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은 재벌을 바꿀 수 있을까 [상법 개정의 함정 ②]
더불어민주당은 7월 말, ‘코리아 부스트업(boost up)’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소수주주’ 권한의 강화(기업지배구조 개편)로 주식가치 상승을 노린다는 점에선 윤석열 정부가 내놓은 당초의 ‘밸류업(value-up)’ 프로그램과 비슷하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지난 6월 말 이후 기업지배구조는 건드리지 않는 쪽으로 밸류업의 정책 방향을 바꿨다. 대신 ‘주주에게 많은 돈을 돌려주는’ 회사와 그 지배주주에 대해 법인세 및 ‘기업승계 상속세’ 완화 등의 혜택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로써 대기업 지배주주(이른바 ‘재벌’)들을 정면공격하는 민주당 ‘부스트업’은 더욱 선명한 정치적 성격을 과시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당 ‘부스트업’의 실현 방안은 △이사회 충실 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 △독립이사 선임 의무화 △감사위원의 분리 선출을 단계적으로 확대 △집중투표제 활성화 △상장회사 전자투표와 위임장 도입 의무화 등이다.
■ 독립이사 의무화
한국 기업들에서 ‘이사’는 지배주주의 강력한 영향권 내에 있다. ‘사내이사(대표이사 등)’는 대체로 지배주주 가족 혹은 이들과 끈끈한 인연으로 얽힌 사람들이다. ‘사외이사(상법에 지배주주 및 회사와 관계없는 자로 선임하도록 규정)’는 ‘사내이사를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선임되지만, 정말 그렇게 해왔는지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정치권이나 언론계 출신이 여러 기업의 사외이사를 번갈아 맡으며 지배주주의 거수기 노릇을 전문적으로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른바 ‘직업적 사외이사’들이다. 이런 이사회가 다음 이사 후보를 주주총회(주총)에 추천한다. 지배주주는 자신의 다수 의결권으로 본인 진영의 후보를 선임하고 적대 후보는 쳐낸다.
독립이사의 ‘독립’은, ‘지배주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환경이나 노동, 복지 분야 등의 전문가가 독립이사로 발언권을 얻는다면 회사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 장기 성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 터이다. 현실에서는 ‘의무화된 독립이사’로 국내외 기관투자자(펀드) 측이 선임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야 민주당이 원하는 주주환원 규모도 늘어난다.
미국계 사모펀드인 엘리엇의 경우,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지배주주와 소수주주들에게 ‘독립이사’ 관련 서한을 여러 차례 보낸 바 있다. 이사로서 무엇을 하겠다고 했을까? 자사주 대규모 매입 및 소각, 당기순이익보다 더 많은 특별 현금배당, 비용 삭감(이로 인해 늘어난 이익은 주주에게 환원) 등이다. 소수주주들에겐 가문 날에 내리는 비처럼 반가울 수 있겠지만, 해당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과 장기 성장에 이로울지는 의심스럽다.
■ 집중투표제 활성화
대다수 주총에선 지배주주 측 이사가 선임될 것이 뻔한 투표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어떤 회사의 전체 주식 수가 100개인데 지배주주 측이 60개, 소수주주 측이 40개를 가졌다고 치자. 이사 후보가 4명이라면, 주주들은 네 차례에 걸쳐 후보별로 찬반을 표시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지배주주 측이 후보마다 60대 40으로 이긴다.
이 사례에서 지배주주 측은 60표씩 네 차례, 모두 240개 의결권을 행사했다. 소수주주 측의 전체 의결권은 160개(40표×4차례)다. 그런데 주주들이 각자의 모든 의결권을 한 번에 행사한 뒤 득표수에 따라 이사를 선임(집중투표제)하면 어떻게 될까? 소수주주 측이 적어도 후보 한 명은 거의 틀림없이 이사로 선임할 수 있다. 160표를 그에게 몰아주면 되기 때문이다. 지배주주의 의결권(240개)은 여러 후보에게 분산될 것이다. 이처럼 집중투표제에선 소수주주(‘소수’라지만, 이사 후보 추천이 가능할 정도의 의결권을 가진 국내외 기관투자자)가 자기 측 이사를 선임할 길이 열린다.
