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위치도 이름도 비공개…'감춰진 피해자들'의 자립을 위해서

박하정 기자 2024. 8. 29.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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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위치도 이름도 '비밀'이었습니다. 전국에 4곳 있다는 '특별지원 보호시설'은 그렇게 베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여성가족부 지침에 따라 구체적인 위치와 시설명이 비공개인 '특별지원 보호시설'은, 친족에게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미성년 피해자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입소 피해자들이 그 피해사실을 유추받지 않게 한다는 취지에서 비공개 방침이 내려져 있는 이 시설들엔 지난 5월 기준으로 전국에 걸쳐 청소년 43명이 입소해 있습니다. 베일에 가려져 있다고 해서 이 43명이 세상에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워져선 안 될 겁니다. 하지만 이들이 시설에서 미성년 시절을 보내고 사회로 나가는 첫 자립의 순간을 마주할 때까지, 이들은 외면 받다시피 해 왔습니다.
 

자립을 준비하는 청년인데 '자립준비청년'은 아닌


21살 A 씨는 대전에 있는 이 '특별지원 보호시설'에 초등학교 6학년 때 입소했습니다. 피해가 있었던 집으로 돌아가긴 어려웠기에 17살 되던 해에 자립을 하게 됐습니다. 유일하게 연락하는 가족이었던 할머니의 도움을 일부 받아 자취를 시작한 A 씨에게 가장 힘들었던 건 경제적 어려움이었습니다.
 
"알바하는 게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돈이 없어가지고. 피자집에서 12시간씩 (일하고) 일주일에 하루도 안 쉬는 날도 있었고. 월세도 내야 되고, 밥도 먹어야 되고, 그러다 보니까 학업에 집중할 시간이 전혀 없었고요. 그리고 학업을 하려고 해도 학원이나 (그런 자리도) 그것도 다 돈이잖아요. 그게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몇 년이 흐른 지금은 검정고시를 봐 대학에 진학했지만, 당시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는 너무 힘이 들 것 같아 A 씨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기도 했습니다.

A 씨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은 의아하다는 생각을 하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홀로서기를 하는 청년들에게 우리 사회가 그 자립을 지원한다는 이야기는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동복지시설 등에 살던 청소년들이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갈 때 우리는 그들을 '자립준비청년'이라 부르며 여러 사회적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월 50만 원씩 5년 동안 자립수당을 주기도 하고, 지방자치단체별로 차이가 있지만 많게는 2천만 원(서울시), 적게는 1천만 원의 자립정착금을 주기도 합니다. 또 이들이 시설에 머무는 0세부터 17세까지의 시간 동안 일정 금액을 저축하면 그의 2배에 대한 금액은 정부가 매칭해(최대 10만 원) 적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디딤씨앗통장이라는 제도도 존재합니다. 이후 자립할 때 자립수당이나 정착금과 같이 사회 진출의 토대가 될 수 있는 돈입니다. 의료비 지원도 최근 신설돼 의료급여 2종 수준으로만 본인부담을 하면 됩니다.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정서적 지원도 있습니다. 17개 시·도에는 자립지원전담기관이 존재하는데, 여기에 배치된 전담인력이 자립준비청년을 '사례관리'합니다. 자립하기 3개월 전부터 전담인력이 미리 이들과 만나 자립준비 상황도 점검하고 교류도 이어갑니다.
 

돌아갈 곳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하지만 이 모든 지원을 A 씨는 받을 수 없었습니다. 위에 언급한 지원은 아동복지법에 근거를 둔, '아동복지시설 등에 살던 청소년'들이 자립할 때만 제공되는 지원이기 때문입니다. 아동복지법 제38조를 살펴보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보호대상아동의 위탁보호 종료 또는 아동복지시설 퇴소 이후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하여" 각종 조치를 취하도록 돼 있습니다. 주거, 생활, 교육, 취업 지원이나 자립정착금, 자립수당 지원 등 위에 언급한 지원들을 가능하게 하는 법적 근거가 모두 이 조항에 담겨 있습니다. 이 조항에 따른 자립지원 대상자는 가정위탁 보호 중인 사람이나 아동복지시설에서 보호 중인 사람으로 규정되는데, 이 아동복지시설에는 아동양육시설, 지역아동센터 등이 포함됩니다. A 씨가 머물던, 우리가 이 글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특별지원 보호시설'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특별지원 보호시설'은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성폭력방지법)이라는 별도의 법률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폭력방지법 제12조에 특별지원 보호시설이 무엇인지 규정돼 있지만, 여기에는 아동복지법처럼 이곳에 머물던 청소년들이 자립할 때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근거는 없습니다.


하나 지원이 있습니다. 성폭력방지법을 소관 법안으로 두고 있는 여성가족부의 '2024 여성·아동권익증진사업 운영지침'에 명시된, 퇴소자립지원금 5백만 원입니다. 만 19세 미만의 미성년자로서, 보호시설 입소 후 6개월 이상 경과하고, 만 19세 이상에 도달했을 경우에 이 퇴소자립지원금 5백만 원이 주어집니다. 대전 '특별지원 보호시설' 최은경 원장은 퇴소자립지원금 5백만 원이 세상에 홀로 서며 그 준비를 위해 사용하기엔 결코 많지 않은 돈이라고 강조합니다.
 
