구름은 병풍이며 바닷물은 술통이라. 크게 취해 한바탕 신바람 나게 춤을 추고 싶은데 장삼자락이 곤륜산(히말라야)에 걸릴까 걱정이 되네.”
진묵대사의 호탕한 기풍이 느껴진다. 옛날에 득도한 고승들이 사소한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서민과 희로애락을 함께 했듯이 진묵대사도 도통한데다 풍류를 즐길 줄 알며 술을 좋아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술이라고 하면 먹지 않고 곡차(穀茶)라고 해야만 마셨다고 해 이에 따른 일화도 많다. 불가에서 술을 곡차라고 하는 말도 진묵대사에게서 유래됐다고 한다.
전북 김제 만경에서 태어난 진묵대사는 현재 부도가 있는 전북 완주 서방산 봉서사(현 태고종)에서 주로 머물렀고 전주, 김제, 부안 등 전북 지방 곳곳에 진묵대사와 얽힌 수많은 전설이 있는데 무량사와 완주 송광사의 삼존불상에 얽힌 전설도 있다.
신통력이 대단해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했던 진묵선사의 전설과 함께 선방 우화궁 주변에 진묵선사의 오도송이 걸리게 된 것이다. 부여 무량사와 완주 송광사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비슷한 크기의 우리나라 최대의 진흙으로 빚은 소조삼존불이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년)이 59년의 이승살이 중 38년을 설잠 스님으로 지내다 막을 내린 자리에는 ‘영정각’이 지어져 있고 그곳엔 자화상이라고 알려진 초상화가 보물로 지정돼 영광을 누리고 있다. 21세 나이에 세조의 찬탈을 지켜보며 사바 세계의 추악함을 자각하고 읽던 책을 불사르고 승려가 돼 전국을 방랑하다 그 방랑의 마지막 2년을 병고와 싸우며 무량사에 몸을 의탁했다.
제자이자 벗이며 생육신 중 한 사람이었던 남효온(南孝溫, 1454~1492년)이 “그는 저자에서 미친놈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놀고 혹은 취해서 길에 쓰려져 어리석게 웃기도 했다”고 말했던 설잠 매월당이 생을 마감한 곳이 이곳이다.
오세동자(五歲童子)로 불리며 천재성을 발휘했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세상을 조롱하면서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며 살았고, 묘비에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달라고 했던 매월당 김시습이 그렸던 사회는 무엇이었을까.
매월당은 사리(유골)도 떠돌다가 2017년이 돼서야 안식처인 무량사로 돌아와 부도탑에 안치됐기에 죽어서도 꽤 오래 방랑하며 편안하지 못했다.
글을 쓰고 시를 지은 김시습은 31세 때 경주 금오산(남산) 자락 용장사에 매월당을 짓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다. 세조가 죽고 나서야 서울로 올라와 문인들과 어울려 유교와 불교의 참뜻을 강구하기도 했다.
유·불·선 3교를 넘나든 사상가이며, 절의(節義)의 상징으로 율곡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 평가도 했지만 세상에 대해 절개와 지조를 지키기 위해 자학적으로 미치광이처럼 방랑자로 살았던 김시습. 그리고 곡차(술)와 춤을 좋아하며 중생의 모습으로, 신통력과 기이한 행동의 도인이었던 진묵대사. 두 귀인들의 얼이 깃든 무량사에서 인생의 희비애락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천하를 풍미했던 두 스님, 매월당 설잠스님과 진묵대사. 그들이 원하는 미래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맑은 마음으로 편안하게 쉬는 사람’을 뜻하는 김시습의 또 다른 호인 청한자(淸閒子)처럼 모든 이들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의 모습을 꿈꾸지는 않았을까.
그러한 사회를 위해서는 배려와 양보가 더욱 필요함을 무량사에서 느끼고 간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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