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3. 파주 영집궁시박물관
2024 파리 올림픽에서 한국 양궁 선수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10연패를 달성한 여자 양궁팀, 3관왕을 차지한 김우진·임시현 선수가 활을 쏘는 모습은 너무나 멋졌다. 정말 한국인에게는 활쏘기에 특화된 유전자가 있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파주 예술인마을 헤이리를 찾았다. 파주 예술인마을 헤이리에 있는 ‘영집궁시박물관’(관장 유세현)은 지난 5월부터 ‘재미있는 정조의 활 이야기’ 특별전을 열고 있다. 11월30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특별전의 주인공은 조선 22대 정조 임금이다. 정조는 청소년 시절 활쏘기로 심신을 단련하고 왕위에 오른 후 활쏘기로 신하들과 유대를 강화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한 군주였다. 조선 최고의 명궁으로 꼽히는 정조와 대를 이어 궁시장 보유자를 배출하는 파주는 인연이 깊다.
■ 5대로 이어지는 궁시장 부자가 만든 박물관
성곽을 닮은 영집궁시박물관은 아늑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 정원에는 보랏빛 매발톱을 비롯한 여름 들꽃들이 한창이다. 영집궁시박물관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弓矢匠) 고 영집(楹集) 유영기 기능보유자가 2000년 설립한 활 화살 전문박물관이다. “아버님은 고향 가까이에 선인들의 슬기와 지혜가 담긴 활과 화살을 모으고 지어서 전통의 활쏘기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려 설립하셨지요.” 2022년 부친을 이어 궁시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유세현 관장의 집안은 화살을 만드는 장인의 맥을 잇고 있다. 박물관에 증조부 유창원의 초상화와 조부 유복삼, 부친 유영기(1935∼2023)의 사진이 걸려 있는 까닭이다.
조부는 무형문화재 제도가 생기기 이전부터 대한민국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화살 제작 장인이었고 1996년 국가무형문화재 궁시장 보유자로 지정받은 부친 고 유영기 관장은 많은 활동을 한 공로가 인정돼 2020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한다. 박물관에서 만난 한 장의 사진이 가슴 뭉클하게 한다. 작고한 유영기 보유자와 유세현 관장, 아들과 딸이 둘러앉아 화살 만드는 모습이 평화롭다. 이처럼 영집궁시박물관은 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현장이기도 하다.
■ 더 멀리 빠르고 정확하게
유호상 전수생의 안내로 전시관을 둘러본다. 입구에서 마주한 그림이 낯익다. 230년 전인 을묘년(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화성으로 행차하는 광경을 상세하게 묘사한 ‘반차도’다. 시선을 압도하는 반차도를 배경으로 ‘영전(令箭)’과 ‘신전(信箭)’이 전시돼 있다. 왕의 권위를 나타내듯 영전과 신전은 일반 화살보다 깃도 크고 색깔도 누런색이다. 반차도를 살펴보니 일반 병사들은 총을 들고 있으나 말을 탄 장교와 장관들은 활을 착용하고 있다. 정조가 재위한 18세기 후반 장용영과 훈련도감을 비롯한 조선 군대에서 장교 이상은 여전히 활을 사용했던 사실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활은 익히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익숙해지면 조총보다 훨씬 빨리 쏠 수 있는 강점이 있습니다.” 그렇다.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19세기 중반까지 활을 사용했다.
전시된 활과 화살의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시위를 푼 활의 모양이 ‘ㅇ’처럼 말려 있다. ‘부린활’이다. 각궁의 강한 탄력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둥글게 뒤집힌 활을 바로 펴 시위를 걸면 화살을 멀리 쏠 수 있습니다.” 활만큼이나 화살의 종류가 다양하다. 끝이 날카롭고 뾰족한 ‘세전(細箭)’과 버들잎을 닮은 유엽전은 익숙한 화살이다. 그러나 촉이 집게처럼 벌어진 것, 도끼날처럼 생긴 것도 있다. 쇠 대신 나무를 깎아 촉을 만든 ‘박두(樸頭)’와 소리를 내는 화살인 ‘효시(嚆矢)’도 여러 점 전시돼 있다. “대장이 효시를 쏘아 병사들에게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지요.” 우리 조상들이 활이나 화살이 낡거나 부서지면 해체해 재활용했던 까닭에 오래된 유물이 많지 않다. 전시된 화살은 대부분 유 관장의 부친과 유 관장이 복원한 작품이다.
