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만을 위한 회사가 싫다면 [상법 개정의 함정 ①]
올해 들어 윤석열 정부와 야권의 경제 의제는 ‘주가 올리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모양새다. ‘주가(=기업가치) 올리기’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매력 있는 의제다. 경제활동인구(지난해 12월 기준 2900만여 명) 가운데 절반 정도인 1400만여 명이 상장회사 주주다. 거대한 표밭이다. 더욱이 ‘주가 올리기’는 억강부약(抑强扶弱)적 측면이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대기업들의 주가가 낮게 유지되는 현상)의 원흉이 그 지배주주(흔히 ‘재벌’로 불리는 가족과 그들의 영향권하에 있는 회사들)로 지목되기 때문이다. 지배주주들의 소수주주 이익 탈취 때문에 주가가 오르지 않으며, 해외 투자자들은 한국 시장을 외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배주주는, 정치인이 정의 실현을 위해 맞서 싸워야 하는 ‘공공의 적’인 것이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회사의 의사결정 기구인 이사들이 지배주주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도록 강제할 수 있다. 현행 상법에 “이사는 회사를 위해 그 직무를 충실하게 해야 한다(이사의 충실 의무)”라는 조항이 있다. “회사를 위해”를 “총주주(주주의 비례적 이익)와 회사를 위해”로 바꾸면 어떨까? 이 상법 개정안은 이사들에게 ‘당신들이 지배주주에게 맞서 소수주주의 이익을 보호하지 않으면 감옥에 보낼 거야’라는 경고다.
윤석열 정부도 지난 6월 중순까지는 비슷한 인식틀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윤 대통령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등이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개정안에 사실상 지지 및 추진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4월 총선 이후 입장을 바꾼다. 7월3일 발표한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엔 이사의 충실 의무 관련 내용이 빠졌다. 그 대신 ‘밸류업(주가 올리기)’을 잘하는 기업(과 그 지배주주)에게 법인세나 상속세 혜택을 주겠다는 지침이 나왔다. 당근과 채찍 중에 당근만 남겼다.
반면 민주당은 지배주주에 대한 정공법을 선택했다. 민주당은 지난 6월 22대 국회 출범 이후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 이외에도 지배주주를 규제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들을 연이어 발의했다. 그러던 와중인 7월11일, 민주당의 대의명분을 한층 강화하는 ‘사건’이 터진다. 이로 인한 공분이 뜨거웠던 7월30일, 민주당은 한국 대기업들의 지배구조를 뒤집을 정책 패키지(코리아 부스트업)를 발표했다.
7월11일의 그 ‘사건’이란, 두산그룹의 구조개편 방안 발표다. 두산은 이 그룹 재편을 계열사들의 ‘인적분할-합병-주식교환’을 통한 재무 건전화, 첨단산업 부문의 시너지 및 투자 확대를 달성하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수주주와 야권에겐 소수주주 이익에 대한 탈취 시도로 보였을 뿐이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상법 개정안들을 촉발시킨 계기도 LG화학의 물적분할이었다. 사실 분할, 합병 등은 지배주주의 ‘음흉한’ 의도의 존재 여부와 별도로, 회사 지분율과 주가를 변동시켜 소수주주의 권한을 침범하는 측면이 있다.
지배주주 지분이 40%, 소수주주의 그것이 60%인 회사 A가 있다고 치자. 분할은 A사에서 특정 사업부를 떼어내 신설회사(B사)를 설립하는 경우다. 분할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인적(人的)분할’과 ‘물적(物的)분할’이다.
인적분할에서는 사람(人)들이 분할 이전의 A사(원 A사)에 가졌던 지분율을 분할 이후의 A사(후 A사, 존속회사)와 B사(신설회사)에 똑같이 유지한다. 지배주주와 소수주주가 ‘후 A사’는 물론 B사에도 각각 40%와 60%의 지분을 인정받는다는 이야기다. 인적분할 이후 지배주주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신의 B사 지분(예컨대 40%)을 ‘후 A사’에 팔고 그 대가로 ‘후 A사’ 주식을 추가(예컨대 20%)로 받는다(설명의 편의를 위해 상황을 지극히 단순화했다).
그 결과가 재미있다. ‘후 A사’는 지배주주로부터 받은 B사 주식 40% 덕분에 B사의 모기업이 된다. 지배주주의 ‘후 A사’ 지분율은 기존 40%에 새로 얻은 20%를 합쳐 60%까지 올라간다. 그의 B사 지분율은 0%다. 그러나 지배주주는 ‘후 A사’를 통해 B사를 지배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돈 한 푼 안 들이고 지배력을 강화했다.
특정 주주의 지분율 상승은 다른 주주들의 지분율 하락을 의미한다. 지배주주는 B사 지분 40%를 A사 지분 20%와 바꿨다. A사의 기업가치를 B사의 2배로 ‘평가’한 것이다. A사 소수주주 측이 ‘엉터리 평가다. 사실은 A사의 가치가 B사의 8배야’라고 항의할 수 있다. 이 경우, 지배주주가 B사 지분 40%로 얻을 수 있는 A사 지분은 5%에 불과하다. 지배주주의 A사 지분율은 45%(기존 40%+새로 얻은 5%)에 그친다.