이는 현행 상법으로 허용되어 있다. 2인 이상의 이사를 선임하는 주총에서 ‘의결권 3% 이상’ 주주는 회사 측에 집중투표 방식을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회사가 거절할 수 있는 것으로 상법에 규정되어 있기도 하다. 부스트업의 집중투표제 ‘활성화’가 ‘의무화’를 의미한다면, 앞으로의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 감사위원인 이사의 분리 선출 단계적 확대
감사(위원)는 막강한 자리다. 이사들의 직무 집행, 회사 업무, 재무 상태 등을 감사한다. 언제든 영업 보고를 요구할 수 있다. 회사의 총괄적 전략이나 기밀에 접근 가능하다. 임시주총을 소집할 권리도 갖는다. 마음만 먹으면, 회사 경영 사안들을 쟁점화할 수 있다. 지배주주라면 적대 세력에게 감사위원 자리를 주고 싶지 않을 터이다.
상장 대기업의 감사위원회는 이사회 소속이다. 감사위원도 이사다. 2020년 12월 상법 개정 이전엔 ‘지배주주에 비판적인 인사’의 감사위원 선임이 원천 봉쇄되어 있었다. 지배주주가 다수 의결권을 행사하는 주총에서 이사를 뽑은 다음 그들 중에서 감사위원을 선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0년 상법 개정으로 상황이 바뀐다. 감사위원회(3명의 이사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에서 최소한 한 명은 주총에서 다른 이사들과 분리하여 선임하게 되었다. 감사위원이 3명인 회사라면, 2명은 이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선임된다. ‘지배주주가 다수 의결권을 가진’ 주총에서 뽑힌 이사 가운데 2명을 감사위원으로 발탁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위원 한 명의 선임은 주총 결의를 따로 거쳐야 한다. 이 결의에서 지배주주는 이른바 ‘3% 룰’에 걸려 자신의 의결권을 3% 이상 행사할 수 없다. 지분율이 30%라면 27%를 포기해야 한다. 이로써 소수주주 측이, 비록 한 명이긴 하지만, 감사위원회에 자기 측 사람을 심을 길이 열렸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의 단계적 확대’는, 감사위원회의 과반수나 전부를 분리 선출하는 방향으로 나가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감사위원들은 다른 이사들보다 지배주주로부터 더욱 독립적일 필요가 있으니, 타당한 개혁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 확대 등이 함께 시행되면서 국내외 기관투자자들이 대기업 이사회의 과반수를 넘보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기관투자자들은 회사의 장기적 이익보다 신속한 주주환원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 상장회사 전자투표와 위임장 도입 의무화
전자투표제는 소수주주, 특히 개인투자자들이 직접 주총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인터넷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다. 지배주주와 펀드(소수주주)가 일반 주주들로부터 경쟁적으로 의결권을 위임받아 대리 행사하는 ‘위임장 대결’도 인터넷에서 이뤄질 수 있다.
현행 상법은 ‘전자적 방법에 의한 의결권의 행사’를 “이사회의 결의”에 맡기고 있다. 덕분에 상당수 회사들이 물적분할이나 합병 같은 주요 사안에 대해 전자투표 방식을 채택하지 않는다. 민주당의 이 방안은 전자투표와 전자위임장의 시행을 의무화함으로써 소수주주들의 의사를 상장회사의 경영에 좀 더 반영토록 하겠다는 취지다.
이 밖에도 다중대표소송(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에게 소송을 제기) 활성화, 의무공개매수 강화, ‘이사의 보수 결정에 대한 주주 승인’ 등 소수주주의 권한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법안들이 최근 야권에서 발의되었다. 야권이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한 데다 정부·여당도 지난 6월까진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추진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수 법안의 국회 통과가 가능해 보인다. 이로써 한국 자본주의는 크게 바뀔 것이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