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조의 아트홀릭] "탄생 100주년, 변함없이 현대를 멋지게 걸어가는 작가"

2024. 8. 29.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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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정승조 아나운서 ■

천경자 화백(1924-2015)을 떠올려봅니다.

그녀는 한국 채색화 분야에서 독보적 양식과 행보를 이어간 작가이지요.

광복 이후 당시의 형식과 틀에 자신을 가두지 않으려고 애썼고, 채색으로 개성 있는 화법을 만들어낸 인물이고요.

1963년 미술사학자이자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던 최순우는 그녀를 "현대(現代)를 멋지게 걸어가는 작가"라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천경자 탄생 100주년이 되는 올해.

이를 조망하는 의미 있는 전시가 열렸습니다.

특히 10년 만에 새로 단장한 천경자 컬렉션 상설전은 그녀의 기행 회화에 주목하는데요.

정승조의 아트홀릭은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천경자 컬렉션 상설전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를 기획한 '이송은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를 만났습니다.

▮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해 '천경자-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를 새롭게 기획하셨습니다. 학예사께 그녀는 어떤 화백으로 각인되어 있습니까.

전시 준비를 위해 천경자 화백 연구를 진행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천경자 화백은 한평생 어떤 순간에도 붓을 놓지 않고 그림과 함께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순간순간 고비가 있었음에도 화백은 끝까지 자기 작업과 함께하는 삶을 사셨고, 그림을 통해 삶의 힘듦조차 견뎌내셨던 분이신 것 같습니다.

특히 천경자 작가님 수필의 부분에서 “현실이란 슬퍼도, 제아무리 한 맺힌 일이 있어도 그걸 삼켜 넘겨 웃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한이란 것이 생긴다. 이게 인생으로서의 매력이다. 이런 매력 속에서 죽을 때가 되면 아무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웃고 죽는 것이 현대의 한이다. 그것을 나는 그림 속에 담으려 한다.”라는 문구를 통해 화백님의 삶과 작업에 대한 태도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에서 ‘그림’이라는 한 가지를 끝까지 추구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자전적인 삶을 그림에 담았던 천경자 화백. 올해가 그녀의 탄생 100주년인 만큼 전시에 대해 각별히 신경 쓰셨을 텐데요. 상설전에선 어떤 작품들을 만날 수 있나요.

천경자, 자마이카의 고약한 여인(1989), 종이에 채색, 31.5×40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저작권자: 서울특별시,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는 10년 만에 새롭게 기획한 천경자 컬렉션 상설전으로 4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30점의 작품이 출품됩니다. 그중 19점은 오랜 기간 대중에게 전시되지 않았던 소장품들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여 천경자 컬렉션을 재조명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천경자 컬렉션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기행 회화를 중점적으로 소개해 드리고자 했습니다. 이전 상설 전시에서도 여행 풍물화, 즉 기행 회화는 소개되었었지만, 서울시립미술관 천경자 컬렉션만의 특색을 조금 더 두드러지게 보여드리고자 기행 회화로 ‘꿈과 바람의 여로’, ‘예술과 낭만’ 두 개의 섹션을 구성했습니다.

‘꿈과 바람의 여로’ 섹션은 천경자 화백이 세계 곳곳을 누비며 마주한 이국적인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기행 회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다양한 소재를 화려한 색채와 세밀한 기법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술과 낭만’ 섹션은 해외여행 중 자신이 애호하는 문호의 생가나 문학 속 배경이 되는 장소를 방문하여 그에 대한 인상을 작품에 표현했거나, 관람한 공연의 장면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담아낸 작품들로 구성했습니다. 이를 통해 해외 문학과 공연 등 문화예술에 대한 천경자 화백의 관심과 사색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더불어 이번 전시는 천경자 화백 하면 떠오르는 화려하고 몽환적인 채색화와 특유의 여인상 작품들 역시 선보이고 있습니다.

