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내려놓고 발견한 ‘나’…35년 사진기자, 무대에 오르다

임석규 기자 2024. 8. 29. 13:1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35년 경력의 전직 사진기자가 공개 오디션을 통해 연극의 주역으로 발탁됐다.

피사체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사진기자에서 관객의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연극배우로 변신한 것.

그는 "목소리를 키워 대사를 하고 나면 뭔가 속에 있던 응어리들이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라며 "연극배우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무대에 오르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고 했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선규 전 기자, 연극 ‘소풍 가는 날’ 주연 데뷔
35년 경력 사진기자에서 연극배우로 변신해 연극 ‘소풍 가는 날’ 주역을 맡은 김선규씨가 연습하고 있다. 이슈앤프로세스 제공

35년 경력의 전직 사진기자가 공개 오디션을 통해 연극의 주역으로 발탁됐다. 피사체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사진기자에서 관객의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연극배우로 변신한 것. 2년 전 문화일보에서 퇴직한 김선규(61)씨는 다음 달 2~4일 서울 대학로 드림시어터 무대에 오르는 연극 ‘소풍 가는 날’에서 주인공을 연기한다. 그의 첫 직장은 1987년 입사한 한겨레신문이다.

“연극이라곤 대학 시절 개론 수업 한번 들은 게 전부”인 그에게 이번 작품은 무대 데뷔작이다. 그는 “기대도 안 했는데 밤 11시 넘어 합격 문자를 받고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며 웃었다. “현장에서 35년을 뛰었으니 제 속에 오만 잡것들이 다 들어있겠지요. 연습하면서 보니 연극은 누구를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끄집어내는 일이더군요.” 그는 “사진 찍던 경험이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 연극은 아내와 사별 후 자식들과도 연락이 끊긴 외로운 노인이 죽음을 고민하는 ‘웰다잉’을 소재로 한다. 연극판 경력 55년의 배우 장두이(72)가 작품을 쓰고 연출까지 맡았다. “카메라의 눈은 집요하게 집중하죠. 연기에서도 시선이 중요해요. 오디션을 보는데 시선에 흐트러짐이 없었어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 의미를 부여하는 사진기자에게서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캐릭터를 빚어내는 배우의 자질을 봤을까. 장 연출은 “김선규씨가 진지하면서도 집중력이 강하더라”고 발탁 배경을 설명했다. 두 차례 진행한 오디션에서 연기 경험이 전무한 응모자는 김씨가 유일했다. “키도 크고 첫인상이 강렬하더군요. 리딩을 해보니 대사 해석 능력도 좋아서 이번 작품에 활력소가 될 거라고 봤어요.” 장 연출은 “연기 테크닉은 하다 보면 느는데, 열정과 의욕이 넘치는 김선규 배우는 장족의 발전을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35년 경력 사진기자에서 연극배우로 변신한 김선규씨. 본인 제공

정년퇴임으로 사진기자 여정을 마감한 김씨는 2022년 고향인 경기도 화성으로 돌아갔다. 농기구를 사서 농업경영업체 등록을 하고, 농부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하지만 초보 농부에게 땅은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옥수수, 고구마, 블루베리 등 심는 족족 망치고 말았다. 몸도 마음도 내려앉은 그에게 우연히 대학생들이 만드는 단편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할 기회가 생겼다. 딱 세 마디 나오는 대사를 위해 ‘친구’ 등 경상도 사투리가 나오는 영화 10여편을 봤다. “경기도 양평에서 12시간 동안 촬영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눈발이 흩날리는데 하늘을 나는 듯한 자유로움을 느꼈어요.” 지난 2월 그에게 연기라는 새로운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3월 ‘소풍 가는 날’ 캐스팅이 확정된 이후엔 연기 개인교습도 따로 받고 있다. 발성을 좋게 하려고 판소리도 배운다. 그는 “목소리를 키워 대사를 하고 나면 뭔가 속에 있던 응어리들이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라며 “연극배우들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무대에 오르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고 했다. “장두이 연출님이 제게 그러더라고요. ‘예술엔 금기가 없다. 자기 몸을 긍정하라’고요. 매일 마감에 쫓기며 살았으니 뭔가 위축되고 몸이 쭈뼛쭈뼛할 수밖에 없겠죠.” 연습을 이어가면서 차츰 늙은 주인공에게 감정이 이입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는 “김득천이란 연극 속 주인공이 내 안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