"제가 퇴소 아이들 관리를 하다 보니까 정말 5백만 원 가지고 보증금 3백에 월세 20, 25. 조그마한 원룸을 대부분 얻어주거든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살다 보면 월세 밀리고 관리비 밀리고 또 응급하게 병원 갈 일이 있고 이럴 경우에는 병원비 때문에 병원도 못 가는 경우도 많고. 월세가 밀려가지고 집주인한테 쫓겨나서 오갈 데 없이 헤매는 애들도 많이 봤고. 5백만 원 받아가지고 보이스피싱 당한다든지."
 

'홀로서기' 도울 사람도 없어


17살에 자취를 시작해 지금까지, 경제적 어려움만이 힘듦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A 씨는 고민이나 어려움에 맞닥뜨릴 때마다 의지할 사람이 없었던 것도 또 하나의 힘듦으로 꼽았습니다.
 
"원장님은 계속 연락해가지고 많이 도와주시고 하셨는데, 그거 말고는 딱히 없었던 것 같아요. 어른들이라고는, 원장님으로 계시는 분이 계속 도와줬던 거거든요. 어디 가서 힘들다고 말할 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자립을 하면서 시설로부터 독립을 해 나가지만 여전히 기댈 사람은 시설에서 의지하던 원장님뿐이었습니다. 앞서 '자립준비청년'에게는 이들을 담당하는 전담인력도 존재하지만, A 씨와 같은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는 지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시설 인력은 어떨까. 10명이 머무는 대전 특별지원 보호시설에 근무하는 인력은 8명. 원장과 취사원, 야간 당직 2명을 제외하면 주간 근무자로서 실질적으로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직원은 4명입니다. 청소년 10명 가운데 7명은 지적장애 혹은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어 조금 더 살뜰한 돌봄이 필요한 것을 감안하면, 자립해 퇴소한 이들까지를 감당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라고 최은경 원장은 설명했습니다.
 
"저희 직원들은 24시간 진짜 항상 퇴근하고 휴대폰을 들고 있어야 되거든요. 언제 응급한 상황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직원이 한 명 더 충원되면 퇴소자 관리도 하고 아이들한테 더 일대일 돌봄도 할 수 있고, 그게 가장 필요한 것 같아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이 '특별지원 보호시설' 4곳을 직접 방문해 실태조사를 하고 '감춰진 피해자들: 미성년 친족성폭력 피해자 특별지원 보호시설 지원업무 실태 및 개선과제' 보고서를 작성한 허민숙 입법조사관 역시 이런 인력 부족의 아쉬움을 지적했습니다.
 
"(아동복지법상에는) 자립지원전담기관이 전국 17개 시도에 전부 다 설치되어 있어요. 자립지원 전담 요원들이 근무를 합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자립준비청년'에게 연락을 하고 정보를 줘요. '무슨 일이 있거나 아프거나 힘들거나 지금 생활비가 부족하거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연락을 해라', (그러면) '선생님, 저 이러이러한 어려움이 있어요. 선생님 몸이 많이 아파요. 어떻게 할까요?' (자립준비청년들은) 이렇게 상의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특별지원 보호시설' 청소년들은 아무것도 없어요. 자기가 생활했었던 이 시설 선생님들이 '어떻게 지내니, 어려운 점 없니' 이렇게 할 수는 있지만 선생님들의 그냥 그런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시는 거고. 체계적으로 '퇴소 이후에 어려움이 있을 때 여기에 연락해서 도움을 받아라' 이런 것은 지금 없는 상황입니다. 사실 피해자가 회복하려면 '너희들이 숨어 있을 일 아니고 너희들이 잘못한 것 아니고 가해자들이 잘못한 거야. 그냥 당당하게 살면 돼.' 이런 메시지를 계속 주는 게 좋은데 '특별지원 보호시설'의 위치부터가 별로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저희가 해볼 수 있는 거죠."

전국 '특별지원 보호시설'을 직접 방문하며 실태조사를 했던 허 조사관은, 1곳을 제외하고는 매우 외진 곳에 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시설 관계자가 과거 부지를 찾을 때 범죄 피해가 주변에 알려지는 게 아이들에게 좋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주변으로부터 조금 거리가 있는 '깊숙한' 부지를 찾았었는데 이후 후회하더라는 얘기도 전했습니다. 허 조사관이 쓴 보고서의 제목은 앞서 소개했듯 '감춰진 피해자들'입니다. 미성년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이 "물리적으로도 사회의 주변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정책 대상자로서의 제도적 인지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는 점을 환기"하기 위해 지어진 제목입니다.

이 시설을 거쳐 갔던 입소아동과 청소년 316명을 분석해 보면 10세 이하가 36.4%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이 어린아이들이 입소 기간을 거쳐 세상으로 나아갈 때까지 물론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와 회복도 필요하겠지만 "친구들이 먹어본 것, 친구들이 가 본 곳 등을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자립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허 조사관은 덧붙였습니다. "마치 아주 좋은 부모님이 있었던 것처럼 사회에 잘 정착하고 평범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목적인데, 그 목적을 달성할 만한 자원이나 지원이 풍족한가를 점검해봤을 때 그렇지 않다…." 감춰진 피해자들이 당당하게 사회에 나가 설 수 있도록, 그저 평범한 스무 살 성인으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경제적, 심리 정서적 지원을 고민해볼 때가 되었습니다.

박하정 기자 parkhj@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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