기업가치 평가액은 극단적으로 다를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진다. 최근 두산 구조개편 논란의 핵심도 결국 기업가치 평가다.
‘그룹경영’에서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물적분할에서 ‘물(物)’은 회사다. 주주들이 아니라 존속회사인 ‘후 A사’가 신설회사 B의 지분을 100% 갖는다. ‘후 A사’에 대한 지배주주와 소수주주의 지분율은 40대 60으로 분할 이전과 같다. B사가 버는 돈은 100% 모회사인 ‘후 A사’를 거쳐 주주들에게 흐른다. 여기까진 소수주주들이 크게 반발하지 않는다. 그러나 B사가 상장해버리면(모자회사 동시상장), 상황이 돌변한다.
‘원 A사’의 기업가치가 200만원이었는데 이 중 100만원에 상당하는 공장, 기계, 기술 등의 자산이 B사로 분할되었다고 치자. ‘후 A사’와 B사의 기업가치는 둘 다 100만원이 된다. 그런데 B사가 상장을 통해 100만원을 새로운 주주들로부터 추가 조달한다. ‘후 A사’의 B사에 대한 지분율은 50%(100만원/200만원)로 줄어든다. 이 정도라도, ‘후 A사’의 B사에 대한 지배력은 절대적이다. 지배주주는 ‘후 A사’를 여전히 40%의 지분율로 지배한다.
지배주주는 왜 물적분할을 감행했을까. 유망 사업(B사) 투자에 필요한 자금 때문이다. 물적분할 없이 ‘원 A사’의 추가 상장으로 100만원을 조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원 A사’에 대한 지배주주의 지분율이 떨어진다. ‘원 A사’의 기업가치 200만원 가운데 지배주주의 몫(40%)은 80만원, 소수주주는 120만원(60%)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주주의 돈 100만원이 더 들어오면 지배주주의 ‘원 A사’ 지분율은 40%에서 약 27%(80만원/300만원)로 하락하기 때문이다.
지배주주는 유망 사업 투자자금을 조달하는 동시에 자신의 지배력도 유지했다. 소수주주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유망 사업부’를 보고 ‘원 A사’에 투자했다. 그 유망 사업부가 자회사로 나가더니 새로운 주주들까지 끌어들였다. 소수주주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알을 B사의 새로운 주주들과 나누게 되었다. 더욱이 모기업(후 A사) 주가는 유망 사업부 분할 이후 하락한다.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면서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로 확대’ 등 상법 개정안들이 집중적으로 발의된 바 있다. 21대 국회 출범 직후인 2020년 말, LG화학은 사내의 이차전지 사업 부문을 물적분할해서 LG에너지솔루션(LG엔솔)을 신설했다. 1년여 뒤인 2022년 1월엔 엔솔을 상장해버린다. 상장 당일, 엔솔의 주가는 공모가(30만원)보다 68% 정도 높은 주당 59만원대로 마감되었다. 모기업인 LG화학의 주가는 전날의 66만4000원에서 61만원으로 8% 폭락했다.
두산의 구조개편안도 LG화학의 물적분할 당시를 방불케 하는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구조개편안의 시나리오는 두산에너빌리티, 두산밥캣, 두산로보틱스 등 계열사들에 대한 인적분할-합병-주식교환으로 밥캣을 로보틱스에 합병하는 것이다. 에너빌리티(밥캣의 46% 지분 보유)와 밥캣 소수주주들은, 두산 측이 ‘캐시카우’인 밥캣의 기업가치를 터무니없이 낮게 평가해서 적자기업인 로보틱스의 자회사로 억지 편입시키려 한다고 거세게 항의한다. 로보틱스는 지배주주의 지분율(68%)이 매우 높은 회사다.
LG화학의 물적분할과 두산의 구조개편안은 모두 이 회사들의 이사회에서 결의되었다. 지배주주나 소수주주나 같은 주주다. 이익도 손해도 같이 보는 것이 맞다(주주의 비례적 이익). 이사회의 결의로 지배주주들은 이익(지배력 강화)을 얻는데 소수주주들은 손해(주가 하락, 지분율 희석)만 본다면 공평하지 않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에 ‘회사’와 더불어 ‘총주주(주주의 비례적 이익)’를 굳이 추가하려는 이유다.
‘회사를 위해’란 문구 때문에 미심쩍은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사들이 계열사가 새로 발행한 주식을 지배주주 가족에게 헐값이나 무상으로 넘겨 배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무죄선고가 나온 판례들이 있다. 주주에게 손실(지분율 희석)을 끼쳤지만, 회사엔 피해(자산 감소, 회사 재산 탈취)를 주지 않았기에 ‘회사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LG화학의 물적분할과 두산의 구조개편안 역시 회사의 자산을 줄이거나 탈취하지는 않는다. LG화학은 물적분할로 새로운 투자를 받으면서 회사 자산이 오히려 크게 늘었다. 이차전지라는 글로벌 유망 사업에 집중 투자하기 위한 개편이기도 했다. 두산 측은 8월4일 낸 ‘주주 서한’에서 로보틱스-밥캣 합병으로 협동 로봇 사업(로보틱스)과 건설기계업(밥캣)의 시너지를 일으켜 기업가치를 더 높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로보틱스의 밥캣 합병 시나리오엔 밥캣의 현금흐름을 로봇 부문에 투자하기 위한 의도가 보인다.
