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고유성, 재즈 같은 변칙 찾아낸 희귀한 경험”…국립무용단 ‘행+-’ 3인 [인터뷰]
신입 이승연 박준엽 객원 이승주
“공동체와 그 안의 개인을 만나고
규율과 그것 너머의 변주를 마주할 시간”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2㎡의 작은 세계에 무용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선다. 행과 열을 맞춘 43명의 춤꾼들. 꾀꼬리 소리가 들려오면 새하얀 봄꽃이 흐드러지듯, 속도감 있는 발동작이 일사불란하게 이어진다. 숨막히도록 느린 전통의 춤(춘앵무)은 시간의 경계를 넘어 ‘현재의 춤’과 만난다. 국립무용단 신작 ‘행+-’(8월 29일~9월 1일까지, 국립극장)의 1장 중 한 장면. 이것은 다음 세계로의 전환을 위한 일종의 신호였다. ‘변주된 전통’와 ‘해체된 규율’의 암시였다.
정제된 흰 옷을 벗고, 색깔을 입은 무용수들은 긴 잠에서 깨어난다. 각성한 몸짓은 해방이자 일탈이다. 터져나오는 꽃망울처럼 에너지가 솟구친다. 규범을 파괴한 자유로운 몸짓은 오로지 ‘나’에게서 시작된다. 오래도록 전통의 한국춤을 수행해온 국립무용단의 신입 단원 이승연(22) 박준엽(25), 컨템포러리 춤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승주(32)가 만든 ‘오늘의 춤’이다.
이번 공연을 위해 오스트리아에서 날아온 이승주는 “‘행+-’장르를 떠나 한국춤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을 이동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그는 세계적인 현대 무용가 안애순과 국립무용단의 첫 만남인 이번 작품의 객원 무용수로 함께 했다. 2019년 ‘평행교차’로 호흡을 맞춘 이후 안애순 안무가의 ‘원픽’ 무용수다.
“뭔가,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승연)
입단 8개월차, 18.6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국립무용단 새 얼굴이 된 이승연은 지난 연습 과정을 돌아보며 이렇게 많았다. 사실 연습 기간 내내 고민이 많았다. 머릿속을 부유하는 무수히 많은 질문들에 답을 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찾는 과정이었다.
‘옥스포드 무용사전’, ‘세계현대춤사전’에 등재된 ‘현대무용계의 거장’ 안애순의 작업 방식은 기존의 안무가와 다르다. 답이 정해진 안무를 던져주기 전에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단계를 거친다. ‘평행교차’, ‘척’에 이어 안애순과 세 번째 작업을 진행 중인 이승주는 이 과정을 “무용수 자신의 고유의 것, 고유의 색깔을 끌어내는 작업”이라고 했다. 그것이 안애순 무용의 첫 걸음이다.
이승연은 “고유성을 찾는다는 작업 자체가 내겐 희귀한 경험이었다”며 “그동안엔 안무가 주어지면 그것을 어떻게 습득하느냐가 무용수에게 중요한 역할이었다면 안애순 선생님의 작업은 정해진 것이 없는데 정해져 있고, 자유를 주지만 자유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그 안에서 자유로워 보여야 했다”고 말했다.
안애순은 이 작업을 통해 무용수 스스로가 질문하고 답을 찾기를 원했다. 이승연은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이런 걸까 하면서 개개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무척 좋았다”고 했다.
이승주는 국립무용단 단원들과 안애순 안무가 사이의 연결고리이자 통역가였다. 그는 안애순 안무가와의 작업에선 “능동적인 수행자로의 역할을 고민한다”고 했다.
“무용수로서 수행하는 입장에선 표현과 기술을 명확하게 알려주면 편하겠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으세요. 무용수들 안에 잠재된 판타지를 끌어내고 그것이 안무가가 생각하는 지점과 맞을 때 작품 안에 녹아드는 거죠.” (이승주)
세 사람이 주인공처럼 등장할 2장의 초반부는 전통의 해체와 경계의 파괴로 카타르시스를 끌어올린다. 긴 팔다리를 쭉쭉 뻗다 몸을 휘감고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아찔한 난도를 오간다. “약속된 동선”만 존재할 뿐, 변칙과 즉흥으로 만든 장면에선 무용수들의 한계 없는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1장이 담아낸 규율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막중한 임무가 이들에게 주어졌다.