아주 짧은 화살이 가지런히 전시돼 있다. 역시 복원품으로 ‘조선의 비밀병기’로 알려진 편전이다. ‘애기살’로도 불리는 편전을 넣어 쏘는 ‘통아’는 바늘과 실처럼 짝이다. 화살의 길이가 짧아 빠르고 훨씬 멀리 날아가는 것이 편전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굵고 검은 화살은 ‘철전’이다. “철전은 너무 무거워 쏠 때 앞으로 달려 나가며 쏴야 합니다.” 철전 곁에 전시한 김홍도의 작품이라 전해지는 풍속화를 살펴보니 정말 그렇다. 물론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도 활이 등장한다. 갓을 쓴 한량이 냇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을 바라보는 야릇한 그림인데 그가 들고 있는 화살이 유난히 굵고 크다. 앞에서 봤던 ‘철전’이다. 왜 철전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을까. 그것은 조선시대 무과의 필수과목이기 때문이다. 화약을 사용해 쏘는 로켓 화살인 신기전도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불에 타다만 25대 임금 철종의 어진 속에 우리 활쏘기의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 자세히 살펴보니 철종의 엄지손가락에 ‘깍지’가 끼워져 있다. 활시위를 당기는 엄지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해 소뿔을 깎아 만든 도구 ‘깍지’도 두 종류가 전시돼 있다. 밋밋하게 생긴 암깍지와 볼록 튀어나온 수깍지가 있는데 전투에 사용되는 강궁을 당길 때는 수깍지를 사용한다. 정조가 활을 쏘고 신하들에게 선물을 준 기록 ‘고풍(古風)’도 눈길을 끈다. 고풍을 통해 정조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장혁’과 곤장에 사용하던 ‘곤(棍)’도 과녁으로 사용했던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 화살 하나에 깃든 예술혼
화살은 만들 때 어떤 재료와 도구를 사용할까. ‘살대’ 혹은 ‘시누대’라 불리는 대나무를 비롯해 쇠심줄, 꿩 깃, 민어 부레 같은 재료가 나란히 놓여 있다. 민어 부레가 전통시대에 가장 뛰어난 접착제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민어 부레를 끓여 만든 풀로 깃과 쇠심줄을 붙였기 때문에 공방에는 부레풀이 끓기 마련이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상사와 오늬칼, 졸대 같은 공구도 눈길을 끈다. 먼저 대나무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곧게 펴고 껍질을 벗기고 불에 구워 진을 빼내야 한다. 명장의 손길이 닿아 반짝반짝 빛나는 도구들은 활과 화살 못지않은 전시물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는 것이 역시 재미있다. 중국 활과 몽골 활은 우리나라 활과 모양이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한둘이 아니다. 물소뿔을 사용하는 한국의 각궁과 달리 일본의 활은 무척 길지만 사정거리는 오히려 짧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해 인도, 영국, 아프리카, 아메리카 인디언이 사용했던 활과 화살도 전시돼 있어 한국과 외국, 또는 동양과 서양의 활을 비교해 볼 수 있다. 활과 화살의 종류가 한국처럼 다양한 나라는 달리 찾기 어렵다. 성능은 물론이고 아름다움에서도 한국 활이 으뜸이다. 역시 한국은 활의 나라다.
■ 한국인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공간
박물관 야외에는 한국의 전통 활쏘기를 체험할 수 있는 작은 활터가 있다. 올 초에 문을 연 아담한 공방도 갖추고 있어 재미난 체험과 여유로운 휴식이 가능하다. 박물관은 매년 국가무형문화재 궁시장 기획전 ‘살장이전’과 ‘지홍전’을 열고 있다. ‘영집’이 부친 유영기 선생의 호이고 ‘지홍(知弘)’은 유세현 관장의 호다.
영집궁시박물관은 다양한 기획전과 교육프로그램으로 한국 활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꾸준히 알리고 있다. ‘KB국민은행과 함께하는 박물관 노닐기’와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과 꿈다락 토요문화 학교’도 꾸준하게 열고 있는 교육프로그램이다. ‘휘파람을 부는 화살’, ‘신기전~달리는 불에서 귀신들린 화살까지~’, ‘옛 그림으로 보는 활 이야기’ 등 매년 새로운 주제로 특별전을 열고 있다.
한국의 활과 화살이 궁금한가. 그렇다면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서 청소년 권장 사이트로 선정한 영집궁시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라. 영집궁시박물관을 찾으면 오천년을 면면히 이어온 한국인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영집궁시박물관이 자리한 파주 헤이리는 대한민국에서 박물관과 미술관이 즐비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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