이처럼 ‘현시점’에서 돈 많이 버는 회사가, 유망하지만 적자인 계열사에 자금을 지원하는 경우는 이른바 ‘그룹경영’에서 특별한 일이 아니다. 삼성전자가 그런 방식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회사(지배주주) 측이 소수주주들에게 제시하는 밝은 전망은 장기적으로나 가능하고, 성패 여부도 불투명하다. 소수주주들은 가급적 빨리 괜찮은 수익을 얻어야 한다. 지배주주와 소수주주 사이에서 점점 더 명확히 돌출되고 있는 이 간극은 앞으로 한국 자본주의를 순탄치 않은 경로로 밀어 넣을 터이다.
“이사는 회사와 총주주를 위해”라는 상법 개정안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거수기(이사)를 통한 지배주주의 전횡은 어느 정도 통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상법에 명문화된 “회사와 총주주를 위해”가 초래할 리스크는 만만치 않다. ‘밸류’를 ‘업’하려다가 ‘밸류’의 기반을 허물 수도 있다.
회사가 ‘법인격’ 부여받은 이유
주식회사는 법인(법적 인간)으로 소유, 계약 등에서 인간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그러나 주식회사는 철저히 무능하다. 두뇌도 다리도 팔도 없다. 그래서 인간(이사)에게 업무를 위탁하면서 ‘회사 대신 회사를 위해 일하고 회사의 이익에 반해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 안 된다’는 의미의 ‘충실’을 의무로 부여한 것이다. 선진국들의 상법엔 “회사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가 반드시 포함된다. 여기서 ‘회사’는, 문자 그대로 ‘회사 그 자체’다. 이사는 ‘회사의 장기적 생존과 번영’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의미다.
“회사와 주주를 위해”는 ‘주주를 위해’로 쉽게 변질될 수 있다. 이사가 회사의 장기적 생존과 번영을 위해 일하지 않더라도 회사는 그에게 항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에겐 억울함을 느낄 두뇌도 고소장을 쓸 손도 없다. 주주는 적극적으로 고소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이사가 회사의 장기 발전이 아니라 주주의 단기 이익에 봉사할 유인이 충분하다.
문제는 회사와 주주의 이익이 상반되는 경우다. 최근 진보 성향 시민단체의 한 간사는 언론 기고문에서 “주식회사의 주인은 (모든) 주주다. 주식회사에서 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곧 주주를 위해 일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라고 주장했다. 진짜 그럴까? ‘주주 우선주의’의 본향인 미국 국적 테크 자이언트인 애플은 ‘주주환원’ 차원에서 2020년대 들어 매년 800억~900억 달러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하고 있다. 자기자본(equity capital·회사가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기본적 밑천)이 600억 달러대 중반에 불과한데도 돈을 빌려서까지 주주에게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맥도날드도 2018년부터 자본잠식 상태지만 빌린 돈으로 매년 수십억 달러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하고 있다. 보잉 역시 연구나 신제품 개발 대신 자사주 매입에 주력하다가 737맥스 기종의 결함이 드러나면서 경영 위기를 겪었다. 보잉 이사들은 주주를 위해 일했지만 그것이 회사엔 대단히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더욱이 ‘이사의 충실 의무’ 개정안은 회사와 관련된 다양한 의제들을 ‘지배주주와 소수주주 사이의 갈등’으로 국한시킨다. 회사의 이해관계자는 주주 이외에도 노동자, 채권자, 하청업체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대기업 이사의 의사결정은 주주들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장기 발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이사가 주주의 이익을 과잉 대표하는 것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국가경제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회사와 주주를 위해”의 취지는 소수주주 보호다. 다만 모든 소수주주가, 쌈짓돈을 투자하는 ‘소액’주주인 것은 아니다. 대기업의 총지분 가운데 3% 이상을 확보할 정도로 자금력이 강한 기관투자자(사모펀드, 헤지펀드 등)라도 경영권을 잡지 못했다면 소수주주다. 주주행동주의로 무장한 국내외 기관투자자들은 회사의 존속과 발전보다 수익 극대화에 무게를 얹을 수밖에 없다.
대안은 지배주주의 꼭두각시 이사와 소수주주에게 충실한 이사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일 수밖에 없을까.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은 “회사가 ‘법인격’을 부여받은 것은 공기(公器)로서의 역할을 기대받기 때문”이라며 “회사의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는 소수주주의 희생을 강요하는 지배주주는 물론 단기 수익을 위해 회사의 장기적 이익을 침해하는 주주에게도 대항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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