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게인 2024 투란도트’ 무대 오르는 박미혜 서울대 음대 교수
2003년 대한민국에 오페라 붐을 일으킨 ‘투란도트’의 감동이 올 연말 재연된다. 세계적인 성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수준 높은 무대를 선보일 박미혜 서울대 음대 교수를 만났다.
올해 서거 100주년을 맞는 이탈리아 작곡가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는 중국 공주 투란도트의 사랑을 얻기 위해 타타르 왕자 칼라프가 목숨을 걸고 수수께끼를 풀어나간다는 내용. '어게인 2024 투란도트’는 200억 원을 쏟아부은 대작인 만큼 세계 최고 수준의 제작진 및 배우들이 무대에 선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스리 테너’로 한 시대를 풍미한 플라시도 도밍고가 지휘자로 합류하고, 주인공 투란도트 역에는 '오페라의 여제’라 불리는 아스믹 그리고리안과 에바 플론카 등 4명의 소프라노가 캐스팅됐다. 아스믹 그리고리안은 이번이 첫 내한 공연이라 오페라 팬들의 기대가 더욱 높다. 칼라프 역은 러시아 출신 유시프 에이바조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황태자’라 불리는 브라이언 제이드, 세계 정상의 스핀토 테너(서정적이면서도 힘 있는 소리) 알렉산드르 안토넨코 등이 맡았다.
한국인 성악가로는 박미혜 서울대 음대 성악과 교수가 유일하게 주역으로 캐스팅됐다. 그가 연기하는 류는 타타르 왕 티무르의 충직한 시녀이자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려주는 인물이다. 푸치니가 '투란도트’를 쓸 때 가장 공을 들인 캐릭터로, 극 중 존재감도 투란도트 공주 이상이다. '투란도트’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는 물론 칼라프 왕자가 부르는 '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말라)’지만 류의 아리아 'Signore, ascolta!(주인님 들어주세요)’ 'Tu che di gel sei cinta(당신은 얼음에 싸여 있군요)’ 'Tanto amore segreto(가슴속에 숨겨진 이 사랑)’도 그 못지않게 사랑받는 곡들이다. 박미혜 교수를 만나 '어게인 2024 투란도트’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었다.
역대급 캐스팅, 서울에서 펼쳐질 화음 기대
캐스팅이 '거를 타선이 없다’고 할 정도로 역대급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캐스팅으로 열흘간 공연하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에요. 아스믹 그리고리안, 브라이언 제이드 같은 성악가들은 워낙 팬층이 두꺼워서, 일본을 비롯해 해외에서도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는 건 한국이 더 이상 문화의 변방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K팝에서 K푸드, K뷰티까지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고, 또 한국에 오고 싶어 하잖아요. 이런 분위기가 무르익은 가운데 제작진이 수년간 공을 들인 덕분에 좋은 타이밍에 공연을 하게 됐어요. 개인적으론 제가 좋아하는 분들과 한 무대에 설 수 있게 돼 영광입니다. 이 믿기 어려운 캐스팅으로 서울이라는 곳에 모여서 내는 앙상블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또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감동을 줄지 저도 기대가 됩니다.
최근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 등이 국제 콩쿠르에서 잇달아 수상하며 K-클래식의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성악 또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고요.
소프라노 홍혜경, 베이스 연광철 씨가 해외 무대에서 꾸준히 좋은 활약을 펼쳐왔고, 최근 들어 테너 백석종 씨도 떠오르는 보석으로 주목받고 있어요. 유럽 유수의 오페라극장들이 '한국 성악가가 없으면 공연을 못 한다’고 할 정도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요. 성악가 개개인의 역량만 놓고 보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지휘자로 오는 플라시도 도밍고와는 예전에 함께 공연을 한 적이 있죠.
네. 정말 열정이 대단한 분이에요.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분이죠. 보통 성악가들이 20~30개 정도의 작품을 하면 많이 한다고 하는데 그 분 레퍼토리는 120개가 넘어요. 역사상 가장 많은 오페라 배역을 한 성악가 일거예요. 열정과 호기심을 갖고 계속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점도 존경스럽죠. 성악가로 활동하면서 30대 때부터 지휘를 시작했고, 테너지만 나이가 들면서 음역대가 낮아지자 바리톤에도 도전하셨잖아요.
"모든 무대가 새로운 도전, 즐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
‘투란도트‘의 타이틀롤은 투란도트 공주지만, 공주보다 류를 사랑하는 관객들이 많습니다. 류는 어떤 인물인가요.
극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류의 서사를 살펴보면 그녀도 타타르가 이웃 나라를 정복하며 세를 확장해나가던 시절, 옆 나라에서 끌려온 공주예요. 때문에 비록 노예지만 훌륭한 품성과 지혜를 갖춘 인물이고, 칼라프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깊어요. 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줄 정도로요. 마지막에 공주는 왕자의 이름을 알게 되지만 그를 살리기 위해 '칼라프’라는 이름 대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류의 죽음이 사랑으로 승화됐고, 그 사랑이 결국 얼음장같이 차갑던 투란도트 공주의 마음을 녹인 거죠.