▮ 10년 만에 새로 단장한 전시의 제목은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입니다. 이는 천경자 화백이 1986년에 쓴 여행 수필의 제목이지요.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전시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2024. 사진: 김상태,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그렇습니다. 전시의 제목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경계 없이 이동하는 ‘바람’이라는 소재를 통해 심리적, 물리적, 지리적, 문화적으로 경계 없이 넘나들며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천경자 화백의 인생 전반과 작품세계를 은유합니다. 천경자 화백은 자신과 주변 세계를 환상과 꿈의 세계로 전환해 작품 속에서 정한을 표현하고, 현실과 내면의 세계를 넘나들며 탐구했습니다. 또한 당시 시대적으로 쉽지 않았던 해외여행이라는 도전을 통해 세계 곳곳을 넘나들었고, 문학과 공연·영화와 같은 문화예술과 문화예술인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애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글을 쓰는 작가와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직업적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을 선보였습니다.

이처럼 경계 없이 넘나들며 독자적인 길을 걸었던 화백의 삶과 작품세계를 각각 전시의 4개의 섹션, ‘환상과 정한의 세계’, ‘꿈과 바람의 여로’, ‘예술과 낭만’, ‘자유로운 여자’를 통해서 소개하고자 했습니다. (‘자유로운 여자’ 섹션의 경우, 일종의 아카이브로서 문학과 미술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모습을 통해 천경자 화백의 다채로운 면모와 예술세계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이전 상설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전시의 제목에는 작품으로 우리의 영혼을 강렬하게 울리는 천경자 화백에게 이 전시를 통하여 한층 더 깊게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 전시작에 관해 이야기해 보지요. 천경자 화백의 주요작으로 무엇을 소개하시겠습니까.

천경자 화백의 주요작으로 '여인의 시' 연작 2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작가의 삶에 관한 태도를 잘 드러내고 있는 '여인의 시 Ⅰ'(1984)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천경자, 여인의 시 Ⅰ(1984), 종이에 채색, 59.5×44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저작권자: 서울특별시,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여인의 시 Ⅰ'(1984)는 사무치는 고독 속에서 삶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 작품입니다. 천경자는 1980년대 중반 여인 누드를 화폭에 적극적으로 등장시키며 특정 모델의 사실적인 묘사가 아닌 자유로운 표현으로서 누드를 그렸습니다. 1969년부터 1990년대까지는 해외여행에서 지속적으로 원시성, 원시미를 탐구했는데, 이는 인간 본연의 원초적인 모습과 관련됩니다. 나체 여인의 등장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근원을 여성으로 보는 모체회귀와 연관됩니다. 여인의 얼굴과 눈망울에는 고독감이 가득하지만, 여인은 메마른 대지 위에 한 손에 담배를 들고 꿋꿋하게 서 있습니다. 다른 그림 속에서 여인과 함께 등장하던 나비, 새, 동물 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홀로 외로운 여인을 위로해 주는 것은 담배뿐입니다. 평상시 천경자는 담배를 즐겼고, 담배는 삶의 고독을 달래주는 위안이었습니다. 벌거벗은 채 당당하게 서 있는 여인상은 세상의 모진 풍파 속에서 고고하게 살아온 천경자의 모습이자 생에 대한 애착과 생명감을 상징합니다.

▮ '여인의 시 Ⅰ'(1984)를 포함해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에 독보적으로 담아냅니다. 이게 바로 천경자 화풍의 특징이고요.

천경자 화풍의 특징은 말씀 주신 것처럼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작품에 담아내는 점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천경자 화백은 누구보다 솔직하게 작품에 자신만의 개성을 담아내어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시대적으로 채색화는 일본 화풍이라는 편견이 남아있던 상황에서도 꾸준히 채색화를 유지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었고, 이에 화백의 작품에서는 개성적인 색채 감각이 두드러짐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천경자 화백은 동양화의 현대화를 위해 소재, 주제, 기법 등 여러 측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해나갔습니다. 이후에는 여성 인물화와 여행 풍물화를 집중적으로 작업했으며,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천경자 화백 특유의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린 여인상 등을 제작했습니다.

▮ 전시는 그녀의 기행 회화에도 주목합니다. 기행 회화라는 표현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지 싶습니다.

