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당 파벌 해체로 유력 후보 예측 어려워진 日 차기 총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해온 자민당은 파벌들이 교대로 통치해온 정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3년 8월부터 1996년 1월까지 비(非)자민당 연립 내각이 집권한 시기와 2009년 9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민주당 집권 시기를 제외하면 줄곧 집권 여당이었기 때문이다.
자민당 파벌 해체 후 첫 총재 선거
의원내각제인 일본에선 다수당 총재가 총리를 맡기 때문에 자민당의 각 파벌은 당 총재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시한다. 자민당이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당 안의 당'인 파벌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교대로 당 총재와 총리를 맡아 정권교체 같은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반면 강력한 보스를 중심으로 뭉친 파벌은 정치 부패 근원이라는 비판도 받아왔다. 파벌을 유지하고 의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파벌이 정경유착 등 각종 비리의 온상이라는 말을 들어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민당은 9월 말 당 총재를 선출하는 선거를 실시한다. 당 총재는 총리가 되기 때문에 차기 총리를 뽑는 선거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총재 선거에선 후보들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당 총재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고 총리 연임을 포기하면서 당의 거물부터 신진 인사까지 10여 명이 도전한 상황이다. 기시다 총리는 자민당 총재 임기 만료일인 9월 30일을 끝으로 총리에서 물러난다. 총재 후보로 출마하기 위해선 중의원(하원)·참의원(상원)에서 20인 이상 추천을 받아야 한다.
두 자릿수 후보가 총재 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2000년 이후 총재 선거는 줄곧 5명 이하 후보로 치러졌다. 2008년 아소 다로 총리와 2012년 아베 신조 총리 때도 5명이 입후보했고, 2021년 기시다 총리 때는 4명이 경쟁했다.
아베 전 총리 피살이 촉발한 변화
기시다 총리가 총재 선거 불출마를 결정한 직접적 원인은 자민당 파벌들의 정치자금 스캔들이다. 일본 언론들은 지난해 말 자민당 최대 파벌인 아베파가 정치자금 보고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고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검찰이 수사에 나서면서 기시다 총리가 이끌던 기시다파와 다른 파벌도 정치자금규정법을 위반해 비자금 5억7949만 엔(약 53억 원)을 만든 사실이 드러났다. 민심이 등을 돌렸고 자민당은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다. 실제로 자민당은 4월 중의원 보궐선거 3곳에서 전패한 것을 비롯해 5월 시즈오카현 지사 선거, 7월 도쿄도의회 보궐선거에서도 연패했다.
기시다 총리는 파벌 해산과 정치자금규정법 개정 등 대책을 내놓았지만 효과는 크지 않았다. 내각 지지율이 10~20%대로 추락하면서 기시다 총리는 퇴진 압박 탓에 제대로 국정 운영을 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기시다 내각이 낮은 지지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자, 자민당 의원 사이에선 기시다 총리 책임론과 함께 '간판 얼굴'(총리)을 바꾸지 않으면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대로 경쟁할 수 없다는 여론이 거세졌다"고 지적했다.
자민당 파벌들은 정치자금 스캔들 여파로 잇달아 해체된 상태다. 자민당의 6개 파벌 가운데 정치자금 스캔들에 연루된 아베파(소속 의원 98명)와 기시다파(46명), 니카이파(38명) 등 3개 파벌을 비롯해 스캔들과 관련 없는 모테기파(53명)와 모리야마파(8명) 등 2개 파벌도 해체됐고 아소파(56명)만이 유일하게 남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차기 총재 선거는 파벌 영향력이 상당히 줄어든 상태에서 치러질 전망이다. 일본 언론들은 이번 총재 선거에서 4개 세력이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4개 세력은 유일하게 파벌을 유지해 '조직표'가 가능한 아소파, 기시다 정부에서 비주류로 활동한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 세력, 기시다 총리가 수장으로 있었던 기시다파, 4선 이하 중진·신진 의원들의 모임 등이다.
파벌 간 합종연횡 예상돼
자민당 총재 선거는 1차에선 국회의원과 지방 당원·당우들이 절반씩(각각 367표) 투표권을 갖는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면 선거는 그대로 종료되지만, 이번엔 출마자가 많아 2차 결선투표까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결선투표는 1차 투표에서 득표수 상위 2명이 치른다. 결선투표는 1차와 달리 국회의원이 1표씩 행사해 모두 367표지만, 지방 당원의 경우 광역지방자치단체인 도도부현(都道府県)별로 1표씩 할당돼 47표로 줄어든다. 국회의원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일본 언론들은 지금까지는 파벌 규모와 합종연횡에 따라 누가 총재가 될지 예상이 가능했지만 올해는 파벌 해체로 전망이 어려워졌다고 보도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파벌 해체로 의원들의 투표 행동 자유도가 늘었다"며 "의원들이 파벌 방침에 얽매이지 않고 투표할 것이기 때문에 어떤 후보가 유력한지 예측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파벌 해체 전에는 보통 파벌 수장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고, 파벌에 속한 의원들이 이에 따라 투표했다. 일본 언론들은 4개 세력이 지지하는 후보 중에서 차기 총재가 선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기시다파에서도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가미카와 요코 외무상 등이 출마할 것으로 보인다. 기시다파 소속 의원들은 해체 후에도 연대하고 있어 총재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킹메이커 누가 될까
중의원 4선 이하 의원들의 세력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들은 중의원 250여 명 가운데 140여 명을 차지하는 거대 세력이다. 이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40대인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과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상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아베 전 총리의 측근으로 강경 우파 성향인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담당상, 자민당 정치자금 스캔들 대응 조치 과정에서 기시다 총리와 사이가 틀어진 모테기 도시미쓰 자민당 간사장 등도 총재 선거에 도전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총재 선거는 파벌 해체에도 '킹메이커'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일본 언론들이 킹메이커로 꼽는 인사는 아소 부총재와 스가 전 총리다. 아소 부총재는 기시다 총리가 총재로 선출될 때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자민당 현역 국회의원 중에선 14선이라는 최다 당선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국회의원 재직 기간만 42년에 달한다. 그는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의 손자이기도 하다. 스가 전 총리는 대표적인 무파벌 인사로 당내 비주류 세력을 결집할 능력이 있다.
일각에선 이번 총재 선거를 계기로 자민당에서 파벌 정치가 부활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최대 파벌이던 아베파가 존재감을 발휘하려고 그룹별 활동을 확대하고 있으며 니카이파, 모리야마파 역시 각각 니카이 도시히로 전 자민당 간사장과 모리야마 히로시 총무회장을 중심으로 해체 후에도 모임을 지속하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이번 총재 선거에서 선출된 후보가 총리가 된 후 자민당 지지율이 올라가면 올가을 중의원을 조기에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Copyright © 주간동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