대학 졸업 이후 무용단체 ‘춤썬캡’에서 한국 춤과 동시대 춤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해온 박준엽은 전통과 현대의 선을 능수능란하게 넘는다. 그는 이 작업은 “개인의 고유성을 살리되 그 안에서 예측불가능한 움직임에 도달하는 과정이었다”며 “무용수 개개인의 장점을 살려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하는 경험이었다. 이를 통해 나도 모르는 움직임이 나오고, 재즈 같은 변칙을 발견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승주는 이들 사이에서 일종의 ‘팀장’ 역할이었다. 이승연과 박준엽은 “저희가 (이승주에게) 많이 의지를 했다”며 “안애순 선생님의 니즈를 빨리 파악하고 그것을 잘 조율해 우리의 것으로 만들도록 이끌어줬다”고 했다. 서로에 대한 칭찬이 마르지 않았다. 이승주는 두 사람에 대해 “춤도 기가 막히게 잘 추지만 무엇보다 잘 듣는 사람들”이라며 “협업의 기본은 ‘잘 듣는 것’인데, 다들 안테나를 세우고 나의 것을 비롯해 바깥의 상황도 잘 바라보고 듣는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온힘을 다해 뛰어든 ‘행+-’에 대해 세 사람은 “볼거리가 많은 무대”라고 입을 모았다. 이승연은 “전체적으로 미니멀하고 정제된, 절제의 미를 보여준다”며 “한국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하는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한국인들이 공동체로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가는 모습, 그 공동체 안에서 다양하게 개별화된 특수한 개개인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세 사람이 추천하는 관람법은 한 명의 인물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승연은 “한 인물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에 집중해 보면 70분 동안 변화하는 개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N차 관람을 할 수 밖에 없는 방식이다. 이승주와 박준엽도 “모든 장면마다 같은 동작을 해도 제각각 표현하는 43명의 무용수를 만나는 재미가 있다”고 귀띔했다.
저마다의 경계를 넘었다. 온몸으로 한국춤을 체화한 국립무용단 단원들과 유일한 객원 단원 이승주는 서로 다른 선(線)을 밟아 같은 곳에서 만났다.
‘행+-’는 궁중무용인 ‘춘앵무’를 모티프 삼아 출발해 각각의 무용수들의 군무와 독자적인 개인의 춤으로 변주, 확장한다. 이 과정에서 전통의 춤과 동시대의 춤, 한국의 춤과 서양의 춤이 경계를 허문다.
이승주는 “외국에서 태동한 무용을 전공한 입장에서 한국춤의 작업을 통해 그동안 내가 이 작업을 해보고 싶었었나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스스로도 몰랐던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했다. 오스트리아의 안톤부르크너예술대를 나와 무용수이자 안무가로 유럽 무대에 활동 중인 이승주가 ‘한국춤’을 기반으로 하는 단체와 작업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국춤과 현대무용은 호흡, 에너지의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한국춤이 ‘응축의 힘’을 지녔다면, 현대무용은 ‘발산의 미학’을 가진다. 국립무용단 단원들은 경계를 넘는 작업을 위해 스트리트 댄스 중 하나인 하우스 장르를 배우는 시간도 가졌다. “새로운 춤을 배우는 과정에서의 즐거움은 컸지만“(박준엽) 수월했던 것은 아니다. 안애순 안무가가 가장 강조한 것도 두 장르의 경계를 물 흐르듯 오가도록 ‘(힘을) 줬다 뺐다’하는 작업이었다.
박준엽은 “개인적으론 스탠다드하게 정해진 움직임은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잘 해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작업은 굉장히 즉흥적이라 거부감과 두려움이 컸다”며 “해보지 않은 작업이라는 데에서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것을 해내며 가보지도 못한 선에 도달하니 새로운 세계를 마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승주에게도 낯선 경험은 깨달음의 시간이 됐다. 그는 “외국에서 ‘아시안 댄서’로 활동하다 보면 그들보다 왜소한 신체적 약점으로 인해 에너지를 더 크게 써야 했고, (에너지를 더 발산하라는) 교육을 받아왔다”며 “한국춤은 기술적으로 현대무용과는 반대의 에너지를 발산하다 보니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배움이 컸다. 내겐 플러스만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70분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석 달간 매진하는 동안 세 사람은 저마다의 성장을 거쳤다. 지금의 경험을 위한 시간들은 이들이 써나갈 또 다른 ‘몸의 역사’가 됐다.
이승주에겐 무척 특별한 시간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 외국에서 활동하다 한국무용 기반의 작업을 해보니 내 안에 숨어있던 자연스러운 호흡과 한국인이라 느끼는 몸의 감각을 발견하게 됐다”며 “이 작업은 단지 새로운 춤을 배우는 과정을 넘어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배운다는 시간으로 다가왔다”고 돌아봤다.
갓 입단한 젠지(Gen Z) 단원들에게 쌓여가는 고민과 희망은 국립무용단이 열어갈 새로운 내일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승연은 이 시간들을 돌아보며 “한국무용을 하는 단체의 단원으로서 어떤 것이 한국무용다운 것인지, 한국무용의 경계는 어디까지 인지, 한국무용은 무엇인지의 정체성과 나의 춤을 어떻게 발전시켜나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쌓아온 전통의 길 위에서 과거를 반추하며 공존하고 진화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었다. 박준엽은 “이러한 새로운 시도가 다양성의 확장으로 나아가 국립무용단이 새롭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리라 본다”고 자신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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