천경자, 애틀렌터 마가렛 밋첼 생가(1987), 종이에 채색, 31.5×40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저작권자: 서울특별시,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네, 기행 회화라는 표현이 다소 낯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천경자 화백님이 작품을 그렸을 당시에 이 작품들은 주로 ‘여행 풍물화’로 분류되었었는데, 이번에 조금 더 넓은 범위의 의미로 기행 회화라는 단어를 사용해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기행 회화는 기행, 여행 등을 통해 제작된 회화를 총칭한다고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실천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해외여행 자체가 쉽지 않았던 1969년 돌연 타히티, 파리, 이탈리아 등을 방문하여 스케치 기행을 다녀온 이후 1974년에는 인도네시아와 아프리카, 1979년에는 인도와 중남미, 1980년대에 영국, 미국 등 여러 곳을 여행하며 수많은 스케치와 채색화 작업을 이어 나갔습니다.

또한 자신의 여행기를 신문, 잡지 등에 그림과 함께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행보는 당시로서는 쉽게 할 수 없었던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백은 기행을 통해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계기를 얻었으며, 작품의 소재를 얻은 것뿐만 아니라 기존의 구성과 색감에서 탈피하여 한층 독특하고 신비한 화면을 완성했습니다.

▮ 천경자 화백의 기행 회화 중에 챙겨봤으면 하는 작품을 추천하신다면요.

기행 회화 작품들 하나하나 각기 매력이 넘치지만, 특별히 꼽자면 이번 전시 포스터에서 대표 이미지로 활용되었던 '폭풍의 언덕'(1981)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천경자, 폭풍의 언덕(1981), 종이에 채색, 24×27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저작권자: 서울특별시,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폭풍의 언덕'(1981)은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되었던 영국 웨스트요크셔 지역 하워스를 그린 작품입니다. 작가는 주인공 히스클리프가 천경자 자신과 가족 중 누군가의 분신일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주인공의 불행과 고독, 사랑의 향수에 자신을 대입시켰습니다. 자신에게 내재된 슬픔, 불행, 고독 같은 감정을 작품의 소재로 연결시켰습니다. 천경자는 브론테 가족 묘지를 지나 위치한 습지대 언덕에서 스케치했으며, 화면에는 말라버린 검붉은 관목 히스와 누런 갈대밭이 거센 바람에 몰아치고 있습니다. 회색빛 하늘과 맞닿은 황량한 황무지, 바람에 휘감기듯 흔들리는 갈대를 포착했으며, 노랑과 갈색 계열의 색채로 여러 겹 붓질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연상되도록 시각적 환영을 줍니다. 지평선을 화면 상단에 설정하여 작은 화폭임에도 불구하고 시야를 멀리 확장해 주며, 톤 다운된 색채는 계절감과 감정을 표출해 주고 있습니다. 천경자 화백의 문학적 감수성을 담은 작품입니다.

▮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싶었을까요. 더불어 아트홀릭 독자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도 부탁드립니다.

천경자 화백은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한국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으며,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작가는 자유로운 창작과 개성을 중시해 어떤 틀에도 작품을 가두지 않고 작업했으며, 섬세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색채 감각을 구현했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 이러한 자유로운 창작 정신과 개성, 자신만의 길을 걷는 고유성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천경자, 구스코(1979), 종이에 채색, 24.5×27.2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저작권자: 서울특별시,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새롭게 기획한 천경자 컬렉션 상설전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는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뿐만 아니라 기행 회화에 주목한 전시로 천경자 화백의 인생 전반과 작품세계를 조망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 미술사 속에서 천경자 화백이 가지는 중요성을 되짚어보고 작가가 기증한 작품을 통해 작품 기증의 의미를 제고해 보고자 합니다.

또한 서울시립미술관은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서소문 본관 3층에서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 전시를 2024년 8월 8일(목)부터 11월 17일(일)까지 개최합니다. 기획전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시기에 태어나 민주화 사회를 맞이하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천경자 포함 한국 여성 작가 23인의 삶과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로, 천경자 화백의 현대적 정신이 어떻게 미술계와 후대에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 조명합니다. 두 건의 전시를 함께 관람하시면서 천경자 화백을 한층 더 깊게 이해하고, 작품의 다채로운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승조의 아트홀릭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천경자 컬렉션 상설전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 전시 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2층 천경자컬렉션 전시실

- 관람료 : 무료(매주 월요일, 1월1일 휴관)

정승조 아나운서 /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방송인으로 CJB 청주방송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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