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여왕'이 쓴 섬세하고 깊은 세계…'푸른 들판을 걷다'

김용래 2024. 8. 2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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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할머니는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바다에 갔던 얘기를 들려준다.

남편을 조르고 졸라 해변에 도착한 할머니는 맨발로 거품이 이는 바닷가를 걸어 들어가 절벽 길을 따라 돌아온다.

모자는 졸부가 소유한 고급 리조트에서 유한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즐기고, 아들은 밤바다에서 수영하고 돌아와 그 옛날 애타게 그리던 바다에서 정작 몸을 담그지 않고 돌아온 할머니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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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일랜드 문학 이끄는 클레어 키건 소설집 번역출간
클레어 키건 [ⓒPhilippe Matsas / 다산책방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어느 날 할머니는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바다에 갔던 얘기를 들려준다. 남편을 조르고 졸라 해변에 도착한 할머니는 맨발로 거품이 이는 바닷가를 걸어 들어가 절벽 길을 따라 돌아온다. 남편과 약속한 시각에서 5분이 지났을 무렵, 남편이 차 문을 쾅 닫고 떠나버리려는 것을 본 할머니는 뛰어들어 차를 세운다. 그리고 자신을 혼자 내버려 두고 집에 가려 했던 남자와 평생을 함께 살았다.

아일랜드의 소설가 클레어 키건의 단편 '물가 가까이'에는 백만장자 졸부와 재혼한 가난한 시골 농가 출신 엄마와 하버드를 다니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등장한다.

모자는 졸부가 소유한 고급 리조트에서 유한계급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즐기고, 아들은 밤바다에서 수영하고 돌아와 그 옛날 애타게 그리던 바다에서 정작 몸을 담그지 않고 돌아온 할머니를 떠올린다. 왜 그랬냐는 물음에 할머니가 내놓은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그랬다"는 답을 곱씹으며.

특별한 것 없는 단순한 스토리지만, 간명하고 정확한 문장들 속에 화자가 말하지 않은 비밀들이 곳곳에 숨어 있을 것만 같은 작품이다. 주인공이 하려다가 못한 말을 독자들은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암시와 짐작의 공간에서 미학은 탄생한다.

소설집 '푸른 들판을 걷다'는 '맡겨진 소녀'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이어 국내에 세 번째로 번역된 클레어 키건의 작품이다.

현지에서 2007년 출간된 이 책은 국내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키건의 단편집이다. 작가에게 '단편 소설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며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에지힐 단편문학상의 영예를 안긴 작품으로, 작가의 장기인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미묘하게 암시하기'가 빛난다.

수록작 '물가 가까이'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극찬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루키는 2004년 외국 작가들의 단편을 엮어 '생일 이야기'라는 선집을 출간했는데 이 책의 개정판에 키건의 '물가 가까이'를 수록했다.

그러면서 "꾸밈없는 단어와 문장들의 조합으로 만들어내는 단순한, 그러나 따뜻하고 심오한 장면들은 머릿속에서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다산책방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 단편 외에도 작가에게 문학적으로 큰 영향을 준 아일랜드 작가 존 맥가헌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굴복', 사랑하는 남자와 아기를 모두 잃은 여자 이야기인 '퀴큰 나무 숲의 밤' 등 총 7편의 단편이 실렸다.

키건의 작품들은 짧지만 강력하다. 이번에 소개된 단편들 외에도 국내에서 앞서 출간된 경장편 '맡겨진 소녀'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분량이 각각 104쪽, 131쪽에 불과하다.

작가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짧은 이야기를 주로 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세상의 장편소설은 대부분 너무 길어요. 저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어떤 강렬함으로 묘사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강렬함은 장편소설에서는 쉽게 사라집니다."

키건의 단편들에선 깎고 또 깎아 정수만 남은 것 같은 문장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감이 더 매혹적이다. 그래서 짧아도 빠르게 읽히진 않는다.

작가가 정성껏 차려낸 단편의 성찬을 한편 한편 곱씹듯 천천히 음미해 보시기를 권한다.

다산책방. 허진 옮김. 252쪽.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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