칼라프 역의 유시프 에이바조프가 세계적인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의 남편입니다. 네트렙코가 부른 류의 아리아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지 않나요.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네트렙코뿐 아니라 푸치니의 아리아를 잘 부르는 소프라노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류는 제게도 큰 도전입니다. 세계적인 성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한국의 성악 수준을 알릴 기회이기 때문에 누구와의 비교보다 내 안에서 갈고닦은 내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교수님이 연기하는 류의 관전 포인트가 있다면요.
노래를 잘 부르는 건 당연하고요, 그 외의 시간 동안 움직임도 굉장히 중요해요. 다른 가수들이 노래를 부를 때 류가 무대에서 어떻게 하는지, 기타 배우들과 어떻게 에너지를 주고받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면 공연이 더 재미있을 거예요.
노래뿐 아니라 연기의 완성도도 높아야겠네요.
사실 그건 연기가 아니라 그 인물이 되어야 해요. 그 사람으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다른 인물과 심리적으로 연결되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선 연구를 많이 해야 해요. 연출자와 의논도 하고, 스스로 고민도 많이 합니다.
그런 열정으로 임하다 보면 작품이 끝난 후 탈진할 것 같아요.
독창회나 오페라를 한 작품 마치고 나면 마치 산고를 겪은 것 같아요. 사실 공연에서 보이는 건 한 단면에 불과해요. 그 1∼2시간 공연을 위해 무대에 서는 사람들은 몇백, 몇천 시간의 노력을 하거든요. 예술가들은 인공지능(AI)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작품이라도 연출, 앙상블, 배우들 간의 호흡에 따라 매번 다른 작품이 되기도 해요. 그래서 모든 무대가 새로운 도전이고, 즐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죠.
유연하고 오픈된 자세 필요
목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공연이 많을 땐 말을 안 해요. 사람도 잘 안 만나고요. 용건이 있으면 문자메시지로 주고받죠. 그리고 무대에 서려면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건강해야 합니다. 저는 7∼8년 전부터 매일 1.5km씩 수영을 하고 있어요. 수영하기 전에는 등산을 했고요. 우리나라 명산이라는 산은 거의 가봤고,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도 갔어요. 산에 가면 자연 속에서 호흡하는 것도 좋고 정신도 맑아지거든요.
지금까지 수많은 캐릭터를 하셨는데, 특히 사랑하는 오페라나 작품 속 인물이 있다면요.
성악가들은 현재 하고 있는 작품 속 배역을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그 역할과 사랑에 빠져야만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거든요. '라 보엠’의 미미,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도 좋아합니다. 푸치니나 베르디의 작품들은 음악과 드라마, 캐릭터들이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어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라 보엠’ '라 트라비아타’ 모두 비극이네요.
인생이 행복하지만은 않잖아요. 어쩌면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도, 그 전에 어떤 비하인드나 고통이 있었기에 그걸 극복하고 다가온 순간을 더욱 감사하게 받아들이면서 갖는 감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신데, 후학 양성 또한 큰 보람일 듯합니다.
오랜 세월 공연에 매달리며 살다 보니 친구를 만날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남들처럼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살지 못한 게 저한테는 좀 아픔이지만 대신 학생들이 들어올 때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또 하나의 보석들이라는 생각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학생들마다 성격도 재능도 다르기 때문에 가르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들과 소통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 또한 무한한 기쁨과 에너지를 얻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특히 강조하는 성악가의 자질이 있다면요.
성악가는 자신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어요. 자기가 노래를 부르면서 듣는 소리와 밖으로 들리는 소리가 다르거든요. 녹음을 해서 들려주면 다들 자기 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성악가에겐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꼭 필요하죠. 다른 사람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를 객관화하는 건 고통이 따르는 일이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어요. 때문에 성악가에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유연하고 오픈된 자세가 필요합니다. 스스로 중심을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류의 아리아, 미미의 아리아를 부르는 수많은 성악가가 있지만 사람들이 특정 성악가의 공연을 보러 가는 건 바로 그 아이덴티티를 만나기 위해서거든요.
공연이나 학생들 가르치는 것 외엔 어떤 일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우리 가곡이나 한국적 아이덴티티가 있는 작품들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관심이 있어요. 얼마 전 유튜브를 보는데 미국의 한 교수와 성악가들이 '봄처녀’ '가고파’ 같은 한국의 전통 가곡으로 콘서트를 열었더군요. 그냥 멜로디만 갖고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한국어를, 그것도 딕션까지 연구해서 완벽하게 노래를 하는 데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요. 사실 우리 가곡 중에 외국 사람들도 반할 만큼 좋은 작품들이 많아요. 그들도 한국 노래가 너무 아름다워서 깊이 파고들었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들이 먼저 시작한 게 고마우면서도 '우리가 이걸 더 열심히 알려야겠구나’ 반성을 했어요.
박미혜 교수는 '어게인 2024 투란도트’ 공연 이후, 내년쯤엔 오페라 아리아와 가곡들을 묶은 음반을 낼 계획이다. 무대에 서는 것도 좋지만 음반이나 유튜브 같은 매체를 통해 많은 사람과 만나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우리나라 성악가들의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인 데 반해 좋은 오페라 무대는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 점이 아쉽다. 2003년의 '투란도트’ 공연이 오페라 붐을 일으킨 것처럼 이번 '어게인 2024 투란도트’를 계기로 양질의 오페라들이 무대에 올려져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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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해윤 기자
김명희 기자 mayh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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